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변화 - 하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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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롱카가 사랑한 남자, 그녀의 전남편 페터는 ‘시민’에 대한 강박증을 갖고 사는 남자다. 평생을 스스로의 기준과 엄격한 규율로 마치 자신을 타인처럼 대하고 다루며 살아온 남자. 아마 칸트처럼 일과가 늘 완벽하게 짜여진 남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폭풍이 휘몰아친다. 감정의, 자멸의, 스스로를 기꺼이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종의 광기의 바람이.

광기에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법일세.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광기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네. 그런 감정의 폭풍우에 휩쓸려보지 않고 그런 지진에 의해 토대가 흔들려보지 않은 삶, 지금까지 오성과 예의범절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유지된 모든 것을 울부짖으며 내동댕이치고 지붕 위의 기왓장을 날려버리는 돌풍에 휘말려보지 않은 삶, 그런 삶은 초라할 걸세. 바로 그런 광기가 내 인생을 덮친 게야.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너울거림을 인정한다. 자신의 비겁함과 불안까지도.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과 아내에 대한 연민과 불운함, 그리고 그녀를 선택함으로써 처하게 될 모든 상황을 충분히 인지한다. 담담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이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가 참으로 가엾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일롱카의 관점에서 읽을 때는 냉혈한에 비겁하고 무책임한 -심지어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남자라며 페터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는) 친구가 되어 음조의 변화도 없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런, 그는 그저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희망을 원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런데 불현듯 얼마간의 준비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오직 자신만을 향한 다가오는 바람, 토네이도처럼 무시무시한 돌풍. 사랑의 광기라는 재앙 앞에 그는 내진설계조차 되지 않은 건축물에 지나지 않았다. 사랑을 할 준비는 물론 받을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약하기 짝이 없는 구조물.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떤 건축물도 토네이도를 막을 수는 없으니. 그는 도망치고 부인하고 두려워하다 결국 유디트에게로 뛰어든다. 아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를 흡수하고 만다.

그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개인으로서 나라는 인물이나 내 사회적인 위치나 남성으로서의 인간적인 특성이 아니었네. 나는 그녀한테 모든 행복과 불행을 의미하는 수수께끼 같은 기호로 가득 찬 비밀문서 같은 존재였네. 그녀는 나와 같은 상태에 이르길 일평생 갈구했어. (중략) 유디트는 서서히 나라는 사람을 깊이 알게 되면서, 내가 자신이 ‘바라던 초록색’이 아니라고 느꼈네. 오랜 세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려 하지 않았던 거야. 사람들은 대부분 갈구하는 것,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절대로 인간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하지 않네. 우리가 함께 살면서부터 우리의 지난 세월을 열병처럼 뒤덮었던 견디기 어려운 긴장은 사라지고 없었어. 우리는 서로에게 단순히 남자와 여자, 신체적인 약점과 일상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도 그녀는 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나를 원했네. 내가 성직자나 다른 세상에서 온 숭고한 존재이길 바랐어. 그러나 나는 다만 희망을 버리지 않은 외로운 인간에 지나지 않았지.  

이보게, 나는 기적을 믿었네. 어떤 기적을 바랐냐는 뜻인가? 그저 사랑이 초인간적인 신비스러운 영원한 힘으로 외로움을 덜어주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고 사회와 이름, 재산, 과거와 추억이 우리 사이에 쌓아 올린 인위적인 벽을 허물어주길 바랐네. 나는 마치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딘가에 아직 온정과 동정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은밀히 힘차게 심어줄 손을 찾는 사람 같았어.

일롱카의 이야기가 멜로드라마의 서사였다면 페터는 부르주아적 자질과 강박, 인간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 알았다. 그리고 무엇을 두려웠했는지도 알았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추문의 대상, 호기심 어린 시선의 응담함을 알았다. 페터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바꾸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정열적인 애인이나 헌신적인 아내 등이 아니라 자신을 관찰하며 조소하는 정념(情念)의 상대뿐이다. 그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도 지속되지도 못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자신을 먹이로 던지며 많은 것을 바꾸거나 포기했지만 유디트는 돈을 가져갔고 넘을 수 없는 간극을 제시했으며 자존심을 훔쳐갔다. 유디트의 시선과 그 안에 담긴 함의(含意)와 감정을 읽어내며 견뎠다. 그리고 한참을 더 바라보다 끝을 선고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우아했다.

페터는 제일 낭만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사랑을 했다. 희망을 희구하는 것, 상대방에게 구원을 바라는 것, 그것이 가장 나쁘다. 가장 비현실적인 동시에 가장 자학적이다. 사랑이 사랑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실상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내 남편에게서는 파슬리 냄새가 나지 않았어. 나는 눈물 글썽한 두 눈을 감은 채 그 사람의 냄새를 맡고 전율했어. 그 사람에게서는 건초 냄새가 났어. 우리가 이혼하던 날처럼. 내가 처음으로 그 사람 침대에 누워서 씁쓸한 건초 냄새 때문에 메슥거렸던 그날 밤처럼. 그 인간은 그때도 변함이 없었어. 몸도 의복도 냄새도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똑같더라고.

유디트는 페터의 그 점을 원했고 증오했다. 마치 어디선가 배워온 것 같은 그 미소를 볼 때마다 목을 조르고 싶었다는 그녀.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솔직했다. 그래서 그녀는 페터를 소유함으로써 페터가 포함 된 세계를 가지기러 결심했다.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 그들은 태어나면서 갖고 있었던 것들을. 결국 페터와 신분을 함께 갖게 되나 그녀는 조금도 만족할 수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오랫동안 동경했던 것에 마침내 닿게 되면 사람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기 마련이다. 믿기지 않을만큼 큰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오르거나 그것을 경멸하게 되거나. 밑에서 올려다보며 동경하던 것에 닿았다는 것은 내가 올라갔거나 상대가 내려왔다는 말이니까. 자신의 상승을 깨달을 때는 그것이 한없이 고귀해보이지만 그것이 자신에게로 내려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은 그를 혐오한다. 유디트는 허무해진다. 조소하며 비소한다. 막연하게 깨닫는다. 자신이 그의 침대를 차지하고 부인이 되고 마음껏 집을 휘젓고 다닌다 해도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 해도. 자신은 여전히 그의 부인이나 애인이 아닌 하녀로써 스스로를 느낀다는 것을.

자격자심이란 말은 없는 자들의 사전에만 등재되어 있다. 부자의 장점은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 말처럼 진짜 부자들은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고 때문에 자신이 무얼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뺏긴다’와 ‘잃는다’는 애초에 갖지 않은 것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정말 없는 사람들은 뼛속까지 배인 열패감과 분노, 조바심을 감추지 못한다. 혹여 훗날 돈이나 명예, 지위를 갖게 된다하더라도 그들의 태도에서는 프롤레탈리아 특유의 기질이 드러난다. 아니, 오히려 바로 그 때 그들은 뼈저리게 깨닫는다. 귀족의 옷을 입을수록 자신은 -타고난- 귀족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런 면에서 페터는 진정한 부르주아다. 그의 복제한 듯한 미소, 비슷한 수 십 벌의 양복, 감정을 배제한 화법,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과 가히 우아하다고 할 수 있는 관대함이 얼마나 유디트를 애타게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차라리 페터가 화를 내고 으르릉거리며 그녀를 원망했다면, 단 한 번이라도 그녀와 다투기라도 했다면 유디트는 그를 떠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기꺼이 사랑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무심한 자와 싸우느니 적개심을 가진 자와 싸우는 것이 낫다는 걸 알고 있지 않는가. 단단하고 한결같은 벽과 부딪히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그 벽을 조금도 상처 낼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상처받았다.

