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소리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진명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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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시마 유키오를 만난 것은 『금각사』에서였다. (블로그에 어느 포스트에도 썼던 것 같지만) 이 글을 읽고 실로 오랜만에 두려움과 피로함에 눈가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더랬다. 선 밖의 것을 거부하는 듯한 광기, 금속성의 날선 감촉, 질린다 싶을 정도의 탐미주의, 헐떡이는 욕망과 무섭도록 유려한 문장. 그의 집요함과 음험함에 감탄스러웠고, 생경한 문장에 감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책이기도 했다. 그 뒤로 『비틀거리는 여인』과 『가면의 고백』등을 읽었지만 -정작 『금각사』와 함께 그의 대표작인『우국』은 아직 읽지 못했다- 이 남자를, 이 작가를 어떻게 판단해야하는지는 여전히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책, 『파도소리』만은 다르다. 얇은 문고본으로 되어 있는 작고 아담한 책은 겉모양만큼이나 소박하고 예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내용도, 필치도 읽기 쉽고 시원스럽고 소담한 풍경과 무엇보다도 사랑스럽다. 『파도소리』는 미시마 유키오의 책 중 -어쩌면 유일하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다.

『파도소리』의 스토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시원스럽고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작고 소박한 마을, 그 마을 유지의 아름다운 딸 하쓰에와 우직하고 과묵하고 성실한 소년 신지의 사랑 이야기. 몇몇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긴 하지만 결국에 두 사람의 사랑이 축복을 받는다는 뭐 그런 이야기. 애초에 작가가 ‘다프니스와 클로에’로부터 착상을 했다고 하니,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엔딩을 맞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견 뻔하고 단순한 이 이야기를 내가 사랑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전략)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로 좋아질 거야. 침묵해도 언제나 바른 것이 승리하게 마련이지. 테리 영감은 바보가 아냐. 그 양반이 바른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지 못할 리가 없지. 야스오는 내버려둬라. 바른 것이 강한 것이야.”

“신지의 어머니도 생활이 편치 않다고 들었는데, 뭐 어머니와 동생을 돌봐드려도 좋은 일이고, 얘기는 차츰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아무한테도 하지 않은 이야기야. (중략) 남자는 기력이야. 기력만 있으면 그만이야. 이 우타 섬의 남자가 되어서 그게 없으면 못써. 집안과 재력은 둘째 문제야. 그렇지 않은가, 등대장 부인. 신지는 기력을 갖고 있는 남자야,”

 

첫째는 작가가 묘사하는, 우타 섬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에 대한 감탄. 작고 폐쇄적이고 그만큼 정치적인(웃음) 이 마을은, 마치 화폐나 경제개념이 없었을 듯한 아주 옛적, 그러니까 묘하게 도태와 순리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바다에 대한 외경심과 경애로 살아가는 이들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순응하며 이겨나가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기상과 자신의 몸을 믿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되 그것을 최고치로 끌어가기 위한 정직함과 모험심 또한. 해가 뜨면 일찍 일어나 물가로 나가고, 해가 지면 신의 터전(바다)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온다. 등대의 소중함을 알고, 자신의 몸 하나로 기상과 이상(異常)을 감지할 수 있고, 자연이 준 것을 먹고 품고 기르며 산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줄 알 것이라는 선장의 단언과 재산이나 집안보다 기력이 먼저라고 호탕하게 말하는 하쓰에의 아버지(이래뵈도 그는 이 섬의 최고 지주다). 나는 선량하면서도 단순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명했다. 특히 그것은 남자주인공인 신지에 이르러 절정을 달한다. 햇빛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와 새하얗고 고른 치열, 진돗개나 시바견을 떠올리게 하는 까맣고 정직한 눈. 소년다운 부끄러움과 장남다운 의젓함과 풋사랑을 하는 설렘과 바다사람 특유의 우직함과 성실함. 신지에게는 농을 치는 재치와 세련됨이나 유들함 같은 것은 없지만 대신에 자신의 가족을 아낄 줄 알고,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려는 용기가 있다. 바다를 두려워하지만 그것에 설레하며, 유창한 화술은 없지만 진심을 고하는 선량함과 정직함이 있다. 마치 인간이 존재하기도 전, 진정한 태고(太古)적을 떠오르게 하는 무연함과 선함이 존재하는 맑은 소년이다.

첫 번째가 우타 섬 사람들의 성향과 신지의 매력이었다면, 두 번째는 작가가 묘사하는 풍광의 담대함과 섬세함이다. 귓가를 스치는 듯한 파도소리와 해변가 특유의 물비린내, 소년이 바라보던 햇살의 찬란함과 일출과 일몰이 다르게 느껴지는 해의 농도. 산지가 두려워하던 그러나 끝내 그 안에 몸을 담근 자신을 알게 했던 그 날의 파도의 거친 소음과 태동. 배 위에서 바라보던 바다와 물가에서 마음에 담던 바다와의 간극 등. 자연을 세밀하게 묘사한 부드럽고도 매끄러운 시선이 이 작은 문고본을 등대의 미명처럼 밝혀준다.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삶과 애정의 무게만큼이나 자연과 그 안쪽을 들여다본 글일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하게 된다. 

 

신지는 둥근 창문으로 태풍이 지나간 후에 찾아오는 쾌청한 푸른 하늘과 아열대의 태양이 내리비치는 붉은 민둥산의 풍광,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스럽게 반짝이는 바다를 보았다.  

