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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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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과 에세이 사이의 글을 쓰고 싶다고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내게 소설‘거대한 상상력이 필요로 하는 것’ 으로 인식 되었다. 그리고 에세이‘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무수히 많은 경험을 요구하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소설이면 소설 에세이면 에세이 명확한 구분을 짓고 싶지 않다. 나의 글은 소설임과 동시에 수필이었으면 좋겠고 쓸 것이다. 정확한 그 사이를 넘나들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순간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의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함은 없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노 요코. 그런 능력의 기초는 사소한 것들을 ‘관찰’ 하고 그 순간 들었던 생각들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렇게 맛깔스러운 책을 얼마든지 출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에세이로 분류되지만 그 안에는 그녀의 소심한 상상과 솔직함이 담겨있다. 생각이라는 것을 상상으로 구분해야 할지 말지는 모르겠다.

 

 

 

 

#1. <누울 수 있다는 것>

어젯밤 지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언덕을 올랐다. 막차 버스는 끊겼고 역에서 집까지 가는 10분 남짓 안 되는 그 거리가 매우 버겁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와 이불 한 장 깔려 있는 바닥에 누웠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중력 덕분에 나는 땅의 마찰을 느낄 수 있고 서있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깊은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 날 아침 새벽 일찍 일어나 지하철을 탔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직 하루를 끝내지 못하고 집으로 막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지막 환승지로 가는 구간에서 한 여자가 꾸벅꾸벅 졸더니 내 어깨를 연달아 쳤다. 그녀는 고개를 팍 숙이기도 했고 오뚝이처럼 좌우로 목을 흔들기도 했다. 그녀가 창피함과 싸워 이겼다면 나처럼 쾌락을 느꼈을 텐데.

 

 

 

 

#2. <신호>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날카로웠던 신경 세포들도 축 처진다. 이어서 배에 신호가 전달된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언제부턴가 휴대폰이던 책을 들고 읽는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그런 장운동의 신호가 느껴지면, 잠깐의 여유라 느껴져 반가울 지경이니 나란 놈은 별종이다.

 

 

글이라는 것은 잘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는 되질 않으니 참 애석하다. 그러나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솔직해지되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쓸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숨기고 싶은 것이 있고 때로는 이랬으면 어땠을까? 라는 질문도 던지면서 그 상황을 상상으로 쓸 수 있다. 내가 관록 있는 사노 요코처럼 글을 쓰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나이를 먹거나 보다 많이 상상 하거나.

 

 

 

 

 

 

 

 

“산다는 건 뭘까?”

“죽을 때까지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든 한다는 거야. 별 대단한 거안해도 돼.”

“그럴까나, 아야가 말이지, 그 앤 서비스 담당이니까, 내가 멍청하니 있으면 마구 떠들어 대면서 나를 웃기려고 해. 웃어 주지만 말이야. 우후훗”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잖아. 바다 보고 있으면.”

나는 인격자다. 나는 또 말한다. “나 너 좋아해. 넌 제멋대로고 뭐든 열심이고. 아, 나 널 좋아하는구나 하고 때때로, 후다닥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 네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나도 살아 있는 게 기쁘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인격자와 우울증中> p107-

 

 

 

 

그러나 이별이라고 하는, 인생의 도정에서의 죽음은 우리의 혼과 육체로 견뎌 내야 한다. 아마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때 마음을 위로해 줄 따뜻한 말 한마디 같은 게 있을까. 헤어지자는 인간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란 게 도대체 있을 수나 있을까.

마음 독하게 먹고 “싫어졌어,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 하고 말을 뱉은 다음, 상대로부터 경멸과 증오를 몸으로 받아 낼 각오가 없다면, 사람과 헤어지는 일은 안하는 게 좋다. 헤어질 때는 괜히 좋은 소리 하지 말고 독하게 말하는 게 정답이다. 단 한마디의 이별의 말이 실로 다양한 드라마를 상상하게 한다. 이별도 상상으로 해 보는 건 재밌네. -<말中> p214-

 

 

 

 

“너같이 못생긴 애를 누가 데려가겠니.”

나의 미래는 아버지에 의해 예측당한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어머니 하고 똑같이 생겼으니까, 나도 아버지 정도의 남자를 꼬이는 것은 가능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책을 읽으면서 초조해 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알았다고나 할까. 더 이상 아무 인물에게나 나를 일치시키려 노력하지 않는다. 나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나의 ‘입장’이 생긴 것이다.