그래서 유디트가 페터를 안았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자신이 그 냄새를 그리워했다는 것과 그만큼 증오한다는 것을. 그 냄새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뀌지 않는 페터의 부르주아적 기질을 상징하며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근성을 확인시킨다. 절대로 이해할 수도 합일될 수도 없는 깊은 격차의 강물 같은 것이 바로 그 ‘냄새’ 안에 담겨있다. 전쟁 통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페터를 어떻게 그녀가 사랑할 수 있을까.

고백컨대 나는 유디트 알도조를 뇌쇄적인 아름다움과 치명적인 파괴력을 가진 팜므파탈의 전형이라고 상상했다(변명하자면 이름도 유디트라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려 상처입은 여자일 뿐이었다(그래서 새 애인에게 자산을 탕진하듯 자학적으로 모든 걸 내주는 것이 아닐까, 페터의 물건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신에게 그런 시기가 있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하긴 일롱카는 연약하고 우아한 귀부인으로 페터는 지독한 냉혈한으로 공상하며 읽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의 사념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페터 자신과 주위의 시선은 물론, 일롱카의 페터와 유디트의 페터도 닮지 않았다.

문득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깨닫는다. 모든 사랑은 일반화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때문에 세상에 사랑보다 더 이기적이고 도취적인 감정은 없다는 것을. 같은 이유로 어떤 사랑도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아는 나 자신이 세상에 하나 뿐이듯 내가 아는 그(또는 그녀)도 단 한 명 뿐일테니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라고 말한 알랭 드 보통의 말은 얼마나 탁월한지. 결국 그들은 서로를 관찰할 뿐이다.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상대의 투과상을 비출 뿐이다. 그리고 주변인에게 말한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으로. 일롱카는 페터를 페터는 유디트를 유디트는 페터와 세자르를(세자르란 인물은 작가의 페르소나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의 모호성과 사상도. 그는 이들 셋 모두와 닿은 동시에 아무와도 닮지 않았다). 사랑도 다른 것들처럼 마지막이 답이 된다. 결국 헤어졌잖아, 라는 말 앞에서는 그간의 어떤 아름답고 고결한 추억도 모두 그저 그런 것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풍화되고 희석된 후 남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 방식을 취하며 누군가의 사랑을 희구하며 살고 있는가.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제목이 ‘사랑의 변화’ 나 ‘결혼’이 아닌 ‘결혼의 변화’인 이유를 확실히 깨닫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대화의 시기가 서로 어긋나있어 지금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페터가 말하는 시점에 유디트는 어디에 있었을까, 일롱카는 여행을 떠났을까 그 때는 친구에게 어떤 말을 할까. 유디트가 말하는 시점에 일롱카는 이미 죽었다고 했는데 페터는 어떨까. 그는 미국으로 갔을까. 일롱카가 죽은 것, 유디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까. 숨겨진 인물들이 지금은 어느 공간에서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상상하고 예상하게 만든다.

새삼 작가의 위엄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고 만다. 마치 빙의되기라도 하듯 세 사람의 목소리는 제각각인데 모두가 굉장한 설득력을 담고 있지 않은가. 일롱카에게서는 처절하기까지 한 안타까운 구애의 목소리가 들리고, 페터에게서는 두려움이 묻은 냉정함, 근본적인 외로움과 현재에 대한 따가움이 느껴지고 유디트에게서는 계급의 차이가 느껴진다. 페터의 가족에 대한 묘사, 이해할 수 없는 거리감과 따라할 수 없는 초연함에는 분명한 계급(계층이 아닌)의 차이가 느껴진다. 그리고 곳곳이 숨어있는 망각과 시대와 현실과 전쟁. 이런, 산도르 마라이의 글은 여전하다. 저도 모르게 삶의 정수를 관통해 온 사람, 너무 많은 것을 겪고 알아온 노인의 목소리. 폐허에서 발견한 물을 머금은 수선화 같고 쓸쓸하기 그지 없는 첼로의 선율 같기도 한 그 목소리와 언제 어디서 어떤 페이지를 읽어도 훔치고 싶은 문장이라는 것 역시. 휴, 그의 글은 절대 도서관에서는 읽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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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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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하드커버와 많지 않은 페이지, 예쁘지만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여인의 얼굴. 헝가리의 대문호라는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난 책인데 신기하게도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책 속에 고개를 파묻고 마음껏 활자 냄새를 들이키며 도서관 한 구석에 앉아 -일명 나만의 자리- 책을 읽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아, 이것이 바로 거장의 문장, 그의 숨결이구나. 초의 미세한 떨림, 커튼의 흐느낌, 깊은 호수의 잔잔한 파동, 은식기와 촛대의 우아함, 겨울 별장의 나무 냄새와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담담하고 차분한 말투, 그렇지만 어딘지 고압적이기도 하고 여유롭기도 한 목소리. 마치 억겁의 시간들을 지나 온 사람, 그야말로 견고하고 부드러움을 가진 노인이 보내는 시선의 온도가 느껴졌다. 책장을 덮고 이곳이 도서관이라는 것에 안도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니 하마터면 이 책을 훔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갖고 싶은 문장, 탐이 나는 책, 세상의 이 책을 모두 없애고 나만이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글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것이 마라이와의 시작이다.  

그의 글은 마치 고성(古城)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 한 때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부인과 점잖고 부드러운 신사가 살던 곳. 그런 곳의 붉은 벨벳 의자에 앉아 둔탁하고 세심한 나무 결들을 쓰다듬는 순간이랄까, 다락방에 숨겨둔 먼지 낀 하얀 천 뒤에 숨은 여인의 그림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니면 코안경을 낀 백발 노인의 서재에서 부드러운 빛을 맡으며 책을 만지는 느낌이랄까. 마라이의 글은 언제나 이런 곳을 떠도는 듯한 백일몽에 시달리게 한다. 그는 고루하고 먼지 냄새 나는 ‘이미’ 지나 버린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달라고 애쓰며 말하지 않는다. 특별한 척하며 어른인 걸 잔뜩 티내며 그럴듯하게 굴지도 않는다. 애써 이해하거나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고, 복잡한 이야기를 진리인 척 하지도 않는다. 거창한 스토리텔링이나 복잡한 플롯, 다각적인 인물들도 물론 그가 만들어낸 세상과 무관하다.

그는 그저 애정과 배려, 관심을 담은 눈으로 우리의 시간을 목격하고,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다. 무연하고 단단한 표정으로, 수많은 함의와 상처를 안은 채. 강하기 때문에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상처를 알기 때문에 부드러울 수 있는 마음으로. 그래서일까. 마라이의 글을 읽다보면 안도감과 뭉클함 같은 것이 혼종된 것 같은 오묘한 기분이 든다. 우리가 그토록 모질게 살지는 않았다는 것,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누군가 긍정한다는 것에 위안 받고 인간의 연약함에 구원받는다.

너 혹시, 다만 의미가 없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 그렇지도 않아.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일들이 있어. 아까 시내를 지나 이곳으로 오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라. 그것은 정말 거짓 없는 순수한 기쁨이었어. 전에는 다른 할 일이 있었고, 다른 데 정신이 쏠려서 세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그러다 그 사람을 잃어버렸고 그 대신 세상을 얻었어. 손해 보는 거래였다는 뜻이니? 나는 잘 모르겠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전략) 어제만 해도 복수나 구원을 갈구하고 그가 절실하게 사람을 필요로 하거나 전화를 걸어오거나, 감옥에 수감되어 처형되기를 바랬는데. 그런 감정을 느끼는 동안에 상대방은 멀리서 즐거워 할 수 있어. 너를 여전히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야. 복수심은 곧 그리움과 구속을 의미하기 때문이지.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하며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날이 온단다. 거리에서 그 사람과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아. 그 사람이 전화를 걸면 예의바르게 대꾸를 하고 그 사람이 만나고 싶어 하거나 만날 수 밖에 없으면 만나는 거야. 굳이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거든.(중략) 이제는 복수를 원하지 않아, 정말이야. 진정한 복수, 유일한 완벽한 복수는 그 사람에게서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단다. 그 사람이 이제는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랄 일도 없는거지.

