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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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좋아하는 순간 100을 주고 점점 줄어들지만 여자는 0에서 만나 점점 키워간다."는 연애학개론(?) 명제가 정말 옳다고 가정한다면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은 남자들의 연애를 다룬 사실적인 영화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이 봐야 하는 영화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본 후 남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고 하니, 김현석 감독은 <광식이 동생 광태>에 이어 남자들의 심리를 짚어내는데 일가견이 있는 듯 싶다.   

영화 <시라노>는 사랑의 지속성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혼자만의 연정에 빠졌다 상대를 획득하는 순간이 연애의 정점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끝은 창대하리라'라고 다짐 할 미미한 시작에 가깝다. 상대가 내 것이 아닐 때 우리는 상상하고 고민하고 예측하며 노력한 끝에 마침내 상대를 획득한다. 그러나 자신이 멋대로 상상한 상대방과 실제의 상대방의 간극 사이에서 당황하거나 실망하기도 하며, 이제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기에 방심하는 한편, 점점 노력이나 감정을 양보하는 걸 싫어하게 된다. 좋은 말로 해서 익숙해지고 나쁜 말로 해서 쉬워지고 객관적으로 말해 편해지는 것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시라노>는 우리가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를 기억해내게 하는 영화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지만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영화다.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하는지, 어떤 것을 비밀로 하고 어떤 것을 공개할지 말이다. 허나 희곡『시라노』는 사랑의 시작과 끝, 즉 인과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언제 끝났는지 기억해내는 사람이 있을까. 극소수의 독특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마 없을 것이라 감히 단언한다. 애초에 사랑은 '뛰어들다'나 '결심하다'등이 아닌 '빠지다'라는 동사와 함께 쓰이지 않는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는 것, 아마 그것이 사랑의 가장 큰 매력이자 단점이 아닐까. 물론 자신이 유난히 좋아하는 상대방의 특징이나 매력을 짚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허나 그 또한 이미 시작되고 난 후에 일이다. 실제로 나는 (이상형이라는 것을 크게 믿지는 않지만) '어? 내 이상형이 옷을 입고 걸어다니네.'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이상형이란 그저 본인이 기다리는 사람일 뿐 만나게 되는 사람이 아닐 수 있음을 배우는 동시에 스스로도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나는 내 마음을 책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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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들었는데 권태기의 부부가 서로가 미워질 때는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인 것조차 거슬린다고 한다. 말한 사람은 꽤 심각하게 얘기했던 것 같은데 방송을 듣는 나는 혼자 폭소하고 말았다.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이것이 진실이 아닌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어디까지나 예로서) 그 사람의 얇고 가는 눈, 하얀 피부, 호리호리한 체구나 유난히 까만 머리 등이 모두 예뻐 보이기 마련이다. 아 어쩜 저렇게 내 맘에 쏙 들 수가 있지 깜짝 놀랄 정도로. 마치 누군가가 날 위해 만들어 보내 준 완성품인 것 같이 느껴져 어쩐지 흐뭇하고 감동스러운 법이다. 허나 균열이 생길 때는 똑같은 점들이 모두 거슬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예로서) 얇고 가느다란 눈이라 인상이 선하지 않아, 맥없이 하얀 피부라니, 왜 이렇게 볼품없이 마른거야 등등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자우림의 노래 <애인발견>을 떠올려보자) 그러다 라디오에 나온 사람처럼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인 것도 미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친구 한 명은 헤어진 연인을 얼마 전에 만났는데 굉장히 놀랐다고 말했다. 반짝거리게 느껴졌던 아우라도, 총명한 눈동자도 모두 사라졌다고. 자신은 너무도 담담했으며 내가 이 사람의 어떤 면을 좋아했지 라며 스스로를 의심했다고 말했다. 감정의 장난이란 이토록 짧고도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이 모든 것을 소멸하거나 아름답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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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면 일상이 촘촘하게 채워진다. 함께 가보기 위해 찾아봐야 할 것도 많고,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도, 알아봐야 할 것도 많아진다. 상대방에 대한 긍지를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에 어울리는 자신이 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세상이 밝은 곳이라고 믿을 수 있던 소망과 자신 안에 존재하는 맑은 에너지에 놀라기도 한다. 이렇듯 사랑에 빠진 이들은 음악과 감각과 힘을 필요로 하지만 반대로 언어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어도 자기 자신을 위한 언어는 무의미하다. 그들은 상대를 위해서만 단어를 욕망하며 바라보고 적어 내려간다. 리포트를 쓸 때, 서술 시험을 볼 때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나오지 않았던 필력이 날개를 달고 파닥거린다. 내게 이런 글재주가 있었던가, 정녕 이 글을 내가 쓴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언어를 만들어낸 스스로에게 감동하고, 그 안의 담긴 자신의 마음에 또 한 번 반한다. 그렇게 사랑은 커져간다. 상대방과 내 마음, 두 가지가 만들어낸 화학작용이 일궈낸 사랑의 소네트. 그러므로 사랑에 빠지면 모두가 시인이 된다는 누군가의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 연애의 힘이란 실로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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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좋아하기 때문에 매력으로 느껴지는가, 매력이기 때문에 좋아하는가. 예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예쁜 것인가. 언어의 위대함 앞에 감정이 탄복하는가, 아니면 감정이 언어를 감동시키는가(실상 사랑의 밀어들도 사랑이 깨지고 난 후에는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은가). 