신지는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그 하얀 배에 대해 느끼던 미지의 그늘을 떨쳐버릴 수 있어다. 그러나 미지보다 더 마음을 붙잡은 것은 늦여름 저녁에 긴 연기를 뿜으며 멀어져가던 흰 화물선의 형태였다. 신지는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겼던 그 무거운 구명줄을 손바닥에 되새겨보았다. 일찍이 멀리서 바라보던 그 ‘미지’를 단 한 번 손바닥으로 만져본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언제나 만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지는 어린애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이미 저녁놀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 동쪽 바다를 향해 다섯 손가락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들여다보았다.

 

물론 문장 역시 여전히 아름답다. 파랗고 시원스러운 풍경에 어울린 미시마 유키오의 유려한 문체는 그 어느 바다의 쾌청함과 인간의 청아함보다 아름답다.  

 

그러나 희망이 도리어 괴로움이 되어버리는 사랑의 불가사의가 그에게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신지는 있는 힘을 다해 헤엄쳤다. 거대한 괴물은 조금씩 무릎을 꿇고 물러가며 길을 열었다. 단단한 암반이 착암기에 뚤려가듯이. 

신지는 시계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시계가 필요 없다. 대신 그는 낮이나 밤이나 시간을 본능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다. 예컨대 별이 이동한다. 그 별의 이동을 정밀하게 측정하지 않아도 밤하늘의 커다란 궁륭이 순환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자연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주 작은 단서라 할지라도 그는 그 단서로부터 자연의 정확한 질서를 읽어낼 수 있었다.

『파도소리』는 담소한 풍경과 선량한 인물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식의 <다프니스와 클로에이야기>일지도 모른다.

 



* 마르크 샤갈 <다프니스와 클로에>연작 중 / 윌리엄 터너 <바다의 어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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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열린책들 세계문학 2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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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를 기소하며

- 2월 18일, 기소된 베르테르의 사랑에 대한 취조 기록- 

 

이게 누구요. 사랑과 우정 사이 혹은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타이틀을 만드신 장본인이 아니십니까. 오늘도 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을 입고 참석해주셨군요. 지나치게 명시도가 뛰어난 부담스러운 차림이 아닌가 싶지만 그 당시에는 패션 리더였나보오(이런, 그러나 나는 따라하고 싶지 않은 패션이군). 그런데 당신이 어째서 기소된 지 아시오? 이런, 죄목도 말해주지 않고 모셔오다니. 우리가 실수를 범했구려. 네? 아닙니다, 그런 죄목이 아니요. 당신을 따라 죽은 이들에 대한 죄라니,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제들 멋대로 따라서 죽은걸. 사실 당신도 억울할 거 아니오. 당신이 종용한 것도 아니며 서두에 친절하게 베르테르와 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명시까지 했잖소. 아 그렇다고 그렇게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보지는 마시오. 어디까지나 베르테르 현상에 대한 당신의 곤혹만 수긍했을 뿐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니. 그렇다면 당신의 죄목이 무엇이냐고? 진정 그것을 모른단 말이오? 기만이오, 기만. 알베르트와 로테, 그리고 베르테르 당신 자신을 향한 기만.

상당히 당혹스러운 눈치인 것 같군요. 하긴 여태껏 당신의 순정을 향한 찬사와 동정의 말만 들어온 당신으로선 그렇겠구려. 이제부터 우리가 당신을 어째서 기소했는지를 말해주겠소. 아아, 물론 당신을 위한 변명(변호?)의 시간도 드릴테니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마시오. 오늘만 참고인을 비롯해 세 명을 만나느라 기다리게 한 것은 사과합니다만 어쩔 수 없었소. 경로 우대 차원으로 그분들부터 만나야했으니. 아 누구냐고요? 어디 보자, 당신 앞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부부가 있었소. 이 젊은이들은 만난 지 사흘이 채 안 돼 속전속결로 사랑을 완성했다더군요, 그래놓고 이제는 역시 원수의 집안이라느니 우리 집이 더 잘 사네, 너희 집은 품위가 없네 예쁜 건 다 화장발이었다는 둥 성질머리 급한 다혈질 남자라는 둥 허구헌날 싸우기 일쑤죠. 지상의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잘 모르는것 같네만, 그들을 보면 충동적 사랑의 대가란 그런 것인가 생각해본다오. 그 뿐인 줄 아시오 햄릿 역시 마찬가지요, 창백한 얼굴의 이 덴마크 왕자님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만 읊고 있지요. 나 참, 이미 죽은 지 몇 백년은 된 양반이 말이오. 그러니 내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오. 아, 애먼 이야기가 길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혹시 몇 년 전 <페이퍼>라는 잡지에 실렸던 황경신 에디터의 글을 읽어보셨소? 당신이 그렇게 가고 난 후, 알베르트와 로테가 얼마나 괴로웠던지 쓰여 있었소. 그들은 온갖 추문에 시달렸고 그 내용은 당신도 짐작할 수 있을테니 말하지 않으리라. 알베르트와 로테는 서로의 이마에 쓰인 주홍글씨를 읽었소. 그들은 서로를 볼 때마다 당신이 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것을 오히려 생생히 느꼈소. 그렇소,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의 한 부분처럼 말이오. 서로를 은근히 의심했고 불안해했으며 불편해했소. 당신은 그들이 행복해지길 원했을지 모르나 실상 그들은 끔찍하게 불행해진거요. 서로를 보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떠나서는 살 수도 없었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절망이자 유일한 동조자가 되었으니. 나는 충격을 받았소. 사실 나 역시 당신의 비극적인 사랑에 꽤나 감명했다오. 우리끼리의 얘기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만큼 순결하고 영원한 사랑이 어디 있겠소. 그러니 나는 당신의 찬가를 충분히 이해했소. 그런데 그 <페이퍼>에 쓰인 글을 읽고 나서 생각했소. 내가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과연 당신이 이 비극적인 사건의 최고의 불행한 자일까? 죽어버린 이들보다 살아남은 자들이 훨씬 더 끔찍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사실 당연한 것 아니오. 오랜 시간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는데 최근 읽은 심리학책에서 한 문장을 보고 깨달았소. 당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살한 것이오. 당신은 알베르트와 로테를 불행하게 했고, 자신을 기만했소. 