이별을 당하고 (혹은 결행하고)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상처냈었던가. 과거를 희석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수정해야만 했는가. 마라이의 어떤 글을 읽었을 때 나는 누군가와의 이별에 라벨을 붙여가는 단계에 있었다. 좌절과 분노와 이성의 단계를 지나 나의 잘못과 그 사람의 잘못을 구별할 수 있었고, 자신의 나약함과 허기와 어두움에 질려있기도 했다. 그 사람의 괴로움을 위해 마치 악마처럼 집착하고, 그의 행복함을 순교자처럼 바라던 시간조차도 끝나 있던 시간. 잊어버린 척 털어내거나 기뻐하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지친 상태였다. 어느 순간에야 문득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는 순간 그가 나의 삶에서 온전하게 빠져나갔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길고 축축한 끝나지 않을 터널을 지나는 것만 같았는데. 그 터널의 끝은 광희라고 생각했건만 기억나지도 않는 틈에 빠져나와 이미 빛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다. 아, 인생의 어느 한 시간이 역사가 되어 끝나 있었다. 앨범에 년도를 매기듯 사진에 제목을 붙이듯 시간의 현재형은 사라지고 끝장조차 이미 넘어가있었다.

엄청난 쾌감과 안도감을 즐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씁쓸함에 떨었던 것 같다. 마이너스적인 생각을 할 때가 차라리 나았을까, 그때는 애정이나 연민이나 하다못해 원망이라도 들어있었을텐데. 이제는 무색 무취의 투명한 병 속에 시간이 봉인되었다. 한 때는 가장 가까웠던 어떤 이가 이제는 그저 A나 S등의 이니셜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 말끔함에 놀랐다.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제 어느 곳에서도 그때의 그 아름다움을 지닐 수 없기에. 허망함에 웃었고 쓸쓸했다.

일롱카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때의 내가, 아니 우리 모두의 '그 때'가 떠오른다. 페터와 관련된 시간들이 박제된 생물처럼 그녀 인생에 전시되었을 때, 페터와 그녀의 행복이 서로 조금도 이어져 있지 않음을 깨달을 때, 일롱카는 세상의 빛을 다시 발견했을까. 그녀는 사실과 감정을 얼마만큼 잘 구분했던 것인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광기는 그 순간의 그들의 세계관이 ‘그와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다는 데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광기는 종종 상대에 대한 미화와 자기연민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말이다. 페터의 모습을 바라보며 화장을 다듬는 그녀, 악어 가죽 지갑을 그저 ‘물건’이 아닌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일롱카의 모습을 두고 의구심과 연민으로 마음이 싸늘하다.

그래서인지 일롱카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페터에 대한 거부감으로 배가시켜 책장을 넘겨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는  예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일롱카의 시각처럼 그는 무뚝뚝하고 낯설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그토록 무자비하고 냉담한 가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상대의, 때로는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은 -상대가 그 사랑을 받을 마음이 있건 없건을 떠나서- 늘 고독하다는 것 또한. 페터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며,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가 사랑한 여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야기는 하권으로 넘어간다.

 

 


* 하권의 리뷰를 이어서 올리기 위해 (무려) 작년에 쓴; 글을 일부 수정해 재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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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9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0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8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봄, shining님의 추천 책, 음악은 모두 성공이었기 땜에, 이 책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Shining 2011-08-01 14:55   좋아요 0 | URL
그렇게 말씀하시면 다소 부담스럽지만(우물우물;) 이 책만은 자신있게 추천합니다(으쓱으쓱). 산도르 마라이니까요_-* 『열정』과 함께 그의 글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이에요, 개인적으로는 하권보다는 상권이 좋았구요^^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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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아가미』이후 다시 구어체 리뷰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미리 인사드릴게요. 아, 그러고 보니 그날도 비가 내린 후였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이군요. 이런 날에도 굳이 산행을 도전하거나 계곡으로 캠핑을 가서 119아저씨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불어난 물에 휩쓸려 하릴없이 죽음의 길로 떠내려가는 이들도 분명 생기겠지요. 사람 목숨은 참으로 질기고도 찰나라는 것을 이럴 때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로 깨닫게 되지요. 여기에도 질기고도 순간인 사람의 생사를 목격하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김애란 작가의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이 오늘 이야기할 글입니다.

김애란, 그렇습니다 여러분 김애란입니다. 저는 그녀를 말할 때 늘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아, 얄미워. 아직 충분히 젊은 작가인데도(차라리 어리다고 말하는 게 어울릴 나이였지요) 성량이 풍부하고 감정까지 풍부한 목소리를 내곤 했죠. 게다가 그 목소리 안에 담긴 것들은 깊으면서도 맑았죠. 놀랄 만큼 디테일하고 섬뜩하게 현재를 잘 포착해내고 무엇보다도 재밌고 즐겁고 책장이 술술 넘어가죠. 그런데도 결코 가볍지도 비루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았더랬죠. 뭐랄까, 김애란을 읽으면 ‘평론가들이 칭찬하는 글들은 어렵고 비(非)대중적이다’라는 은근한 편견을 -거의 처음으로- 의심하게 되죠. 젊은 작가 중에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김연수 작가와 함께 평단과 대중을 함께 만족시키는 젊은 작가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으더군요.  

저는 그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런 모습이 떠오릅니다. 좋은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반듯하게 자란, 공부도 잘하고 생긴 것도 말끔한, 등굣길에는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어 강아지를 구할 것 같고(!) 아침부터 상쾌하게 농구를 하는가 하면 하굣길에 할머니 짐을 들어줄 것 같은 그런 소년 있잖습니까. 하물며 심지어 겸손하고 사교성도 좋은 뭐 그런 소년 말입니다. 순정만화에 나올법한 캐릭터, 서브 남자주인공의 느낌말입니다. 도저히 수상한 구석이 없는 그래서 나와는 도무지 연관될 구석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 말입니다. 부럽고 분하다가 그냥 이 정도로 우월해주시면 그저 허허허 하게 된 달까요. 저에겐 김애란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재밌고 꼼꼼하고 영민하고 매력 있고 문장력까지 좋은, 얄미운 작가. 그런데 6월, 드디어 첫 장편소설이 출간되었습니다. 허나 큰 기대는 대부분 큰 실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냉정한 척 하며 기대를 조정하려 애썼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목이 의아합니다. 게다가 파스텔 톤의 여리디 여린 표지라니. 이래저래 지나치게 트렌디한 거 아냐? 거부감과 불안감이 모여 함께 술렁거립니다. 책장을 엽니다.