-<잘 가오 신데렐라中> p309-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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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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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군가는 말한다. 이제 그만 하자고. 보상받을 거 다 받은 것 아니냐고. 공동체를 강요 했던 과거와는 달리 한 개인의 만족과 삶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개인주의의 슬로건 “나만 아니면 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외쳤던 그 말이 모질게 느껴진다. 240일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의 인터뷰를 담아놓은 이 책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언론과 정부에 대한 ‘진짜모습’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후 얼마지 나지 않아 언론은 ‘전원 구조’ 라는 말도 안 되는 오보를 내보냈다. 배가 기울었다는 자식들의 말에 부모들은 학교로 모인상태였다. 그 말을 들은 부모들은 안심했다. 하지만 진도 체육관으로 가는 길에 언론의 말은 점점 바뀌어갔다. 그들이 진도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해경들은 구조작업을 하고 있지 않았고 그들은 생존자 명단에서 자식들의 이름을 찾기에 급급했다. 울부짖으며 이름을 불렀다. 기자들은 카메라 플레쉬를 터트리며 기삿거리를 꾸며내는데 집중했다.

 

 

 

 

 

 

아직 빛조차 보지 못한 그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하염없이 구조를 기다렸는데 누구하나 책임지고 그들을 구하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절망하고 원망했겠는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는 구체적인 방안과 시행 명령을 내리지 못했고 배의 선장이라는 사람은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을 내뱉고 먼저 빠져나왔다. 세월호 사건은 역할수행에 대한 책임감의 부재로 벌어진 참사라고 할 수도 있다. 긴급 상황에 대한 매뉴얼과 가이드라인은 무용지물이었고 안전장치를 구축하자는 취지에 특별법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또 한 번 실망감을 안겨다 주었다.

 

 

 

 

 

 

남겨진 유가족들은 거리에 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도 진행되는 것이 없었다. 청와대에 가서 단식 투쟁을 하고 진상규명을 요청하고 목소리를 냈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진상규명을 위해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그들의 진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단 한 사람이라도 귀기울여준다면, 다음에 벌어질 사고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현명하게 대처 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내어 팽목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 당시의 나 역시 그 사건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서명운동에 동참을 하긴 했지만, 내 서명이 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 몰랐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내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아픔이다. 그들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고 삶에서 아주 큰 중심을 잃어버렸다. 방황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그들은 다시 일어나 자식들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들은 그래야 될 것 같다고 말한다. 2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실종자 가족과 유가족들의 시간은 2014년 4월15일에서 멈추어 있다. 수많은 희생자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잊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거리를 걷다보면 세월호와 관련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다음에 그들을 본다면 잊지 않았다고 말 할 것이다.

 

 

 

 

 

 

 

우리 부모님들이 겪었잖아요. 공공방송이나 정치판에서 똑같은 장면을 두고도 어떻게 말들이 달라지고 뒤집히는지를요. 가슴 뼈저리게 겪었잖아요. 똑같은 내용도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백명이 죽고 천명이 죽어요. 무죄가 살인죄가 되고 살인죄가 무죄가 돼요. 그래서 이 방송만은 고난도 기술 따지지 말고 순수하게 가자. 아이디어를 내는 건 좋은데 자꾸 세상 권력의 흐름에 끼어들어 똑같이 머리를 굴리면 안돼요. 우리는 순수해야만 침몰하지 않습니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순간 다 말려듭니다.

-p185-  첫 마음을 잃지 않아야 침몰하지 않습니다>

 

 

 

 

 

