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열린책들 세계문학 2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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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를 기소하며

- 2월 18일, 기소된 베르테르의 사랑에 대한 취조 기록- 

 

이게 누구요. 사랑과 우정 사이 혹은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타이틀을 만드신 장본인이 아니십니까. 오늘도 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을 입고 참석해주셨군요. 지나치게 명시도가 뛰어난 부담스러운 차림이 아닌가 싶지만 그 당시에는 패션 리더였나보오(이런, 그러나 나는 따라하고 싶지 않은 패션이군). 그런데 당신이 어째서 기소된 지 아시오? 이런, 죄목도 말해주지 않고 모셔오다니. 우리가 실수를 범했구려. 네? 아닙니다, 그런 죄목이 아니요. 당신을 따라 죽은 이들에 대한 죄라니,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제들 멋대로 따라서 죽은걸. 사실 당신도 억울할 거 아니오. 당신이 종용한 것도 아니며 서두에 친절하게 베르테르와 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명시까지 했잖소. 아 그렇다고 그렇게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보지는 마시오. 어디까지나 베르테르 현상에 대한 당신의 곤혹만 수긍했을 뿐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니. 그렇다면 당신의 죄목이 무엇이냐고? 진정 그것을 모른단 말이오? 기만이오, 기만. 알베르트와 로테, 그리고 베르테르 당신 자신을 향한 기만.

상당히 당혹스러운 눈치인 것 같군요. 하긴 여태껏 당신의 순정을 향한 찬사와 동정의 말만 들어온 당신으로선 그렇겠구려. 이제부터 우리가 당신을 어째서 기소했는지를 말해주겠소. 아아, 물론 당신을 위한 변명(변호?)의 시간도 드릴테니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마시오. 오늘만 참고인을 비롯해 세 명을 만나느라 기다리게 한 것은 사과합니다만 어쩔 수 없었소. 경로 우대 차원으로 그분들부터 만나야했으니. 아 누구냐고요? 어디 보자, 당신 앞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부부가 있었소. 이 젊은이들은 만난 지 사흘이 채 안 돼 속전속결로 사랑을 완성했다더군요, 그래놓고 이제는 역시 원수의 집안이라느니 우리 집이 더 잘 사네, 너희 집은 품위가 없네 예쁜 건 다 화장발이었다는 둥 성질머리 급한 다혈질 남자라는 둥 허구헌날 싸우기 일쑤죠. 지상의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잘 모르는것 같네만, 그들을 보면 충동적 사랑의 대가란 그런 것인가 생각해본다오. 그 뿐인 줄 아시오 햄릿 역시 마찬가지요, 창백한 얼굴의 이 덴마크 왕자님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만 읊고 있지요. 나 참, 이미 죽은 지 몇 백년은 된 양반이 말이오. 그러니 내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오. 아, 애먼 이야기가 길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혹시 몇 년 전 <페이퍼>라는 잡지에 실렸던 황경신 에디터의 글을 읽어보셨소? 당신이 그렇게 가고 난 후, 알베르트와 로테가 얼마나 괴로웠던지 쓰여 있었소. 그들은 온갖 추문에 시달렸고 그 내용은 당신도 짐작할 수 있을테니 말하지 않으리라. 알베르트와 로테는 서로의 이마에 쓰인 주홍글씨를 읽었소. 그들은 서로를 볼 때마다 당신이 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것을 오히려 생생히 느꼈소. 그렇소,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의 한 부분처럼 말이오. 서로를 은근히 의심했고 불안해했으며 불편해했소. 당신은 그들이 행복해지길 원했을지 모르나 실상 그들은 끔찍하게 불행해진거요. 서로를 보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떠나서는 살 수도 없었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절망이자 유일한 동조자가 되었으니. 나는 충격을 받았소. 사실 나 역시 당신의 비극적인 사랑에 꽤나 감명했다오. 우리끼리의 얘기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만큼 순결하고 영원한 사랑이 어디 있겠소. 그러니 나는 당신의 찬가를 충분히 이해했소. 그런데 그 <페이퍼>에 쓰인 글을 읽고 나서 생각했소. 내가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과연 당신이 이 비극적인 사건의 최고의 불행한 자일까? 죽어버린 이들보다 살아남은 자들이 훨씬 더 끔찍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사실 당연한 것 아니오. 오랜 시간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는데 최근 읽은 심리학책에서 한 문장을 보고 깨달았소. 당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살한 것이오. 당신은 알베르트와 로테를 불행하게 했고, 자신을 기만했소. 