읽었노라, 느꼈노라, 쓰노라. 이것이 리뷰를 완성시키는 삼단계지요. 네, 씁니다 쓰려구요 리뷰.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괜히 얼토당토않게 쓰다가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처럼 얼룩덜룩해질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말이 고여 있지 못하고 자꾸만 찰랑이다 못해 범람할 것처럼 덤벼드는데 연설문을 쓰듯 정갈하게 뽑아 낼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문어체 문장은 도대체가 나오지가 않았어요, 읽는 이가 얼마나 되던 어떤 생각을 쓰든 문어체 문장은 강단에 서서 말하는 기분이 들곤 했거든요. 하지만 친한 친구가 “너 그 작가 좋아하잖아. 이번 책은 어때?” 라고 물어보면 봇물 터지듯 -두서는 없어도- 이야기가 쏟아질 것 같았어요. 그게 이 리뷰가 문어체인 이유입니다. 네? 아, 그래요 실은 조악한 아이디어마저 똑 떨어진 것도 맞긴 합니다.

줄거리부터 간단히 설명할까요. 아주 간단한 시놉시스, 아니 트리트먼트로 요약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 한 문장이면 가능하죠, 작가 자신이 정의를 내렸더군요.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남들과 다른 속도로 부모가 된 두 남녀와 남들과 다른 속도로 시간을 스쳐가는 한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17살에 부모가 되어버린 대수씨와 미라씨, 이제 17살이 된 두 사람의 보물 아름이의 이야기지요. 아름이는 조로증입니다, 남들은 경비행기를 타고 가는 시간을 혼자서 우주선을 타고 살아가는 성질 급한 우주선 티켓을 받아버린 아이이지요. 우주선을 타고 살아가는 아름이는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요, 같은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자신의 부모님에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우주선 속에서 아름이가 바라보는 세상과 대수 씨와 미라 씨에게 바치는 헌정사. 갑자기 떠오른 것인데, 책의 초입에 아름이의 엄마가 출산의 장단점, 대수의 장단점을 쓰는 부분이 나옵니다. 가운데에 줄을 쫙 그어놓고 양쪽에 나열해보는 그런 거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리뷰를 써볼까 합니다. 줄은 없고 좌우로 나눌 수는 없지만 장단점부터 나열하고 결론짓는 방식 말입니다. 네, 아이디어가 떨어졌으니까요.

우선 이 책, 상당히 찡합니다. 보십시오, 얼음인간이 아닌 이상에야 제 설명만으로도 뭉클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 본 글들은 때론 위험하지만 대부분 흡족한 성적을 안겨줍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김원일의『마당 깊은 집』과 은희경의 『새의 선물』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유치하지만 진솔한 표현도, 의뭉스럽게 진실을 관통하는 것도 아이들의 시선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그런데 하물며 희귀병에 걸린 아이라니요. 병에 걸린 아이들의 가장 안타까운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무나, 정말이지 너무나 조숙한 것이지요. 제 나이보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를 보면 어쩐지 미안하고 안쓰러운 것이 당연지사인데, 아픈 아이들은 그보다도 더합니다. 많은 고난을 지나온, 그래서 이제 그것 또한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아주 겸허하고 단단한 노인보다도 더 굵직합니다. 쓸쓸하고 아연하고 그래서 사람을 송구스럽게 만듭니다. 이 책의 아름이도 그렇습니다. 집보다 병원이 익숙한 아이,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삶을 진행해온 아이, 누구도 대신 아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고독하고 의연한 아이. 그런 아름이의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짠한데 이 아이가 하는 말들은 더 뭉클합니다. 세상이 태평양처럼 느껴질 때 호랑이가 되어주겠다는 아이, 완전한 존재가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냐고 묻는 아이, 엄마가 자신에게서 도망치려 했기에 엄마의 사랑을 믿는다는 아이. 가끔은 정말이지 아이의 시선 같아서 화들짝 놀라게 하는가 하면 어쩔 때는 백겁의 세월을 살아온 것처럼 말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점을 맡고 있는 것이 조숙한 아름이의 시선만은 아닙니다. 작가는 본인의 장기를 여지없이 드러내는데 특히 자연스러운 유머 구사와 눈부신 문장들은 발군이군요.

어릴 땐 온종일 말을 줍고 다녔다. 엄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종알대며 주위를 어지럽혔다. 각각의 이름은 맑고 가벼워 사물에 달싹 붙지 않았다. 나는 어제도 듣고 그제도 배운 것을 처음인 양 물어댔다. 손가락을 들어 무언가 가리키면, 식구들의 입에서 낯선 소리를 가진 활자가 툭툭 떨어졌다. 바람에 풍경이 흔들리듯 내가 물어 무언가 움직이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건 뭐야?'라는 말이 좋았다. 그들이 일러주는 사물의 이름보다 좋았다.

비는 비. 낮은 낮. 여름은 여름…… 살면서 많은 말을 배웠다. 자주 쓰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상에 뿌리내린 것이 있고 식물의 종자처럼 가볍게 퍼져가는 말이 있었다. 여름을 여름이라 할 때, 나는 그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다 믿어 자꾸 물었다. 땅이라니, 나무라니, 게다가 당신이라니…… 입 속 바람을 따라 겹치고 흔들리는 이것, 저것, 그것. 내가 '그것' 하고 발음하면 '그것……' 하고 퍼지는 동심원의 너비. 가끔은 그게 내 세계의 크기처럼 느껴졌다.

이제 나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은 거의 다 안다. 중요한 건 그 말이 몸피를 줄여가며 만든 바깥의 넓이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바람이라 칭할 때, 네 개의 방위가 아닌 천 개의 풍향을 상상하는 것. 배신이라 말할 때, 지는 해를 따라 길어지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쫓아가보는 것. 당신이라 부를 때, 눈 덮인 크레바스처럼 깊이를 은닉한 평편함을 헤아리는 것. 그러나 그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바람은 자꾸 불고, 태어난 이래 나는 한 번도 젊은 적이 없었으니까. 말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부모는 왜 아무리 어려도 부모의 얼굴을 가질까? (중략)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중하고 산뜻하게 머무르면서도 초라하지 않습니다. 단어들이 서로와 서로를 이어 마치 은하수처럼 펼쳐지는 장관을 이 젊은 작가는 정말이지 탁월하게 해내지 않습니까. 어떤 아포리즘 식으로 진실을 관통하면서도 허세나 허위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얕습니다. 언어를 오래 만져온 사람, 그렇기에 이제 그 말의 무게와 부피와 유연함까지 알고 있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역시 김애란이다, 싶은 부분이 바로 이 문장력에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시키죠.

그러면 이제 오른쪽으로 넘어가 단점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가장 먼저 꼽고 싶은 것은 역시 설득력 부족입니다. 개연성이 약하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면, 멋진 옷을 샀습니다. 그리도 기다렸던 브랜드의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옷입니다. 벅찬 가슴으로 옷을 입어봤는데 과연 옷태가 납니다. 그런데 이런, 박음질이 맺음 되지 않은 부분을 발견했다면 어떻습니까. 반품 사유는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기분은 이미 상하죠, 뭔가 억울한 기분이나 괜히 찜찜한 느낌까지 받을 수 있겠죠. 제가 이 책에 느낀 감상이 이것과 비슷합니다. 크게 비판할 만한 점이 확연한 건 아닌데 꼼꼼하지가 않습니다. 몇 가지 것들을 해결하지 않은 채 완성해버렸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과장되게 붙이거나 삭제한 것과 같달까요. 특히 이서하의 등장과 그 반전의 의미를 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가여운 아이를 조롱했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게 무얼까요(저만 모르는 건가요). 게다가 엄마와 PD아저씨의 수상한 기류, 장씨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등은 역시 석연치 못합니다.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그래서? 저는 우매한 독자일까요.