말은 품어내지 못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누군가에 관한 기억이 그렇다. 내뱉자마자 사그라지는 이야기 속에서 기억은 쉬이 흩날린다. 음절과 음절, 어절과 어절이 끊고 매조지는 동안에도 흔적은 조금씩 희미해진다. 결국 말은 쌓여갈수록, 기억되는 이를 그만큼 가라앉힌다. 애당초 기억은 온전하지도 않다. 바람, 감정, 판단은 매순간 기억하는 이의 머릿속을 마름질한다. 그 와중에 기억하고 싶은 것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기억해야 한다고 믿는 것과 기억하면 안 된다고 믿는 것이 엇갈린다. 결국 말이 반복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남겨지는 것은 두루뭉술한 잔상뿐이다. -p199-<블로그, 그리고 수현이의 ‘버킷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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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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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꺼운 책 한 권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 가족의 역사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한 권의 소설과도 같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모르몬교라는 한 종교에 역사까지 되짚었다. 정확한 원인은 필자도 끝내 밝히지 못했지만, 나의 추측으로는 그의 부모와 자유.  이 두 가지에 원인을 두려 한다. 게리 길모어는 자신이 감옥에서 ‘자유’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자유를 잃어버린 것은 부모의 양육 방식에서 벌어진 그 다음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어렸을 때부터 별 것 아닌 이유로 폭행을 일삼았던 아버지와 계속되는 범죄 행동에 대하여 소년원과 감옥을 오가며 경험했던 흉악스럽고 포악스러웠던 나날들. 결국 게리가 선택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폐쇄되었던 사형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게리는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에 대하여 ‘피의 속죄’를 원했다. 이것은 그 당시 최고의 화젯거리였음에 틀림없다. 없어졌던 것을 다시 부활시킨다는 의미는 그만큼 사건의 무게가 무거웠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가족들은 게리가 죽기 전에도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그의 형제인 게일런의 죽음을 통해 마음의 깊은 상처를 받았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은 영원한 마음의 상처였다. 남아있는 가족들은 앞으로의 나날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살아가야만 했다. 누군가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아픔이었고 고통이었다. 마이클은 게리가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살았으면 했다. 하지만 게리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에게서 자유를 앗아간 세상이라는 감옥에서 그는 해방되지 못했다.

 

 

 

 

사건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나는 먼저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가족을 이루는 단위. 그것은 개인이었다. 가족이 모여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지고 국가가 탄생한다. 국가가 있어야 가족이 있고 가족이 있어야 개인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 것인가. 그것이 어찌 되었던 간에 인간은 어느 집단에 귀속되기 마련이다. 그 집단은 우리가 선택 할 수 있는 집단이 있고 가족과 같이 내가 태어남과 동시에 자동으로 선택되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이 책에서도 게리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고 그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언급이 있다. 좋은 부모를 만나 내가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살기 좋은 사회’ 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겠다.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누군가에게 좆기는 삶을 살았던 프랭크 길모어. 살얼음판을 걷듯이 그의 과거에 삶은 불안했고 주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엎질러진 것들이 너무 많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몫을 그의 자식들이 짊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그의 옆에서 많은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겪은 것은 그의 아내 베시다. 그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녀는 죽는 날까지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었다.

 

 

 

 

역사는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 될 수 있다. 이 책을 쓴 마이클 길모어는 실러가 인터뷰한 그의 어머니와 게리 길모어의 녹음테이프를 듣고 유일하게 남은 가족 프랭크의 기억을 합쳐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절망의 순간으로 그들을 몰아버린 이 사실을 직면한 그들의 심정은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고 하는 먼저 떠난 자들에 대한 원망이 깊을지도 모른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죽은 자에 대한 고통보다 산 자에 대한 고통이 훨씬 앞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종결을 누구도 예측 할 수 없지만, 사형이나 암 선고를 받아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종류의 자유가 박탈된다.’ 는 의미로도 해석 할 수 있지 않을까. 살고 싶은 자유, 먹고 싶은 자유, 자고 싶은 자유 등. 그러나 모든 종류의 자유를 박탈시키는 사람이 신이 아닌 같은 인간이라는 것은 참으로도 모순적이다. 인간이 때로는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본 것도 같다. 인간은 스스로 죽음이라는 종지부를 선택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네 심장을 향해 쏴라! 그것은 다른 말로 ‘너의 자유는 네가 쟁취하고 선택해라.’ 라는 뜻으로 풀이 해본다.

 

 

 

 

 

 

 

 

 

 

 

 

그녀는 사형제도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는 편지를 써서 주지사에게 보내기도 하고, 죄인의 형량을 감안해달라는 편지를 주지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나에게 자신의 신념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이런 식의 죽음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죽음, 즉 예정대로 진행되는 유일한 죽음이며, 그러므로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죽음이라고 했다.

-p102-

 

 

 

“당신에게는 게리가 죽는 편이 가치가 있나요, 아니면 살아 있는 게 더 가치 있나요?”

