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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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끼리 앉은 자리에서 이리저리 주제가 흘러 흘러 이런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모든 장애가 다 불운한 것이지만, 볼 수 없는 것과 걸을 수 없는 것이 가장 비극적인 일 같아.”라고 어느 친구가 말하자 다들 침묵했다.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 불운을 빗겨간 것에 대한 감사, 암묵적인 동의에 대한 침묵이었다. 어느 누구도 청각이나 목소리 등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에 시각이라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미(美)란 그토록 치명적인 것일까.

스스로의 기준에 비춰 다소 결과론적인 면에 입각해 말하자면, 미인(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미인'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포괄적인 표현이다)은 세 부류가 있다. 하나, 스스로가 미인임을 모르는 사람과 둘, 스스로가 미인임을 알고 그것을 내보이려는 사람. 셋, 스스로가 미인임을 알지만 그것을 불편해하는 사람.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미인을 대하고 있다, 고 가장 뚜렷하게 느낄까? 첫 번째는 미인이 되기에는 감수성과 예리함이 부족하다. 때문에 미인으로 태어났어도 결국 그것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는 우리가 ‘흔히 보는 예쁜’ 사람들이다. 그들은 제법 잘생긴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라고 끝까지 그렇게 살 것이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사실 세 번째가 진짜 미인이라 생각한다. 자신과 누군가의 외모를 자각할 수 있을만큼 예민하고 영민하지만, 그것을 무기라고 혹은 그저 그런 예쁨에 가두기를 두려워하거나 경멸하는 사람들. 그들은 외모가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거나, 자신의 외모를 감추거나, 무시하는 체 하며 살아간다(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가장 빼어난 외모인데도 우리는 두 번째의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결벽성에 오히려 감탄하며 그 외모를 흠모하기도 한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장황한 미인설이 아니다. 미인이란 결국 자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에 따라 타인에게 감흥을 준다는 것이다. 이목구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해야할까. 미인(美人)이란 결국 사회가 만든 아름다움의 틀이고 정형이며 보이는 것의 정점이다. 예쁘게 태어났지만 그 외모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뜯어보면 그다지 예쁜 얼굴은 아닌데 뭔가 해사한 느낌이 드는 오묘한 아우라를 내뿜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구분해낼 수 있고, 자신의 매력과 장점과 당당함을 믿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결국 미인이란, 일차적으로 태어나고 결과적으로 자라난다.   

생뚱맞게도 이렇게 미인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 책,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파우스트와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파괴력, 그 감미롭고 치명적이고 치열한 아름다움의 감옥에 대해 멍하니 생각했다. 두 번째는 이 책이 영화화 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콜린 퍼스에 벤 반스라고? 난 이 영화 반댈세 라며 혼자서 투덜거렸다. 헨리 경이 되기에 콜린 퍼스는 너무 곧고 착하고 정형화 된 이미지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꾸며내지 않은, 그러나 세련된 멋이 행동에 자연스레 배여 있고 심술궂고 제멋대로인 한편 이지적이면서도 섹시한 남자를 상상했다. 제레미 아이언스나 게리 올드만이나 랄프 파인즈 같은. 그리고 도리언은 『베네치아의 죽음』이 영화화 됐을 때처럼 중성적이면서도 백치미와 모험성을 갖춘 완전히 새로운 신인을 찾아내길 바랬다. 물론 벤 반스 역시 반듯한 미남이긴 하지만 이미 '캐스피언 왕자'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다 <토탈 이클립스>적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만큼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분명 영화가 실패할 거라 (본의 아닌)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로 읽었을 때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리언이 과연 미남이었을까? 단순히 추악함, 저열함, 미욱함만이 그를 파멸로 끌어간 것일까?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나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여자들처럼, 아름다운 다른 여자들처럼 예쁘다고 착각할 뻔했고 그렇게 믿을 뻔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그렇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나타내고 싶은 대로 나를 나타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아름답기를 원하면 아름다워질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난 내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여인을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것은 화장술도, 보석도 장신구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 스스로가 초래한 결핍감은 내가 보기엔 항상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예컨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에서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소녀가 ‘평범하게 예쁜’ 아이가 아니라 눈에 띄는 얼굴을 가졌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목구비의 수려함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객관성의 확보, 그것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 자신감 있되 자만심은 아닌, 스스로를 믿는 강함. 아마도 그런 것이 이 소녀를 아름답게 느껴지도록 만들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도리언은 어떠한가? 그는 스스로의 외모를 자만했고, 세월을 두려워했다. 그는 시간에 녹아드는 아름다움의 숙성을 자신하지 못했고, 그것을 거슬러 가려고 했다. 어쩌면 그가 받은 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못한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한 인터뷰에서 "아름다움은 상처를 준다."고 말했지만 스탕달은 『연애론』에서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고 했다. 상반되는 이 두 말이 나는 모두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의 형벌이란 실상 얼마나 황홀하고 가혹한 것이던가. 언젠가 말씀하셨죠. 슬픈 것 앞에서는 끄덕 없지만 아름다움만은, 오로지 아름다움 앞에서는 눈물이 차오른다고. 라고 도리언 그레이도 토로하지 않는가. 아름다움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때로 아름다움의 무게보다 가혹하다. 아름다움은 스스로를 무기로 한 채 과욕과 애착으로 광기를 드러내며 파멸을 내놓으라 명한다. 바로 이 청년에게 닥친 일들처럼 말이다. 이렇게『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한편 (특히 헨리 경은 메피스토펠레스를 연상시킨다) 미(美)를 담보로 한 채 저지른 부정과 추함과 자멸의 끝을 목격하게 한다. 열렬한 탐미파였던 오스카 와일드의 이러한 반추는 일견 스스로에 대한 자위(自慰)나 조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이고, 헨리 워튼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고, 바질 홀워드는 실제 나의 모습이다.' 라고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는가.  

근본적으로 이 책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유미주의자의 비참한 최후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도덕성의 결여와 외모에 대한 경외심, 한 청년의 잘못된 선택과 몰락 등으로 종결짓기에 이 텍스트 안에 들어있는 의미들이 좀 더 미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 책을 세 번째 읽으니 이제는 또 다른 것들이 눈에 띈다. 경험이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과거와 똑같은 것이 될 거라는 점 뿐이다. 라는 말 또한 과연 그러한가? 오스카 와일드는 실상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아름다움’의 진정한 의미, 혹은 스스로 빛을 발할 길을 몰랐던 도리언 그레이가 정말로 미남이었을까? 아니, 정말로 미남으로 나이들 수 있었을까? 그의 추한 본성과 인성이 얼굴에 아로새겨지며 미추(美醜)를 가늠할 수 없는 외모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혹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가 비록 미남으로 태어났지만 미남으로 늙어갔을지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이 텍스트와는 약간 다른 이유로). 나의 '미인설'에 대입하자면, 그는 어떤 이유로든 실패한 미남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의아함과 미련을 지닌 궁금증이 꼬리를 늘어트리며 끌려오는 것이 느껴지지만 나의 의문에 대해 오스카 와일드는 대답이 없다. 다만 무척이나 아름답고 명료하며 동시에 쓸쓸한 서문(김훈의 것 외에 이토록 인상적인 서문 또한 오랜만이다)으로 그가 스스로에 대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행하고 있다고 불현듯 느낄 뿐이었다. 
 

 * <열린책들>카페와 알라딘에 동시 게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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