외람되지만 아마도 원인을 짐작해보면 장편소설에 미숙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애란은 노련한 작가이지만 뛰어난 단편소설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여태껏 단편만 써온 그녀는 단편의 호흡을 놀랄 만큼 정확히 꿰뚫고 있죠. 그런 그녀가 장편을 씁니다. 연재는 아니지만 역시 막바지에 가니 호흡이 부족했던 걸까요. 장편의 페이지가 너무 그득하게 느껴진 걸까요. 장편에서만 가능한 소재, 쓸 수 있는 문장 구사를 하게 된 것은 좋았으나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것이겠지요. 컷과 시퀀스는 좋은데 씬의 흐름이 좀 벅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단막극만 쓰던 작가에게 불쑥 16부작을 요구했거나, 미니시리즈 쓰던 작가에게 대하드라마 대본을 쓰게 하면 이런 기분일까요.

그런데 말이죠 이건 뭐 팬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허허, 다음에 좀 더 잘하시면 되요 하면서 폭 안아주기라도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말이죠, 김애란답지 않다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깊이였어요. 젊은 작가들은 잘 쓰지 않는 방식, 말투, 생각, 서사, 무엇보다 감정이나 사물의 겉이 아닌 내부를 바라보려는 깊이 있는 시선. 그러니까「노크하지 않는 집」의 서늘함과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의 날카로운 공감, 「칼자국」이 보여준 굵직하고 튼튼한 서사와 「침이 고인다」의 다정하지만 쓸쓸한 정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이 책은 지나치게 말랑말랑합니다. 독자들을 울리기에, 공략하기에 이 얼마나 탁월한 소재입니까. 착하지만 불행한 가족과 남다른 가족애와 조숙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아이. 독자 깨나 울릴 수 있는 이야기.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기획소설인걸까요. 플롯은 클리셰 그 자체이며 ‘베스트셀러가 되는 법’ 책에서나 볼 법한 요소들이 일진해있더군요. 읽고 나면 분명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에- 짠하고 뭉클하긴 한데 약간 속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 말하자면 (제가)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조창인의 『가시고기』를 -눈물 콧물 짜며 읽어놓고도- 쉬이 '좋은 소설'에 꼽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사람들이 잔인한 건 말이죠,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고 재현한다는 겁니다. 저는요 <병원24시>나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프로그램을 웬만하면 보지 않습니다. 무섭거든요, 타인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목격하면서도 그들은 이해한다거나 연민한다고 믿는 제 자신이. 그 고통을 좀 더 슬프고 아프게 표현하려는 이들도 잔인하지만 결국 그것을 보면서 그 고통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나의 불행은 견딜만한 것이라고 자위하는 게 제일 잔혹한 거잖아요? 어차피 돌아서면 잊어버릴 것, 타인의 불행을 발판삼아 내 자신에게 행복감을 고양시키는 것, 겨우 그 정도밖에 못할 거면서 마음껏 동정하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않으면서) 연민하는 마음으로 됐다고 생각할- 제 자신이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어요.

물론 그렇다고 모든 건강한 이들은 아프고 약해진 이들에 대한 글을 쓰면 안 된다는 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그런 글들이 필요할 거예요. 세상에 모든 낮고 어두운 곳에 포진한 것들을 수면 위로 부드럽게 올릴 수 있는 것, 작가가 해야 할 어떤 '책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어쩌면 그런 것일 테니까요. 문제는 시선이겠죠, 걸음이고 방향입니다. 작가가 '쓰고 싶어서' 썼다 하더라도 혹은 동정이나 이해, 연민, 짐작, 깨달음 등이 목적이지 않다 해도 역시 타인의 고통을 너무 쉽게 전시하고 있다는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네? 맞습니다, 인정할게요. 저는 김애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고통을 재현하고 전시할 수 있습니다, 연민하고 골몰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작가라면, 좋은 소설이라면, 아니, 김애란이라면. 더 나아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소재를 선택했다면 좀 더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러나 따뜻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밀어붙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애란이라면, 김애란이기에. 제목과 표지의 불안감을 씻어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꽤 좋게 평가하려고 합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갔다 나 갖다가 장난 하냐(엥, 써놓고 보니 싸이의 '새'군요) 하시면서 짜증내시겠군요. 그러게요, 단점이라 생각하는 부분에 한참 열을 내며 페이지를 소비해놓고 다시 좋게 본다니 헷갈릴 만도 해요. 저도 사실 꽤 고심했어요, 우호냐 비판이냐 어느 쪽에 조금이라도 더 높게 들어야 하나. 그런데요, 제가 생각하는 '단점'은 결국 '김애란이니까'의 다른 말이더군요. 약한 맺음새를 지적한 첫 번째 부분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김애란은 이러면 안 된다' 하고 있더라고요. 다른 작가였으면 이렇게 신랄하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불편한 점으로 느껴진다, 정도겠죠. 혹 작가의 이름을 명시되어 있지 않다면 저는 이 글을 꽤 높게 평가했을 텐데, 김애란이라는 세 글자가 제 마음을 콕콕 쑤시네요. 등단 10년차이기에, 첫 장편소설이기에, 김애란이기에. 당신은 이러면 안 돼, 하면서 눈을 흘기게 되더라고요. 물론 작품 밖에 위치한 작가에 대한 기대나 작품 전반에 대한 분위기 등도 책을 평가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신인작가와 중견작가는, 데뷔작과 십 년 후의 작품은 물론 다르겠죠, 때로는 달라야 마땅하고요. 하지만 역시 지나치게 주관적인 판단이 섞인 듯 한 머쓱함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예, 그리고 팬심이라는 사심도 조금 있습니다. 마음이 약해지는 건 별 수 없었어요. 그래요 이 책, 베스트셀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김애란다움'도 녹아있구요. 읽고 나서 뭉클했던 것, 타인에게 추천할 만큼이 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문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랄까, 역시 그 녀석은 달랐어(그 녀석은 앞에 등장한 상큼한 엄친아입니다). 따라 하고 싶은 스톼일, 아니 문장이랄까요. 전요 정말 이런 문장, 한번쯤 구사해보고 싶어요. 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저는 이 책을 우호적으로 말하려 합니다.  

다시, 김애란입니다(이렇게 말하니 무슨 종교의 추종자 같지만; 『침이 고인다』띠지 문구를 인용한 거 아시죠?). 등단 10년차라고 하지만 이제 겨우 서른두 살이며, 첫 장편소설입니다. 아직 쓰고 싶은 것도, 쓸 수 있는 시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좀 더 지켜볼 수밖에요. 그것도 팔짱 끼고 거만하게 앉아서 관찰하는 게 아니라 관심과 배려로 기다리고 기대할 수밖에 없겠지요.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역시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앗, 빈곤한 아이디어 소굴 속에서 갑자기 이 리뷰의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두근두근 김애란. 너무 뻔한가요? 아이디어라고 할 것도 없다고요? 에이 좀 봐주세요, 요즘 아이디어가 떨어졌으니까. 그리고 두근거린다는 말 빈말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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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4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4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저, 이 소설 다 읽고, 감상문 착실하게 쓰고, 그리고 이 글 읽었어요.
근데 저는 이 이야기가 잘 따라가져서 좋게 읽은 쪽이랍니다. 어찌 보면 말랑말랑하다고도, 독자의 기대에 영합이든 부응이든 하려는 소재나 주제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저도 <병원 24시> 이런 거 안 보는 쪽인데, shining님과 마찬가지 이유로, 어설프게 이해하고 연민하고 이런 거 싫어서요. (보면 결국 그럴 거, 그럴 수 밖에 없을 거, 뻔하니까요.) 근데 이 이야기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비판받는 반전(?)까지 그냥 편하게 봤어요. 그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이라는 진실을 주목하면서 말이에요. 숨도 못 쉬고 다 읽어 버렸어요. 무척 잘 읽히데요~! ^^

영화평 같은 거 읽으면서도 느끼던 건데, 결국 책읽기든 영화읽기든 그 읽기의 체험은 굉장히 주관적이고 그 찰나에 어떻게 받아들였냐의 의미가 강한 거 같아요. 사후에 설명하는 거죠. 그 찰나의 인상, 의미화에 대해. 근데 이상한 건 다시 읽어도 결국 대부분은 똑같다는 거! 그게 사실 재밌는 점이에요...ㅎㅎ

Shining 2011-08-01 14: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녀의 여타 다른 글처럼 굉장히 술술 읽히죠. 찡하고 재밌고요. 그래서 저는 장단점과 결론을 구분지어서 쓸 수 밖에 없었어요. 장단점이니 하는 것도 결국 어디까지나 제 생각에 의지한 것일 뿐이니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은 주관적인 거니까요(끄덕끄덕). 그래서 공감이라는 말을 동감이라는 말보다 보편적으로 쓸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비슷할 수는 있어도 같은 것은 아마 불가능할테니까요.