록산은 시라노의 아름다운 언어를 말하는 잘생긴 크리스티앙을 사랑했는가, 잘생긴 크리스티앙이 말하는 시라노의 아름다운 언어를 사랑했는가. 그녀를 움직인 것은 열정에 빠진 눈과 부드러운 입술인가, 그 눈과 입술이 말하는 마음인가. 록산이 사랑하는 것은 아낌없는 언사를 던지는 크리스티앙인가, 달콤한 언사를 듣는 자기 자신인가. 

록산        당신을 사랑해요, 죽지 말아요! 

시라노     아니오! 옛이야기에 이르기를,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왕자에게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그 햇살 같은 말에  그의 추함이 녹아 버리는 걸 느낀다고 했소. 하지만 당신은 내가 영원히 한결같다는 걸 알게 될 거요 

록산        내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었어요! 내가! 내가! 

시라노     당신이? 천만에! 난 여성의 부드러움을 모르고 자랐소. 내 어머니는 날 예뻐하지 않았고, 나에겐 누이가 없었소. 커서는 비웃는 눈길을 가진 여자들이 두려웠소. 적어도 내가 여자친구를 가진 건 당신 덕이었소. 당신 덕분에 여자 드레스가 내 삶 속을 지나갔소.

르 브레    (가지들 사이에 내려오는 환한 보름달을 가리키며) 저기, 또 한 명의 여자 친구가 자네를 보러 내려오는군.

시라노     (달을 보고 웃으며) 그렇군.

록산        난 단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를 두 번씩이나 잃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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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당신 덕분에 여자 드레스가 내 삶 속을 지나갔소.'라고 말한다. 록산이 내가 사랑한 건 당신이었다고 깨닫고 고해하는 순간조차 언어라는 자신의 매력을 내려놓길 거부한다. 그는 대단한 유미주의자인가, 아니면 그녀의 말조차 쉽게 믿을 수 없는 극도의 패배주의자인가. 그녀가 그토록 아름답지 않아도 시라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시라노가 사랑하는 것은 크리스티앙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지는 록산인가, 자신의 언어로 깊어가는 그녀의 사랑인가.

록산은 크리스티앙의 언어로 이야기하자 그를 차갑게 대하다 시라노의 입을 빌리자 마침내 결혼을 승낙한다. 크리스티앙 역시 그녀의 사랑이 시라노의 언어 덕분이라고 확신한다. 게다가 록산 역시 자신을 기만한 시라노에게 당혹감을 느끼기는커녕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이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정말 록산의 사랑은 언어로 리본을 두른 감정을 향한 것이었을까. 글쎄, 마음의 행방은 길이 없고 확신이 없기에 여전히 의문스럽다.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이라고 어느 책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아마 카마다 토시오의『29세의 크리스마스』였던 것 같다). 사랑의 시작과 끝, 혹은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일종의 인과관계를 누가 밝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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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문. 시작했기 때문에 끝이 나는가, 끝이 나기 때문에 시작하는가.

 

  

 

* <열린책들>카페에서 진행 된 '1월 테마 - 끝나지 않은 이야기' 리뷰대회 때 제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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