내가 심리학책에서 읽은 그 글귀가 무엇인지 궁금하시오? 정신과 의사이자 교수인 그가 말하길 대부분의 사람은 절망이 아니라 복수심 때문에 자살을 감행한다고 말했소. 알고 있소. 당신은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 목적으로 죽은 것은 아닐 거요. 나도 당신이 그렇게 악질이거나 바보는 아니라는 걸 믿고 싶소. 하지만 이것 보시오. 당신은 죽음이라는 완전한 종결로서 당신의 사랑에 서약서를 찍었소. 헌데 당신의 피의 대가를 보시오. 정말로 당신의 사랑의 행위에 복수심이나 음험한 마음들이 없었다고 지금도 자부할 수 있소? 로테에게는 죄책감을, 알베르트에게는 괴로움을 안긴 것은 당신이오. 당신은 자신의 사랑에 감동했고 그것을 위해 순교를 하는 것처럼 굴었소. 당신은 자기 사랑의 괴로움에 구원받았소. 그렇지않소?

때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네. 내가 이렇듯 외곬으로, 이렇듯 진심으로 간절히 그녀만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도 되는 것인지! 나는 오로지 그녀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또 오로지 그녀 말고는 가진 것도 없는데!

나는 그녀의 까만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네! 그런데 이보게, 알베르트가 스스로 바란 만큼 행복해하는 것 같지 않아서 화가 치민다네. 내가 만일......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나는 원래 말줄임표를 좋아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네. 그리고 말줄임표로도 내 뜻이 충분히 그리고 분명하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하네. 

보시오. 당신이 9월 3일과 10월 10일에 쓴 글이오. 오로지 두 부부가 '순수하게' 행복하길 원했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당신은 선량하게 순정하는 척 굴면서 내심 균열과 파멸을 기다렸소. 거짓말 마시오, 혹 그렇다 해도 이건 당신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오. 상대를 빼앗아 갖고 싶다는 마음 또한 사랑에 포함되는 게 아니겠소. 이보게, 사람들은 무심한 현재를 참아내기보다는 차라리 열심히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나간 불운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자네 말이 백번 맞네. 라는 5월 4일의 일기처럼 당신은 당신은 그녀를 원했고 그녀를 원하는 자신을 사랑했소. 알베르트의 무지와 무심함을 비웃고 로테를 우상화시켜 그녀에 대한 사랑을 미화시켰소. 알겠소? 우리의 생각은 이러하오. 당신은 그들을 위한다는, 혹은 자신의 절망감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알베르트와 로테, 그리고 당신까지 세 사람을 불행하게 했소. 사람들의 시선과 소문, 죄악감과 절망에서 그들을 구해줄 생각따윈 당신에게 없었던 거요. 당신은 순정의 이름을 욕보인 지독한 이기주의자일 뿐이오. 게다가 그 총은 그 부부의 것이 아니오. 지문과 총기주인, 게다가 동기라니. 그들은 백프로 용의자로...... 미안하오, 잠시 시대를 착각했소. 실은 와 길 그리썸 반장의 광팬이라 가끔씩 사고가 이렇게 돌아간다오.

아니 뭐요, 이제 와서 생각하니 로테가 은근히 어장관리를 했다고 생각하는거요. 허허, 그래, 실은 나 역시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았소. 사람은 호의에는 민감하지만 애정에는 둔하다고들 하는데, 당신의 태도를 보고 모를 여인이 어딨겠소.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애정은 모르는 척 본인이 편할 때만 받아들이지 않소. 그러니까 로테도 “내가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이야, 하지만 너를 잃고 싶지 않아.”라는 소리를 늘어놓는 벨라같은 여인의 -늘 게슴츠레한 눈빛을 한 <트와일라잇>시리즈의 여주인공인데, 어장관리 기술의 종결자라오- 원조였을지도 모르오. 좀 더 솔직히 말해달라고? 음, 벨라 아니 로테도 알베르트도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오. 물론 불안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총을 빌려준 것 역시 수상하기 짝이 없소. 그러나 그들 역시 충분히 벌 혹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생각하오, 게다가 그 방아쇠를 당긴 건 결국 당신 자신 아니겠소. 그러니 이렇게 어리석게 굴지 마시오. 설사 그녀가 어장관리의 원조였다 해도, 알베르트가 속으로는 당신을 심하게 질투하고 못마땅해 했다손 쳐도 그들은 당신이 사랑하고 아낀 사람이었소. 과거의 여인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건 신사가 할 짓이 아니라오.