김애란이기에, 김애란이니까, 김애란이라면;;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길 원한 것도 결국 제 욕심인, 주관적인 감상이겠죠^^

 
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 아, 오늘은 목 상태가 양호하군요. 다행입니다. 오늘 쓴 리뷰는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하고 싶었거든요. 뭐랄까, 책을 읽은 후 영화를 본 후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하며 정리하듯이 ‘쓰고’ 싶을 때가 있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혹은 얼굴을 보며 만나 신나게 조근조근 '말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오늘은 강력하게 후자의 방법이 끌리는 것이죠, 아니 이 책이 그런 책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비록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는 아니어도 쇠구슬은 구르지 않도록 노력함을 약속하며, 시작하겠습니다.

어제는 물비린내가 다 가시지 않은 비의 끝자락 기운이 남아있는 날이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실내에 가만히 앉아 토록 톡 두둑 하는 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게 있는 것만큼 사람을 나른하고 기묘하게 만드는 일이 또 있을까요. 아아, 커피 한 잔이라도 함께 한다면 조금 더 운치 있는 그림이 완성 될 것도 같군요. 비 오는 날은 참 신기합니다. 소리의 파장은 멀리 가지 않지만 그 작은 파동을 벌충하듯 후각이 대단히 예민해지는 날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비가 내리는 날에는 ‘물비린내 자욱한’이라고 제목을 붙이곤 합니다. ‘물비린내’라는 말을 종종 쓰고 그 말의 오묘한 어감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 냄새도 아니고 그냥 비린내도 아닌, 물비린내가 당최 무슨 말이냐고요? 글쎄요, 물 냄새인데 묘하게 비리고 그런데 때론 그립거나 아득하거나 불쾌해지는 그런 ‘감각’에 가까운 것인데 그것을 ‘물비린내’ 라는 말 외에 어떤 단어로 표현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그러면 -물론 동의하시지 않을지도 모릅니다만-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물비린내는 의외로 다양하고 많은 곳에서 풍깁니다. 비 오는 날의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냄새, 흙과 섞인 따끈한 진흙냄새, 물고기 특히 민물고기의 비늘의 냄새, 목욕탕과 페트병에 찌꺼기처럼 남은 냄새, 호수와 강가에서 나는 질척한 냄새 등. 정말 다양하죠. 재밌는 점은 도시에서 가장 쉽게 많은 양의 물을 목격할 수 있는 수영장에서는 그 냄새가 나지 않아요. 염소와 락스 냄새에 묻힌 덕분에 가장 청결한 장소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가장 인공적인 장소이겠지요. 이런, ‘물비린내’에 대해 설명하다보니 예상보다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하지만 그리 쓸데없는 이야기만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인상 쓰지는 마세요.

제가 이야기 하려 했던 것은 어제가 바로 이 책을 읽기에 최적의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햇빛 맑은 날이든,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든, 황사바람이든 뭐든 부는 날이라도 책의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감탄할 문장과 의아한 단점과 흡인력과 묘사는 변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책의 내용과 외부 상황 그리고 마음의 문제가 딱딱 맞아 떨어졌을 때 느끼는 그 쾌감의 배가는 여러분도 잘 아시죠. 그런 면에서 어제는 ‘마침맞은’ 날이 아닐 수 없던 거라지요. 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물기 젖은 날씨와 구병모 작가의 『아가미』. 캬, 듣기만 해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오오, 나는 왜 하필 맞게 오늘 이 책을 읽어서 하필이면 나를 이렇게 흥분시키는가. 우산을 한쪽 손에 꿰차고 중얼거리며 걸어오자 건너편에서 걸어오던 이가 힐끗 저를 쳐다보더니 조금 떨어져 걷는 게 아니겠습니까. 머리에 꽃만 안 꽂았을 뿐, 역시 비 오는 날에는 독특한 마인드의 소유자들이 돋보이는군.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저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 물비린내가 진동하는 책이거든요. 그 이유가 단순히 아가미가 달린 소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허허, 그렇게 일차적인 이유이자 감각은 아니에요.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생의 밑바닥을 더듬거리는 처절하고 강렬한 아귀의 손바닥과 그 손바닥을 만졌을 때 느끼는 까슬까슬함과 호숫가의 밑바닥을 바라보던 때 느끼는 깊이 없는 아득함과 떨림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감각들이 반딱반딱 빛을 내며 말캉하며 축축하고 벼린 물비린내를 피어오르게 하는, 그런 책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엄청나게 많고 실제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 책은 사실 뭐가 좋다 나쁘다 괜찮다 아쉽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동물이에요, 생물입니다. 피부이며 감촉이며 기관이에요. 우리가 신체 기관을 두고 “나는 장이 좋고 위는 좀 싫어. 폐는 모양이 흉측한데 맹장은 참 예쁘게 생겼더라. 이걸 언젠가 떼어낼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 책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를 이렇게 흥분하게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고백합니다, 그것이 이 리뷰를 쓰는 이유이자 여러분에 대한 최선의 예의일 테니까요.

최근에 제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독특한 문장을 가진 것은 황정은 작가의 『百의 그림자』였습니다. 독특했습니다, 정말 독특해요. 개성이라는 말 외에 표현이 불가할 만큼 독특하고 낯설었답니다. 근래에 읽은 책 뿐 아니라 한국 소설 아니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런 문장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 책 『아가미』의 문장도 상당히 독특합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장문(長文)과 복문(複文)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건 상당히 위험스러운 일일수도 있습니다. 잘 쓰면 리드미컬하고 완성도 높은 문장이 되지만 잘못하면 주술구조가 엉망이고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산만한 문장이 되지요. 문장이 길면, 그것도 복문이 계속 이어진다면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가 모호해지거나 형용사나 보어가 난무하게 되는 게 보통입니다. 저도 타인에게 퇴고를 받을 때 많이 지적당한 부분이라 그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단문(短文)을 구사하든 피나는 노력을 하든. 하지만 말처럼 쉽게 ‘노력만으로’ 쉬이 되는 일이 아닌지라 대부분 단문으로 바꾸는 쪽을 택하지요. 왜 그렇잖습니까. 말주변이 없는 사람들은 말을 짧게 함으로써 자신의 약점을 감추는 동시에 강렬해 보이려는 전략을 택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다른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등단이 그리 오래지 않은 작가가 문장이 이 정도로 길다는 건 작가의 기본 역량이 상당히 뛰어나거나 굉장히 세밀하게 퇴고에 퇴고를 거듭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점만으로도 합격점을 주었는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글의 관건은 단순히 장문(長文)과 복문(複文) 사용이 매끄럽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길이가 길고 주술구조가 반복되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리듬과 감각까지 살아있다는 것이지요. 저의 부족한 말솜씨로는 설명이 안 되니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데칼코마니처럼 한 쌍을 이룬 두 개의 상처는 각각 기다란 호를 그리고 있었으며 조각칼로 길을 낸 것처럼 오목하게 패어 보였다. 조금 어긋나게 덮은 뚜껑 같은 상처 사이로 한 올의 실만큼 드러난 진홍빛 살이 두근거리는 심장의 움직임처럼 일정한 리듬을 갖고 천천히 달싹거리다 잦아들었다. 이윽고 뚜껑이 잘 닫힌 모양이 되어 속살도 가지런히 덮이자 그 자리는 그저 붉은 금이 가 있는 정도로 보였다. (중략) 뚝뚝 듣는 물기를 뒤집어쓴 상처가 다시금 꽃잎이 열리듯, 콩껍질이 갈라지듯 살며시 벌어졌다. 석류 열매처럼 드러난 속살이 두근거리는 모습은 명백히 생명의 움직임이었다. 결코 아물어가는 상처가 억지로 쑤셔진 게 아니라, 희박한 산소를 찾아 호흡하려는 태곳적 기관의 발현이자 몸부림이었다.