내가 심리학책에서 읽은 그 글귀가 무엇인지 궁금하시오? 정신과 의사이자 교수인 그가 말하길 대부분의 사람은 절망이 아니라 복수심 때문에 자살을 감행한다고 말했소. 알고 있소. 당신은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 목적으로 죽은 것은 아닐 거요. 나도 당신이 그렇게 악질이거나 바보는 아니라는 걸 믿고 싶소. 하지만 이것 보시오. 당신은 죽음이라는 완전한 종결로서 당신의 사랑에 서약서를 찍었소. 헌데 당신의 피의 대가를 보시오. 정말로 당신의 사랑의 행위에 복수심이나 음험한 마음들이 없었다고 지금도 자부할 수 있소? 로테에게는 죄책감을, 알베르트에게는 괴로움을 안긴 것은 당신이오. 당신은 자신의 사랑에 감동했고 그것을 위해 순교를 하는 것처럼 굴었소. 당신은 자기 사랑의 괴로움에 구원받았소. 그렇지않소?

때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네. 내가 이렇듯 외곬으로, 이렇듯 진심으로 간절히 그녀만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도 되는 것인지! 나는 오로지 그녀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또 오로지 그녀 말고는 가진 것도 없는데!

나는 그녀의 까만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네! 그런데 이보게, 알베르트가 스스로 바란 만큼 행복해하는 것 같지 않아서 화가 치민다네. 내가 만일......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나는 원래 말줄임표를 좋아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네. 그리고 말줄임표로도 내 뜻이 충분히 그리고 분명하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하네. 

보시오. 당신이 9월 3일과 10월 10일에 쓴 글이오. 오로지 두 부부가 '순수하게' 행복하길 원했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당신은 선량하게 순정하는 척 굴면서 내심 균열과 파멸을 기다렸소. 거짓말 마시오, 혹 그렇다 해도 이건 당신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오. 상대를 빼앗아 갖고 싶다는 마음 또한 사랑에 포함되는 게 아니겠소. 이보게, 사람들은 무심한 현재를 참아내기보다는 차라리 열심히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나간 불운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자네 말이 백번 맞네. 라는 5월 4일의 일기처럼 당신은 당신은 그녀를 원했고 그녀를 원하는 자신을 사랑했소. 알베르트의 무지와 무심함을 비웃고 로테를 우상화시켜 그녀에 대한 사랑을 미화시켰소. 알겠소? 우리의 생각은 이러하오. 당신은 그들을 위한다는, 혹은 자신의 절망감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알베르트와 로테, 그리고 당신까지 세 사람을 불행하게 했소. 사람들의 시선과 소문, 죄악감과 절망에서 그들을 구해줄 생각따윈 당신에게 없었던 거요. 당신은 순정의 이름을 욕보인 지독한 이기주의자일 뿐이오. 게다가 그 총은 그 부부의 것이 아니오. 지문과 총기주인, 게다가 동기라니. 그들은 백프로 용의자로...... 미안하오, 잠시 시대를 착각했소. 실은 와 길 그리썸 반장의 광팬이라 가끔씩 사고가 이렇게 돌아간다오.