소중한 벗이여, 솔직히 말해서 내 마음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을 때, 삶의 작은 테두리 안에서 행복하고 침착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혼란이 덜어진다네.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가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오로지 겨울이 다가온다는 생각만을 하는 사람들 말일세. 

그렇소. 당신은 이렇게 살아야했소. 작은 일에 감사하고 감탄하며. 로테의 소박함과 동생들을 챙기는 마리아와 같은 순결함에 당신이 반한 것은 이해하오. 당신은 그 때 너무 멀고 긴 요단강을 건넌 것이오. 물론 잘 알고 있소. 사랑이란 늘 급작스럽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허나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에 스스로를 바쳐 결국 타인을 사랑할 권리조차 스스로에게 주지 않은 당신에게 나는 동의할 수가 없소. 어쩌면 괴테 씨가 아직 어렸기에 그랬을지도 모르오. 어릴 때는 대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비극적인 사랑, 부조리한 괴로움 등에 매혹을 느끼며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는 하니까. 

아아, 그렇게 낙담하지 마시오. 나 역시 당신의 열정적인 사랑과 아름다운 문장, 그리고 당대에 대한 회의와 불안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한다오. 그런데 순수한 불멸의 사랑이라는 피의 서약을 건넨 당신의 사랑방식은 공감하기 어렵소. 그녀를 사랑했다면 당신은 견뎌냈어야 했다는 게 내 생각이오, 그리고 시간의 마법을 기다리고 다른 이를 사랑하려 노력했어야 하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자격과 사랑받을 권리조차 하나의 총알에 맡겨버렸소. 그래놓고 알베르트와 로테, 독자들과 당신 스스로까지 기만하며 혼자서만 피해자인척 구는 비겁함이 매우 언짢소. 사랑이란 실상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혹 이제는 당신도 동의하오?

아, 당신도 자살을 굳이 원한 건 아니라고. 하긴, 그렇군요. 그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양반에게 손해배상 청구라도 하시오. 사후 출판에 대한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는 어렵겠지만 손해배상이나 자살 방조죄는 인정될지도 모르오. 그 양반 인세로 번 돈 모두 내놓아야겠군요, 듣자하니 파우스트 박사에게도 패소했다던데. 쯧쯧. 아무튼 나는 우리가 승소할 것을 확신하오. 그러니 여전히 억울함이 남아있다면 항소 하시오. 나는 그 말밖에 해줄수가 없구려. 조심히 들어가시오, 베르테르 양반. 만나서 영광이었소.

  

 

* <열린책들> 카페와 알라딘에 동시 게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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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카카 2011-10-22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만 지금 몇 번째인지 ㅋㅋㅋ
너무 재밌어요. 결국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사랑한 것이군요. 그보다 더 지독한 짝사랑은 없긴 하죠 ㅎㅎ

Shining 2011-10-24 23:06   좋아요 0 | URL
어릴 때 읽었을 땐 비극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처럼 느껴졌는데, 머리가 굵어지고 나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_- 하게 되더군요ㅋ 전 베르테르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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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끼리 앉은 자리에서 이리저리 주제가 흘러 흘러 이런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모든 장애가 다 불운한 것이지만, 볼 수 없는 것과 걸을 수 없는 것이 가장 비극적인 일 같아.”라고 어느 친구가 말하자 다들 침묵했다.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 불운을 빗겨간 것에 대한 감사, 암묵적인 동의에 대한 침묵이었다. 어느 누구도 청각이나 목소리 등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에 시각이라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미(美)란 그토록 치명적인 것일까.

스스로의 기준에 비춰 다소 결과론적인 면에 입각해 말하자면, 미인(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미인'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포괄적인 표현이다)은 세 부류가 있다. 하나, 스스로가 미인임을 모르는 사람과 둘, 스스로가 미인임을 알고 그것을 내보이려는 사람. 셋, 스스로가 미인임을 알지만 그것을 불편해하는 사람.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미인을 대하고 있다, 고 가장 뚜렷하게 느낄까? 첫 번째는 미인이 되기에는 감수성과 예리함이 부족하다. 때문에 미인으로 태어났어도 결국 그것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는 우리가 ‘흔히 보는 예쁜’ 사람들이다. 그들은 제법 잘생긴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라고 끝까지 그렇게 살 것이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사실 세 번째가 진짜 미인이라 생각한다. 자신과 누군가의 외모를 자각할 수 있을만큼 예민하고 영민하지만, 그것을 무기라고 혹은 그저 그런 예쁨에 가두기를 두려워하거나 경멸하는 사람들. 그들은 외모가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거나, 자신의 외모를 감추거나, 무시하는 체 하며 살아간다(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가장 빼어난 외모인데도 우리는 두 번째의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결벽성에 오히려 감탄하며 그 외모를 흠모하기도 한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장황한 미인설이 아니다. 미인이란 결국 자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에 따라 타인에게 감흥을 준다는 것이다. 이목구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해야할까. 미인(美人)이란 결국 사회가 만든 아름다움의 틀이고 정형이며 보이는 것의 정점이다. 예쁘게 태어났지만 그 외모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뜯어보면 그다지 예쁜 얼굴은 아닌데 뭔가 해사한 느낌이 드는 오묘한 아우라를 내뿜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구분해낼 수 있고, 자신의 매력과 장점과 당당함을 믿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결국 미인이란, 일차적으로 태어나고 결과적으로 자라난다.   