정말이지 곤도 그런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만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살랑이는 물풀에 걸려 가동거리는 자디잔 은빛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가 얼마나 가냘픈지, 바위 뒤 그늘진 곳에 누군가가 산란해놓은 구슬 같은 젖빛 알 무더기는 얼마나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굴절된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지, 물고기들의 비늘은 얼마나 영롱한 색깔이며 만지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지, 또 어떤 물고기는 만져보면 얼마나 촉촉하고 부드러워며 점착성마저 있어서 손대는 순간 그대로 빨려들어 하나가 될 것만 같은지, 무엇보다도 말이 통하지 않는 물고기들과 자신의 서로의 살 한 번 닿기만 하면 얼마나 오묘한 직감으로 영력 내지는 신앙에 가까운 몸짓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그러자 곤은 한 마리의 생선이 되어 도마 위에서 토막 나지 않도록, 자신의 살과 내장에서 간유를 짜내고 그 찌꺼기가 어박과 어분으로 분리되어 어느 짐승의 입에 들어가지 않도록, 어딜 가든 감추는 데 급급해온 자신의 몸이 누구도 들려준 적 없던 그 말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

아, 죽이지 않습니까(아이고, 이런 문장을 읽고 이런 속된 표현을 쓰는 제가 부끄럽습니다만 이 말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비룡의 음식을 평가하는 심사위원단의 입속에서 벌어진 향연이 이런 것일까요. 아삭한 오이의 식감이 제대로 베여있고 밥알은 저들끼리 톡톡톡 튀어 오르며 트리플 악셀을 구사하고 입 안에서 도미가 춤추는 것 같은 것 말입니다(써놓고 보니 저는 대체 무슨 요리를 생각하며 비유한 것일까요, 오이로 만 도미초밥정도 될까요). 특히 이녕이 설명하는 마약의 여진(餘塵)과 환각의 표현은 얼마나 기가 막힌 지 작가가 꼭 약을 해 본 사람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라니까요. <레퀴엠>을 보고 대런 아로노프스키를 의심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아, 하지만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이런 식이라면 범죄사건을 다루는 영화나 책의 작가나 감독은 모두 연쇄살인범, 방화범, 강간범이며 법정소설을 쓰는 존 그리샴은 변호사이게요. 아, 존 그리샴은 전직 변호사였던가요, 흠. 어쨌든 이 책의 묘사는 그 정도로 리얼하게 다가옵니다. 할머니의 자개장을 만졌을 때의 그 껄끄러움과 매끄러움, 펄떡이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에 손댔을 때 펄쩍하던 그 꼬리의 유연함. 그런 것들을 퍼뜩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마치 제 살을 만지는 듯 생경한 촉각이 남아있습니다.

생각합니다. 이 아이에게 남아있는 것이 퇴화기관인 아가미가 아니라 날개였다면 어떨까요. 프랑수와 오종의 영화에 나오는 아기처럼. 그랬다면 그의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요.그럴지도 모릅니다. 사람 안에 존재하는 우물, 강, 호수 등의 표현은 늘 어둡고 낮고 더러운 곳의 이미지니까요. 죽기 위해 강으로 간다는 사람은 봤어도 죽으려고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곤이 떠도는 곳이 쓰레기가 버려지고 토사물이 흘러들어가고 물건을 잃어버리고 수초가 춤을 추는 지저분하고 질척한 강이 아니라 하늘로 붕 날아갈 수 있었다면 아이의 인생이 달라졌을까요.  날개는 상승의 이미지이고 아가미는 미처 사라지지 않은 퇴화의 흔적인가요. 그의 날개를 우연히 본 사람은 그를 숭배하게 되며 그렇게 본의 아닌 빛의 세계에 살게 될까요.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은 있어도 물고기맨은 없는 것도 그런 이유인걸까요. 생각해봅니다. 곤과 강하(江下), 해류(海流). 큰 물고기와 강의 하류, 물의 흐름. 이 상징적인 이름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강하는 강의 하류로 떠내려갈 운명이고 해류는 강의 움직임에 휩쓸려 곤이라는 물고기를 만나게 될 인연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이녕은 이녕(泥濘)이라는 한자를 가졌을까요. 이름이 운명을 좌우한다는 미신이라는 이야기를 곤이 했던가요. 작가는 그 미신을 의심하는 것일까요 믿는 것일까요.

물론 이 책에도 의아한 부분은 있습니다. 우선, 책의 페이지가 짧은데에 반해 곤에게 할애되는 부분이 너무 적습니다. 이 아이의 특별함은 조금 더 오래 비추어도 좋습니다. 매일 보는 석양이 지겨울 만도 하는데 우리는 매번 새삼스레 넋을 잃듯. 이 아이를 좀 더 오래 바라보고 싶었는데, 구성이 견고하지 못해 아이가 외곽으로 밀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게다가 곤의 아가미에 대한 일말의 설명이 없다는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년의 아가미가 자라나는 시점과 뭍으로 건져진 후의 이야기 등에 대해 지나치게 두루뭉술한 것이 아닌가 갸우뚱해봅니다. 하지만 이건 아까 말했다시피 제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독자가 ‘난 이 소년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갖는 불평일수도 있습니다. 허나 이 아이가 얼마나 특별한지 알기에 이 아이의 특수함을 특이함을 특별함에 대해 듣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군요. 때문에 전체적인 구성면이 아쉽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언제나 말하듯 단점이나 약점이 있다해도, 그것을 덮고도 남는 장점이나 강점이 있다면 문제 없습니다. 소설을 읽는 것은 영어듣기평가나 수질평가가 아니니까요. 장점과 단점은 동그라미, 엑스의 숫자나 테트리스처럼 합산점수가 아닌 무게에 달려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제 기준에서는- 아름다움으로 종결짓습니다. 저는 한글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다른 언어들을 배척하는 ‘최고’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로써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와 같은 한글을 배웠으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하는 이들을 만나면 부끄럽고 부럽고 화가 납니다. 아니, 그들도 결국 나와 같은 40개의 자모음으로 단어와 문장과 문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문장은 이토록 아름답고 무연한데 내 것은 이렇게나 조야하다니. 그렇게 혼자 투덜이 스머프처럼 중얼대다가 결국 그저 감사하고 아름답다고 탄복하고 맙니다. 제가 어쩌겠습니까,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를 두고.