실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오래전이었지요, 내가 사진기자였을 때, 화재현장에 취재를 간 적이 있었어요. 소방대원들이 창문을 통해 한 사람을 구조하고 있었는데, 그때 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이 순간 내가 사진을 찍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카메라를 내려놓고 사람을 구하는 걸 도와야 할 것인가. 나는 사진을 찍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때 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실재하는 현실을 포착하는 것이 사진기자로서의 나의 의무라고 말입니다. 당신이 던진 질문에 답을 한다면, 난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입니다.” -p583-

 

 

 

한때는 내 삶에서 아주 개인적이고 괴로웠던 주제가 이제 사람들의 관심과 언론의 초점이 되었다. 내 형의 삶이ㅡ 그러니까 어느 면에서는 내 삶의 일부도ㅡ 이젠 내가 어쩌지 못할 정도로 커져버렸다. 조금만 있으면, 그건 더 이상 내 삶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해 너무 깊은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될 것 같다. 느낌은 고통이나 수치심, 혹은 괴로운 추억들이나 끝내지 못한 사랑과 증오 같은 것들을 지워버리지 않을 테니까. -p616-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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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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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을 걸었다. 작가, 연주가, 화가 예술가로 통칭되는 그들이 살아온 흔적들을 따라 걸어본 유럽의 땅.  알고 보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이는 유럽의 땅. 특정한 장소에 스며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사상과 상념들을 엿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이름을 딴 박물관과 도시들을 탐닉하며, 역사는 현재에도 실존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태초에 모든 것들에정해진 것은 없었다. 나무 한 그루가 그곳에 있는 이유 혹은 특정 건물이 그곳에 지어진 이유가 모두 어떤 보이지 않는 유대감으로 이어져 있었다.

 

 

 

 

예술성이 풍부했던 이들에게 보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단순히 사물이 그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낮은 차원의 시점에서 벗어나 환상과 상상속의 인물들 혹은 풍경들을 그 위에 덧칠하여 표현해 내는 방법들에 따라 음악이 되고 미술이 되고 글이 될 수 있었으리라. 영감이라는 것은 사소하지만 누구나 할 수 없기에 사소하지 않다. 비범한 사람들에게만 보일 것 같은 그러한 능력들로 만들어낸 작품들을 보며 나 역시 그들과 비슷한 상상을 할 때면 묘한 쾌락감과 특별함이 느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배경이 된 실제 장소가 내 상상과 비슷할 때처럼.

 

 

 

 

그들이 남겨놓고 간 잔여물들과 묘지에 새겨진 글자를 보면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실체는 아니지만 그들의 영혼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영혼의 기운과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그들이 머물렀던 곳에 서성거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말이 없지만 그곳에 있었으니까.

 

 

 

 

한때는 역사가 가진 것이 온통 상처와 아픔 따위뿐인 것인가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전쟁, 투쟁, 혁명, 진화, 개혁 등 살을 맞대고 생생하게 이뤄낸 것들도 있지만 이들처럼 아름답게 싸울 수도 있다는 점을 배운 것 같다. 그들은 어디 즈음 있을까?

 

 

 

 

 

 

 

 

 

 

 

 

 

황현산 선생의 산문 중에 바닥에 깔려 있는 시간 이란 글이 있다. 섬마을 모래밭에 누워 빙글빙글 돌아가는 별을 보며 모래라는 거대한 손에 흔들렸던 기억과 군대 구보대에서 본의 아니게 이탈해 숲에 아픈 몸을 누이다 나뭇잎 갉아먹는 벌레 소리에 평화로움을 느끼며 숲이라는 비단 그물에 걸린 자신을 떠올리는 내용이다. 그처럼 수많은 묘지들에 걸어두고 다닌 내 마음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빗방울로 신호를 보내는 것인가 문득 반가울 때가 있다. 그리고 자연과의 합일을 체험한 선생의 고백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헛된 시도로 가득 찬 인생이 그럼에도 결국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묘지에서는 종종 하게 된다. -p120-

 

 

 

 

“고용 형태와 경제적 자립도에 따라 이곳도 다 다른 대답이 나올 거예요. 도시에서 일하다 시골로 왔다 해도 확실한 직업을 가지고, 혹은 가치가 제법 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처지라면 더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만요. 그래도 빌뉴스나 카우나스 같은 도시에서보다는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며 살게 되니 아무래도 전체적인 만족도는 높지 않을까 생각해요.”