생뚱맞게도 이렇게 미인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 책,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파우스트와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파괴력, 그 감미롭고 치명적이고 치열한 아름다움의 감옥에 대해 멍하니 생각했다. 두 번째는 이 책이 영화화 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콜린 퍼스에 벤 반스라고? 난 이 영화 반댈세 라며 혼자서 투덜거렸다. 헨리 경이 되기에 콜린 퍼스는 너무 곧고 착하고 정형화 된 이미지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꾸며내지 않은, 그러나 세련된 멋이 행동에 자연스레 배여 있고 심술궂고 제멋대로인 한편 이지적이면서도 섹시한 남자를 상상했다. 제레미 아이언스나 게리 올드만이나 랄프 파인즈 같은. 그리고 도리언은 『베네치아의 죽음』이 영화화 됐을 때처럼 중성적이면서도 백치미와 모험성을 갖춘 완전히 새로운 신인을 찾아내길 바랬다. 물론 벤 반스 역시 반듯한 미남이긴 하지만 이미 '캐스피언 왕자'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다 <토탈 이클립스>적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만큼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분명 영화가 실패할 거라 (본의 아닌)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로 읽었을 때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리언이 과연 미남이었을까? 단순히 추악함, 저열함, 미욱함만이 그를 파멸로 끌어간 것일까?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나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여자들처럼, 아름다운 다른 여자들처럼 예쁘다고 착각할 뻔했고 그렇게 믿을 뻔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그렇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나타내고 싶은 대로 나를 나타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아름답기를 원하면 아름다워질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난 내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여인을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것은 화장술도, 보석도 장신구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 스스로가 초래한 결핍감은 내가 보기엔 항상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예컨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에서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소녀가 ‘평범하게 예쁜’ 아이가 아니라 눈에 띄는 얼굴을 가졌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목구비의 수려함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객관성의 확보, 그것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 자신감 있되 자만심은 아닌, 스스로를 믿는 강함. 아마도 그런 것이 이 소녀를 아름답게 느껴지도록 만들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도리언은 어떠한가? 그는 스스로의 외모를 자만했고, 세월을 두려워했다. 그는 시간에 녹아드는 아름다움의 숙성을 자신하지 못했고, 그것을 거슬러 가려고 했다. 어쩌면 그가 받은 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못한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한 인터뷰에서 "아름다움은 상처를 준다."고 말했지만 스탕달은 『연애론』에서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고 했다. 상반되는 이 두 말이 나는 모두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의 형벌이란 실상 얼마나 황홀하고 가혹한 것이던가. 언젠가 말씀하셨죠. 슬픈 것 앞에서는 끄덕 없지만 아름다움만은, 오로지 아름다움 앞에서는 눈물이 차오른다고. 라고 도리언 그레이도 토로하지 않는가. 아름다움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때로 아름다움의 무게보다 가혹하다. 아름다움은 스스로를 무기로 한 채 과욕과 애착으로 광기를 드러내며 파멸을 내놓으라 명한다. 바로 이 청년에게 닥친 일들처럼 말이다. 이렇게『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한편 (특히 헨리 경은 메피스토펠레스를 연상시킨다) 미(美)를 담보로 한 채 저지른 부정과 추함과 자멸의 끝을 목격하게 한다. 열렬한 탐미파였던 오스카 와일드의 이러한 반추는 일견 스스로에 대한 자위(自慰)나 조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이고, 헨리 워튼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고, 바질 홀워드는 실제 나의 모습이다.' 라고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는가.  

근본적으로 이 책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유미주의자의 비참한 최후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도덕성의 결여와 외모에 대한 경외심, 한 청년의 잘못된 선택과 몰락 등으로 종결짓기에 이 텍스트 안에 들어있는 의미들이 좀 더 미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 책을 세 번째 읽으니 이제는 또 다른 것들이 눈에 띈다. 경험이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과거와 똑같은 것이 될 거라는 점 뿐이다. 라는 말 또한 과연 그러한가? 오스카 와일드는 실상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아름다움’의 진정한 의미, 혹은 스스로 빛을 발할 길을 몰랐던 도리언 그레이가 정말로 미남이었을까? 아니, 정말로 미남으로 나이들 수 있었을까? 그의 추한 본성과 인성이 얼굴에 아로새겨지며 미추(美醜)를 가늠할 수 없는 외모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혹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가 비록 미남으로 태어났지만 미남으로 늙어갔을지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이 텍스트와는 약간 다른 이유로). 나의 '미인설'에 대입하자면, 그는 어떤 이유로든 실패한 미남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의아함과 미련을 지닌 궁금증이 꼬리를 늘어트리며 끌려오는 것이 느껴지지만 나의 의문에 대해 오스카 와일드는 대답이 없다. 다만 무척이나 아름답고 명료하며 동시에 쓸쓸한 서문(김훈의 것 외에 이토록 인상적인 서문 또한 오랜만이다)으로 그가 스스로에 대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행하고 있다고 불현듯 느낄 뿐이었다. 
 

 * <열린책들>카페와 알라딘에 동시 게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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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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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좋아하는 순간 100을 주고 점점 줄어들지만 여자는 0에서 만나 점점 키워간다."는 연애학개론(?) 명제가 정말 옳다고 가정한다면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은 남자들의 연애를 다룬 사실적인 영화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이 봐야 하는 영화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본 후 남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고 하니, 김현석 감독은 <광식이 동생 광태>에 이어 남자들의 심리를 짚어내는데 일가견이 있는 듯 싶다.   