아니 뭐요, 이제 와서 생각하니 로테가 은근히 어장관리를 했다고 생각하는거요. 허허, 그래, 실은 나 역시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았소. 사람은 호의에는 민감하지만 애정에는 둔하다고들 하는데, 당신의 태도를 보고 모를 여인이 어딨겠소.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애정은 모르는 척 본인이 편할 때만 받아들이지 않소. 그러니까 로테도 “내가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이야, 하지만 너를 잃고 싶지 않아.”라는 소리를 늘어놓는 벨라같은 여인의 -늘 게슴츠레한 눈빛을 한 <트와일라잇>시리즈의 여주인공인데, 어장관리 기술의 종결자라오- 원조였을지도 모르오. 좀 더 솔직히 말해달라고? 음, 벨라 아니 로테도 알베르트도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오. 물론 불안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총을 빌려준 것 역시 수상하기 짝이 없소. 그러나 그들 역시 충분히 벌 혹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생각하오, 게다가 그 방아쇠를 당긴 건 결국 당신 자신 아니겠소. 그러니 이렇게 어리석게 굴지 마시오. 설사 그녀가 어장관리의 원조였다 해도, 알베르트가 속으로는 당신을 심하게 질투하고 못마땅해 했다손 쳐도 그들은 당신이 사랑하고 아낀 사람이었소. 과거의 여인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건 신사가 할 짓이 아니라오.

소중한 벗이여, 솔직히 말해서 내 마음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을 때, 삶의 작은 테두리 안에서 행복하고 침착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혼란이 덜어진다네.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가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오로지 겨울이 다가온다는 생각만을 하는 사람들 말일세. 

그렇소. 당신은 이렇게 살아야했소. 작은 일에 감사하고 감탄하며. 로테의 소박함과 동생들을 챙기는 마리아와 같은 순결함에 당신이 반한 것은 이해하오. 당신은 그 때 너무 멀고 긴 요단강을 건넌 것이오. 물론 잘 알고 있소. 사랑이란 늘 급작스럽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허나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에 스스로를 바쳐 결국 타인을 사랑할 권리조차 스스로에게 주지 않은 당신에게 나는 동의할 수가 없소. 어쩌면 괴테 씨가 아직 어렸기에 그랬을지도 모르오. 어릴 때는 대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비극적인 사랑, 부조리한 괴로움 등에 매혹을 느끼며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는 하니까. 

아아, 그렇게 낙담하지 마시오. 나 역시 당신의 열정적인 사랑과 아름다운 문장, 그리고 당대에 대한 회의와 불안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한다오. 그런데 순수한 불멸의 사랑이라는 피의 서약을 건넨 당신의 사랑방식은 공감하기 어렵소. 그녀를 사랑했다면 당신은 견뎌냈어야 했다는 게 내 생각이오, 그리고 시간의 마법을 기다리고 다른 이를 사랑하려 노력했어야 하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자격과 사랑받을 권리조차 하나의 총알에 맡겨버렸소. 그래놓고 알베르트와 로테, 독자들과 당신 스스로까지 기만하며 혼자서만 피해자인척 구는 비겁함이 매우 언짢소. 사랑이란 실상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혹 이제는 당신도 동의하오?

아, 당신도 자살을 굳이 원한 건 아니라고. 하긴, 그렇군요. 그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양반에게 손해배상 청구라도 하시오. 사후 출판에 대한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는 어렵겠지만 손해배상이나 자살 방조죄는 인정될지도 모르오. 그 양반 인세로 번 돈 모두 내놓아야겠군요, 듣자하니 파우스트 박사에게도 패소했다던데. 쯧쯧. 아무튼 나는 우리가 승소할 것을 확신하오. 그러니 여전히 억울함이 남아있다면 항소 하시오. 나는 그 말밖에 해줄수가 없구려. 조심히 들어가시오, 베르테르 양반. 만나서 영광이었소.

  

 

* <열린책들> 카페와 알라딘에 동시 게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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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카카 2011-10-22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만 지금 몇 번째인지 ㅋㅋㅋ
너무 재밌어요. 결국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사랑한 것이군요. 그보다 더 지독한 짝사랑은 없긴 하죠 ㅎㅎ

Shining 2011-10-24 23:06   좋아요 0 | URL
어릴 때 읽었을 땐 비극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처럼 느껴졌는데, 머리가 굵어지고 나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_- 하게 되더군요ㅋ 전 베르테르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