머리를 써서 살던 사람들이 몸을 쓰며 고되게 생활하면서도 이것이야말로 쉬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현장을 보았다. 문제의식의 세계에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더라도 실천적 태도에서는 낙천적인 세계관을 유지해나가는 견고한 사람들을 쉽게 잊을 수 없다. -p219-

 

 

 

 

19세기 러시아 소설에 등장하는 교양 있다 하는 자들의 대화는 죄다 프랑스어로 진행되고, 독일인들조차 “파리에 가보니 낙후된 조국의 현실이 더욱 암담하게 보인다.”고 말하기 일쑤였다고 하니 어쩌면 내가 파리에서 확인해야 할 프랑스적인 것의 실체란 제국의 변방으로부터 몰려든 천재들의 프랑스라는 바탕색에 계속해서 덧입힌 다양한 덧칠들이 아닐까 싶었다. -p238-

 

 

 

 

활기차지만 번잡스럽지 않고 세련미가 넘치지만 화려하다고 말할 수 없는 도시가 오늘날의 베를린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애초에 도시의 관문쯤으로 지어졌던 것이 동, 서로 도시와 나라가 나뉜 마당에는 분단의 상징이되었고 이제 하나가 된 독일에서 통일의 상징이 된 의미심장한 문이다.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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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뻬 씨의 행복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오유란 옮김, 베아트리체 리 그림 / 오래된미래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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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행복 여행’ 어쩜 단어가 주는 느낌마저 웃음 짓게 될까. 행복은 많은 돈을 갖거나 큰 집을 사는 것도 부왕 소리를 내며 달리는 고급 스포츠카를 갖는 것도 아니라고. 평소같이 아침 햇살을 보고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보며 주말에 가끔씩 마음 맞는 친구 녀석들이랑 만나는 것이 행복이라고.

 

 

 

어째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보다 행복하다고 말할까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컴퓨터와 핸드폰이 보급되지 않은 나라. 우리는 그런 나라들을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후진국이라 부른다. 그런 것들이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고 잘 살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과거 원시시대에는 맨 살을 드러내고 다녔고 집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약하고 보잘 것 없는 풀 혹은 임시적인 피난처였을 뿐. 인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고 사냥을 했다.

 

 

 

 

 

불과 물을 이용하여 사냥을 하지 않더라도 농사를 짓게 될 수 있게 되었다. 날씨를 이해하고 자연을 이해한 결과였다. 교환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무기라는 것이 생겨나고 경쟁과 권력이라는 것이 나타나면서 같은 인간이더라도 계급이 생겨났다. 똑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사상과 문화가 발달했고 언어도 다양해졌다. 배, 비행기, 기차 등 교통수단이 발달 하면서 문화를 교류 하게 되며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좋은 점도 분명 거기에 있지만 동시에 비교 대상이 넓어졌다는 뜻도 된다.

 

 

 

 

 

 

 

 

 

꾸뻬가 여행을 하면서 터득한 행복에 대한 배움들. 그 배움들을 여행을 통해 체득 할 수 있다면 나는 배움1번을 제일 먼저 배우고 싶고 알고 싶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가끔 이런 원초적인 질문을 생일 때 생각해본다. 내가 태어난 이유와 동시에.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꼭 행복은 아닐 테지만 행복은 항상 곁에 두면 좋은 친구 같다. 노승이 말했던 것처럼 행복을 목적으로 정해버리면 행복을 옆에 둘 수 없다.

 

 

 

 

 

짧은 여행일정 속에서 꾸뻬는 훌륭한 교수들이 시간과 공을 들여 조사한 연구결과 만큼이나 행복에 대해 알아갔다. 전문적인 용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가 노트에 적은 행복의 배움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행하지도 않으면서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꾸뻬의 병원에 찾아 올 때 꾸뻬는 자신이 여행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 여행의 이야기들은 꾸뻬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고 위로 받는다. 이 책이 12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진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방증이 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갖기를 원하는 것들의 차이, 현재 갖고 있는 것과 과거에 갖고 있었던 최고의 차이,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의 차이. 이것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면 당신은 더욱 행복 할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과거의 내가 미래에 내가 웃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웃는 것이다!

나의 행복 배움

1. 행복은 이마와 목에 땀방울이 흘릴 정도로 고되고 힘들어도 뿌듯한 것이다.

2. 행복은 잠시 후에 벌어질 좋은 일들을 생생하게 상상하는 것이다.

3. 행복은 아이들의 웃음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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