영화 <시라노>는 사랑의 지속성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혼자만의 연정에 빠졌다 상대를 획득하는 순간이 연애의 정점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끝은 창대하리라'라고 다짐 할 미미한 시작에 가깝다. 상대가 내 것이 아닐 때 우리는 상상하고 고민하고 예측하며 노력한 끝에 마침내 상대를 획득한다. 그러나 자신이 멋대로 상상한 상대방과 실제의 상대방의 간극 사이에서 당황하거나 실망하기도 하며, 이제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기에 방심하는 한편, 점점 노력이나 감정을 양보하는 걸 싫어하게 된다. 좋은 말로 해서 익숙해지고 나쁜 말로 해서 쉬워지고 객관적으로 말해 편해지는 것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시라노>는 우리가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를 기억해내게 하는 영화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지만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영화다.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하는지, 어떤 것을 비밀로 하고 어떤 것을 공개할지 말이다. 허나 희곡『시라노』는 사랑의 시작과 끝, 즉 인과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언제 끝났는지 기억해내는 사람이 있을까. 극소수의 독특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마 없을 것이라 감히 단언한다. 애초에 사랑은 '뛰어들다'나 '결심하다'등이 아닌 '빠지다'라는 동사와 함께 쓰이지 않는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는 것, 아마 그것이 사랑의 가장 큰 매력이자 단점이 아닐까. 물론 자신이 유난히 좋아하는 상대방의 특징이나 매력을 짚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허나 그 또한 이미 시작되고 난 후에 일이다. 실제로 나는 (이상형이라는 것을 크게 믿지는 않지만) '어? 내 이상형이 옷을 입고 걸어다니네.'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이상형이란 그저 본인이 기다리는 사람일 뿐 만나게 되는 사람이 아닐 수 있음을 배우는 동시에 스스로도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나는 내 마음을 책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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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들었는데 권태기의 부부가 서로가 미워질 때는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인 것조차 거슬린다고 한다. 말한 사람은 꽤 심각하게 얘기했던 것 같은데 방송을 듣는 나는 혼자 폭소하고 말았다.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이것이 진실이 아닌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어디까지나 예로서) 그 사람의 얇고 가는 눈, 하얀 피부, 호리호리한 체구나 유난히 까만 머리 등이 모두 예뻐 보이기 마련이다. 아 어쩜 저렇게 내 맘에 쏙 들 수가 있지 깜짝 놀랄 정도로. 마치 누군가가 날 위해 만들어 보내 준 완성품인 것 같이 느껴져 어쩐지 흐뭇하고 감동스러운 법이다. 허나 균열이 생길 때는 똑같은 점들이 모두 거슬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예로서) 얇고 가느다란 눈이라 인상이 선하지 않아, 맥없이 하얀 피부라니, 왜 이렇게 볼품없이 마른거야 등등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자우림의 노래 <애인발견>을 떠올려보자) 그러다 라디오에 나온 사람처럼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인 것도 미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친구 한 명은 헤어진 연인을 얼마 전에 만났는데 굉장히 놀랐다고 말했다. 반짝거리게 느껴졌던 아우라도, 총명한 눈동자도 모두 사라졌다고. 자신은 너무도 담담했으며 내가 이 사람의 어떤 면을 좋아했지 라며 스스로를 의심했다고 말했다. 감정의 장난이란 이토록 짧고도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이 모든 것을 소멸하거나 아름답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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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면 일상이 촘촘하게 채워진다. 함께 가보기 위해 찾아봐야 할 것도 많고,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도, 알아봐야 할 것도 많아진다. 상대방에 대한 긍지를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에 어울리는 자신이 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세상이 밝은 곳이라고 믿을 수 있던 소망과 자신 안에 존재하는 맑은 에너지에 놀라기도 한다. 이렇듯 사랑에 빠진 이들은 음악과 감각과 힘을 필요로 하지만 반대로 언어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어도 자기 자신을 위한 언어는 무의미하다. 그들은 상대를 위해서만 단어를 욕망하며 바라보고 적어 내려간다. 리포트를 쓸 때, 서술 시험을 볼 때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나오지 않았던 필력이 날개를 달고 파닥거린다. 내게 이런 글재주가 있었던가, 정녕 이 글을 내가 쓴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언어를 만들어낸 스스로에게 감동하고, 그 안의 담긴 자신의 마음에 또 한 번 반한다. 그렇게 사랑은 커져간다. 상대방과 내 마음, 두 가지가 만들어낸 화학작용이 일궈낸 사랑의 소네트. 그러므로 사랑에 빠지면 모두가 시인이 된다는 누군가의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 연애의 힘이란 실로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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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좋아하기 때문에 매력으로 느껴지는가, 매력이기 때문에 좋아하는가. 예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예쁜 것인가. 언어의 위대함 앞에 감정이 탄복하는가, 아니면 감정이 언어를 감동시키는가(실상 사랑의 밀어들도 사랑이 깨지고 난 후에는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은가). 

록산은 시라노의 아름다운 언어를 말하는 잘생긴 크리스티앙을 사랑했는가, 잘생긴 크리스티앙이 말하는 시라노의 아름다운 언어를 사랑했는가. 그녀를 움직인 것은 열정에 빠진 눈과 부드러운 입술인가, 그 눈과 입술이 말하는 마음인가. 록산이 사랑하는 것은 아낌없는 언사를 던지는 크리스티앙인가, 달콤한 언사를 듣는 자기 자신인가. 