참 이상하지요, 저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어쩐지 슬프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걸 두고 왜 슬픈 감정이 수반되는지, 아름답다는 감정과 감각은 대체 왜 사람을 서럽게 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비애의 감각까지 모두 합쳐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 더 아름다워지는 건가 생각합니다. 『아가미』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단단하고 유연한 언어의 골격도 언어 안에 담긴 강렬하고 모순된 감정까지도. 고와서 눈물 나고 아름다워서 슬퍼지는, 그런 감각으로 가슴이 뻐근해지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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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소리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진명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미시마 유키오를 만난 것은 『금각사』에서였다. (블로그에 어느 포스트에도 썼던 것 같지만) 이 글을 읽고 실로 오랜만에 두려움과 피로함에 눈가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더랬다. 선 밖의 것을 거부하는 듯한 광기, 금속성의 날선 감촉, 질린다 싶을 정도의 탐미주의, 헐떡이는 욕망과 무섭도록 유려한 문장. 그의 집요함과 음험함에 감탄스러웠고, 생경한 문장에 감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책이기도 했다. 그 뒤로 『비틀거리는 여인』과 『가면의 고백』등을 읽었지만 -정작 『금각사』와 함께 그의 대표작인『우국』은 아직 읽지 못했다- 이 남자를, 이 작가를 어떻게 판단해야하는지는 여전히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책, 『파도소리』만은 다르다. 얇은 문고본으로 되어 있는 작고 아담한 책은 겉모양만큼이나 소박하고 예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내용도, 필치도 읽기 쉽고 시원스럽고 소담한 풍경과 무엇보다도 사랑스럽다. 『파도소리』는 미시마 유키오의 책 중 -어쩌면 유일하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다.

『파도소리』의 스토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시원스럽고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작고 소박한 마을, 그 마을 유지의 아름다운 딸 하쓰에와 우직하고 과묵하고 성실한 소년 신지의 사랑 이야기. 몇몇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긴 하지만 결국에 두 사람의 사랑이 축복을 받는다는 뭐 그런 이야기. 애초에 작가가 ‘다프니스와 클로에’로부터 착상을 했다고 하니,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엔딩을 맞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견 뻔하고 단순한 이 이야기를 내가 사랑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전략)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로 좋아질 거야. 침묵해도 언제나 바른 것이 승리하게 마련이지. 테리 영감은 바보가 아냐. 그 양반이 바른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지 못할 리가 없지. 야스오는 내버려둬라. 바른 것이 강한 것이야.”

“신지의 어머니도 생활이 편치 않다고 들었는데, 뭐 어머니와 동생을 돌봐드려도 좋은 일이고, 얘기는 차츰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아무한테도 하지 않은 이야기야. (중략) 남자는 기력이야. 기력만 있으면 그만이야. 이 우타 섬의 남자가 되어서 그게 없으면 못써. 집안과 재력은 둘째 문제야. 그렇지 않은가, 등대장 부인. 신지는 기력을 갖고 있는 남자야,”

 

첫째는 작가가 묘사하는, 우타 섬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에 대한 감탄. 작고 폐쇄적이고 그만큼 정치적인(웃음) 이 마을은, 마치 화폐나 경제개념이 없었을 듯한 아주 옛적, 그러니까 묘하게 도태와 순리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바다에 대한 외경심과 경애로 살아가는 이들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순응하며 이겨나가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기상과 자신의 몸을 믿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되 그것을 최고치로 끌어가기 위한 정직함과 모험심 또한. 해가 뜨면 일찍 일어나 물가로 나가고, 해가 지면 신의 터전(바다)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온다. 등대의 소중함을 알고, 자신의 몸 하나로 기상과 이상(異常)을 감지할 수 있고, 자연이 준 것을 먹고 품고 기르며 산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줄 알 것이라는 선장의 단언과 재산이나 집안보다 기력이 먼저라고 호탕하게 말하는 하쓰에의 아버지(이래뵈도 그는 이 섬의 최고 지주다). 나는 선량하면서도 단순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명했다. 특히 그것은 남자주인공인 신지에 이르러 절정을 달한다. 햇빛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와 새하얗고 고른 치열, 진돗개나 시바견을 떠올리게 하는 까맣고 정직한 눈. 소년다운 부끄러움과 장남다운 의젓함과 풋사랑을 하는 설렘과 바다사람 특유의 우직함과 성실함. 신지에게는 농을 치는 재치와 세련됨이나 유들함 같은 것은 없지만 대신에 자신의 가족을 아낄 줄 알고,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려는 용기가 있다. 바다를 두려워하지만 그것에 설레하며, 유창한 화술은 없지만 진심을 고하는 선량함과 정직함이 있다. 마치 인간이 존재하기도 전, 진정한 태고(太古)적을 떠오르게 하는 무연함과 선함이 존재하는 맑은 소년이다.

첫 번째가 우타 섬 사람들의 성향과 신지의 매력이었다면, 두 번째는 작가가 묘사하는 풍광의 담대함과 섬세함이다. 귓가를 스치는 듯한 파도소리와 해변가 특유의 물비린내, 소년이 바라보던 햇살의 찬란함과 일출과 일몰이 다르게 느껴지는 해의 농도. 산지가 두려워하던 그러나 끝내 그 안에 몸을 담근 자신을 알게 했던 그 날의 파도의 거친 소음과 태동. 배 위에서 바라보던 바다와 물가에서 마음에 담던 바다와의 간극 등. 자연을 세밀하게 묘사한 부드럽고도 매끄러운 시선이 이 작은 문고본을 등대의 미명처럼 밝혀준다.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삶과 애정의 무게만큼이나 자연과 그 안쪽을 들여다본 글일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하게 된다. 

 

신지는 둥근 창문으로 태풍이 지나간 후에 찾아오는 쾌청한 푸른 하늘과 아열대의 태양이 내리비치는 붉은 민둥산의 풍광,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스럽게 반짝이는 바다를 보았다.  

신지는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그 하얀 배에 대해 느끼던 미지의 그늘을 떨쳐버릴 수 있어다. 그러나 미지보다 더 마음을 붙잡은 것은 늦여름 저녁에 긴 연기를 뿜으며 멀어져가던 흰 화물선의 형태였다. 신지는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겼던 그 무거운 구명줄을 손바닥에 되새겨보았다. 일찍이 멀리서 바라보던 그 ‘미지’를 단 한 번 손바닥으로 만져본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언제나 만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지는 어린애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이미 저녁놀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 동쪽 바다를 향해 다섯 손가락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들여다보았다.

 

물론 문장 역시 여전히 아름답다. 파랗고 시원스러운 풍경에 어울린 미시마 유키오의 유려한 문체는 그 어느 바다의 쾌청함과 인간의 청아함보다 아름답다.  

 

그러나 희망이 도리어 괴로움이 되어버리는 사랑의 불가사의가 그에게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신지는 있는 힘을 다해 헤엄쳤다. 거대한 괴물은 조금씩 무릎을 꿇고 물러가며 길을 열었다. 단단한 암반이 착암기에 뚤려가듯이. 

신지는 시계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시계가 필요 없다. 대신 그는 낮이나 밤이나 시간을 본능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다. 예컨대 별이 이동한다. 그 별의 이동을 정밀하게 측정하지 않아도 밤하늘의 커다란 궁륭이 순환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자연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주 작은 단서라 할지라도 그는 그 단서로부터 자연의 정확한 질서를 읽어낼 수 있었다.

『파도소리』는 담소한 풍경과 선량한 인물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식의 <다프니스와 클로에이야기>일지도 모른다.

 



* 마르크 샤갈 <다프니스와 클로에>연작 중 / 윌리엄 터너 <바다의 어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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