록산        당신을 사랑해요, 죽지 말아요! 

시라노     아니오! 옛이야기에 이르기를,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왕자에게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그 햇살 같은 말에  그의 추함이 녹아 버리는 걸 느낀다고 했소. 하지만 당신은 내가 영원히 한결같다는 걸 알게 될 거요 

록산        내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었어요! 내가! 내가! 

시라노     당신이? 천만에! 난 여성의 부드러움을 모르고 자랐소. 내 어머니는 날 예뻐하지 않았고, 나에겐 누이가 없었소. 커서는 비웃는 눈길을 가진 여자들이 두려웠소. 적어도 내가 여자친구를 가진 건 당신 덕이었소. 당신 덕분에 여자 드레스가 내 삶 속을 지나갔소.

르 브레    (가지들 사이에 내려오는 환한 보름달을 가리키며) 저기, 또 한 명의 여자 친구가 자네를 보러 내려오는군.

시라노     (달을 보고 웃으며) 그렇군.

록산        난 단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를 두 번씩이나 잃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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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당신 덕분에 여자 드레스가 내 삶 속을 지나갔소.'라고 말한다. 록산이 내가 사랑한 건 당신이었다고 깨닫고 고해하는 순간조차 언어라는 자신의 매력을 내려놓길 거부한다. 그는 대단한 유미주의자인가, 아니면 그녀의 말조차 쉽게 믿을 수 없는 극도의 패배주의자인가. 그녀가 그토록 아름답지 않아도 시라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시라노가 사랑하는 것은 크리스티앙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지는 록산인가, 자신의 언어로 깊어가는 그녀의 사랑인가.

록산은 크리스티앙의 언어로 이야기하자 그를 차갑게 대하다 시라노의 입을 빌리자 마침내 결혼을 승낙한다. 크리스티앙 역시 그녀의 사랑이 시라노의 언어 덕분이라고 확신한다. 게다가 록산 역시 자신을 기만한 시라노에게 당혹감을 느끼기는커녕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이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정말 록산의 사랑은 언어로 리본을 두른 감정을 향한 것이었을까. 글쎄, 마음의 행방은 길이 없고 확신이 없기에 여전히 의문스럽다.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이라고 어느 책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아마 카마다 토시오의『29세의 크리스마스』였던 것 같다). 사랑의 시작과 끝, 혹은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일종의 인과관계를 누가 밝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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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문. 시작했기 때문에 끝이 나는가, 끝이 나기 때문에 시작하는가.

 

  

 

* <열린책들>카페에서 진행 된 '1월 테마 - 끝나지 않은 이야기' 리뷰대회 때 제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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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4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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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미치너와 그의 책 『소설』에 바치는 오마주 

 

 

일종의 경고이자 증언으로 시작하자면, 이 책은 절대로 대중소설이 아니다. 아마 편집자와 출판사가 고민깨나 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실험적이고 파격적이다. 작가는 자신의 다른 책,『작가는 왜 쓰는가』에서 “소설의 처음 몇 장을 아주 어렵게 만들라. 그렇게 해 일부 독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하라(내가 쓴 소설을 읽으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며 실제로 자신의 신념을 실행했다. 그리고 원하던 결과를 얻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될 만큼 많은 이들이 이 책의 ‘작가’ 부분을 읽다가 하차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소설』은 꽤나 길고, 다분히 지루하거나 어렵게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게다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정통적인 담론을 말하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엘리트적인 글이다. 대신 그만큼 이 책을 호의적으로 바라볼 독자층을 비교적 명확하게 예상할 수 있다. 아마 이 책을 공감하거나 감탄하며 즐겁게 읽는 사람들은 문학에 적(籍)을 둔(과거에 그랬거나 여전히 미련을 갖는) 사람이거나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일게다. 문학, 소설, 글 때문에 인생을 어렵거나 무겁다고 느낀 적이 있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목숨을 바치고 싶다고 한 번이라고 생각한 적 있는 사람들만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책은 아프고 동경하는 어떤 부분을 자극하도록 느낄 것이다. 그러니 탐욕적이고 유미적인, 호기심 충만한 독서가들에게는 필히 추천하고 싶다.

어떤 때는 글 쓰는 일이 마치 무슨 지고한 영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 웃기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정말 글쓰기란 고된 노동인 것이다.

이 문단을 읽고 나는 난데없이 킬킬거리고 말았다. 아아, 정말 그러했다. 좀 더 어릴 적에는 작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약간 괴짜이거나 괴팍할 것 같았고 시큰둥한 표정과 무뚝뚝한 말투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자기 글에 놀랄만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편집자나 평론가를 무조건 싫어하고, 실상 독자에게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오만함이나 이상한 행동이나 게으름을 일삼다가 어느 순간 방에 틀어박혀 펜을 휘두르면 완성된 글이 쑤욱 탈고될 것 같은 그런 모습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글자를 마법처럼 퐁퐁 솟아내게 하는, 마치 판타지아(월트 디즈니의 만화)같은 장면을 상상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모두 내게 경외심을 일으키는 존재였고, 날 때부터 나와는 너무 다르고 먼 사람들 같았다. 모든 작가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고, 재능외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없다고 믿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지금은 이것이 그저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작가들은 축복받기보다는 실상 지독한 저주에 걸린 사람들과 비슷하며, 때로는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써야만 하기에’ 쓰기도 한다는 것을. 뮤즈는 태반의 작가들에게 고결함이나 재능이 아닌 노동과 노력, 좌절을 요구한다. 작가들이 단어 하나하나에 머리를 싸매고 절망는 모습, 어깨와 손의 통증을 호소하는 모습, 마감을 앞두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때로는 낄낄거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글쓰기란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네루다의 시구처럼, 차라리 애증의 행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글쓰기란 실상 추하고도 아름다운 것, 영롱하고 무시무시한 것, 다른 어떤 일보다도 체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생각들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을 읽으며 더욱이 확고해질 수 밖에 없다. 일종의 메타픽션인 이 책은 한 권의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그러니까 작가-편집자-평론가-독자에까지 닿는 화학작용에 대해 다루고 있다. 즉 작가의 열정과 고뇌, 편집자의 날카로운 눈과 감각, 평론가의 열등감과 환희, 독자의 카타르시스를 한 권에 담고 있는 셈인데 상당히 흥미롭고 독특한 소재는 물론 방식을 택하고 있다. 네 개의 챕터, 혹은 인물들은 각각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있고 자신을 변호하고 설명하는 동시에 서로를 묘사한다. 미치너는 각각의 인물의 고통과 딜레마와 기쁨을 마치 빙의라도 된 듯이 풀어내는 데 그 내용이 참으로 재밌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편집자’와 ‘평론가’ 부분을 빠져들어서 읽었는데 정말로 그들은 이런 고민을 할 것만 같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모든 원고들이 다 책으로 꾸며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중견 편집자의 관심 범위 안에 드는 원고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보수도 많이 받는 전문 편집자들이 가망 없는 원고들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뺏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균적으로 따지면 대체로 각 출판사마다 <채광창 넘어> 들어온 9백 편의 원고 중 단 한 편만이 책으로 발간되는 것이 일반적인 통계였다. 그러나 여러 출판사에서 퇴짜맞은 원고들이라 해서 베스트셀러가 되지 말라는 법은 물론 없었다. 또 사실 그런 경우가 많았다.

마멜스타인은 훌룡한 편집자로서 세 가지 자질을 가진 여자야. 첫째는, 독자들이 읽고 싶어 하는 멋진 소설을 찾아내는 능력. 둘째는, 시류에 적합한 주제들을 찾아내고 또 그것을 논픽션 책으로 엮어 낼 적절한 작가를 발굴하는 능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15년이 지나고 읽고 싶어 하는 그런 책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지. 

앞서 말한 ‘작가에 대한 환상’에는 모든 글이 그들 머릿속에서 나온다고 믿었던 것도 포함되어 있다. 오탈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글의 완성은 작가에게 달려있다고, 평론은 진정한 창작이지만 창작물이 없다면 평론가라는 직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타인의 창작을 비판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오랫동안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귀중함을 정말 모르고 살았다. 예를 들면 기자, 편집자, 번역자, 전기 작가, 평론가 등과 같은 경우인데 정말 오랫동안 이야기는 순수하게 작가 개인의 것이라고만 믿어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닿아오면 그것은 독자의 것으로 변형된다고. 하지만 실상 그들이 없다면 어떨까. 제대로 번역된 -원서의 느낌을 살린- 글을 읽을 수나 있었을까. 실력 있는 신인작가는 누가 발굴하는가. 써주는 이가 없다면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한들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전문적인 평론이 없다면 작가들은 무엇을 위해 글을 쓸까. 

이 책에 묘사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다보면 결국 모두 똑같이 어렵고 힘들고 그러나 보람 있는 일이구나 생각 하고 만다. 소설이란 결국 쓰는 자, 내는 자, 평가하는 자, 읽는 자 중 하나라도 없으면 제대로 작용할 수 없는 지극히 유기적인 행위체가 아니던가. 그들은 소설을 어떤 폭발적인 것, 즉 경이로움과 장엄한 계시적 광경으로 가득 차 있고, 평범한 행위에 대한 시적인 해석과 기묘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산문적 설명으로 꽉 들어차 있는 것으로 보았다. 라는 책 속의 문장은 사실이다. 결국 소설의 의미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탐하게 된다. 작가, 편집자, 평론가, 독자 중 누구라 하더라도. 

제임스 미치너는 -소위 말하는- 천재 작가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는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했고 마흔이 다 되어서 등단했으며 이 책만 해도 향년 84세에 써진 글이다(그 연세에 이렇게 방대하고 집요한 글을 쓰다니, 대단한 할아버지 아닌가!). 물론 퓰리처상도 받고 세계적 베스트셀러도 써냈지만 그는 전반적으로 상당히 늦된 편이다. 허나 단순히 그가 노장이기에 이런 책을 써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주제에 대한 하나의 담론만으로 이렇게 방대하고도 원론적인 이야기를 정력적으로 펼쳐갈 수 있는 단단함은 노장들에게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제임스 미치너는 분명 작가를 존중하고, 글 쓰는 행위를 사랑하며, 창작론을 가르치는 것을 즐기며, 소설이라는 장르를 존경하는 것이 분명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을 사랑하는 자신, 이 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내 자신에게 불쑥 고마워진다. 그러니 이 글은 이런 나의 마음으로 접어 만든 한 송이의 장미다. 그리고 나는 이 장미를 제임스 미치너와 이 책 『소설』에 바치고 싶다.

 
 

 


 
* <열린책들>까페에서 진행 된 '12월 테마 - 오마주' 리뷰대회에 제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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