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 아, 오늘은 목 상태가 양호하군요. 다행입니다. 오늘 쓴 리뷰는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하고 싶었거든요. 뭐랄까, 책을 읽은 후 영화를 본 후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하며 정리하듯이 ‘쓰고’ 싶을 때가 있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혹은 얼굴을 보며 만나 신나게 조근조근 '말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오늘은 강력하게 후자의 방법이 끌리는 것이죠, 아니 이 책이 그런 책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비록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는 아니어도 쇠구슬은 구르지 않도록 노력함을 약속하며, 시작하겠습니다.

어제는 물비린내가 다 가시지 않은 비의 끝자락 기운이 남아있는 날이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실내에 가만히 앉아 토록 톡 두둑 하는 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게 있는 것만큼 사람을 나른하고 기묘하게 만드는 일이 또 있을까요. 아아, 커피 한 잔이라도 함께 한다면 조금 더 운치 있는 그림이 완성 될 것도 같군요. 비 오는 날은 참 신기합니다. 소리의 파장은 멀리 가지 않지만 그 작은 파동을 벌충하듯 후각이 대단히 예민해지는 날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비가 내리는 날에는 ‘물비린내 자욱한’이라고 제목을 붙이곤 합니다. ‘물비린내’라는 말을 종종 쓰고 그 말의 오묘한 어감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 냄새도 아니고 그냥 비린내도 아닌, 물비린내가 당최 무슨 말이냐고요? 글쎄요, 물 냄새인데 묘하게 비리고 그런데 때론 그립거나 아득하거나 불쾌해지는 그런 ‘감각’에 가까운 것인데 그것을 ‘물비린내’ 라는 말 외에 어떤 단어로 표현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그러면 -물론 동의하시지 않을지도 모릅니다만-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물비린내는 의외로 다양하고 많은 곳에서 풍깁니다. 비 오는 날의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냄새, 흙과 섞인 따끈한 진흙냄새, 물고기 특히 민물고기의 비늘의 냄새, 목욕탕과 페트병에 찌꺼기처럼 남은 냄새, 호수와 강가에서 나는 질척한 냄새 등. 정말 다양하죠. 재밌는 점은 도시에서 가장 쉽게 많은 양의 물을 목격할 수 있는 수영장에서는 그 냄새가 나지 않아요. 염소와 락스 냄새에 묻힌 덕분에 가장 청결한 장소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가장 인공적인 장소이겠지요. 이런, ‘물비린내’에 대해 설명하다보니 예상보다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하지만 그리 쓸데없는 이야기만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인상 쓰지는 마세요.

제가 이야기 하려 했던 것은 어제가 바로 이 책을 읽기에 최적의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햇빛 맑은 날이든,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든, 황사바람이든 뭐든 부는 날이라도 책의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감탄할 문장과 의아한 단점과 흡인력과 묘사는 변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책의 내용과 외부 상황 그리고 마음의 문제가 딱딱 맞아 떨어졌을 때 느끼는 그 쾌감의 배가는 여러분도 잘 아시죠. 그런 면에서 어제는 ‘마침맞은’ 날이 아닐 수 없던 거라지요. 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물기 젖은 날씨와 구병모 작가의 『아가미』. 캬, 듣기만 해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오오, 나는 왜 하필 맞게 오늘 이 책을 읽어서 하필이면 나를 이렇게 흥분시키는가. 우산을 한쪽 손에 꿰차고 중얼거리며 걸어오자 건너편에서 걸어오던 이가 힐끗 저를 쳐다보더니 조금 떨어져 걷는 게 아니겠습니까. 머리에 꽃만 안 꽂았을 뿐, 역시 비 오는 날에는 독특한 마인드의 소유자들이 돋보이는군.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저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 물비린내가 진동하는 책이거든요. 그 이유가 단순히 아가미가 달린 소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허허, 그렇게 일차적인 이유이자 감각은 아니에요.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생의 밑바닥을 더듬거리는 처절하고 강렬한 아귀의 손바닥과 그 손바닥을 만졌을 때 느끼는 까슬까슬함과 호숫가의 밑바닥을 바라보던 때 느끼는 깊이 없는 아득함과 떨림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감각들이 반딱반딱 빛을 내며 말캉하며 축축하고 벼린 물비린내를 피어오르게 하는, 그런 책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엄청나게 많고 실제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 책은 사실 뭐가 좋다 나쁘다 괜찮다 아쉽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동물이에요, 생물입니다. 피부이며 감촉이며 기관이에요. 우리가 신체 기관을 두고 “나는 장이 좋고 위는 좀 싫어. 폐는 모양이 흉측한데 맹장은 참 예쁘게 생겼더라. 이걸 언젠가 떼어낼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 책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를 이렇게 흥분하게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고백합니다, 그것이 이 리뷰를 쓰는 이유이자 여러분에 대한 최선의 예의일 테니까요.

최근에 제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독특한 문장을 가진 것은 황정은 작가의 『百의 그림자』였습니다. 독특했습니다, 정말 독특해요. 개성이라는 말 외에 표현이 불가할 만큼 독특하고 낯설었답니다. 근래에 읽은 책 뿐 아니라 한국 소설 아니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런 문장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 책 『아가미』의 문장도 상당히 독특합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장문(長文)과 복문(複文)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건 상당히 위험스러운 일일수도 있습니다. 잘 쓰면 리드미컬하고 완성도 높은 문장이 되지만 잘못하면 주술구조가 엉망이고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산만한 문장이 되지요. 문장이 길면, 그것도 복문이 계속 이어진다면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가 모호해지거나 형용사나 보어가 난무하게 되는 게 보통입니다. 저도 타인에게 퇴고를 받을 때 많이 지적당한 부분이라 그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단문(短文)을 구사하든 피나는 노력을 하든. 하지만 말처럼 쉽게 ‘노력만으로’ 쉬이 되는 일이 아닌지라 대부분 단문으로 바꾸는 쪽을 택하지요. 왜 그렇잖습니까. 말주변이 없는 사람들은 말을 짧게 함으로써 자신의 약점을 감추는 동시에 강렬해 보이려는 전략을 택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다른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등단이 그리 오래지 않은 작가가 문장이 이 정도로 길다는 건 작가의 기본 역량이 상당히 뛰어나거나 굉장히 세밀하게 퇴고에 퇴고를 거듭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점만으로도 합격점을 주었는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글의 관건은 단순히 장문(長文)과 복문(複文) 사용이 매끄럽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길이가 길고 주술구조가 반복되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리듬과 감각까지 살아있다는 것이지요. 저의 부족한 말솜씨로는 설명이 안 되니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데칼코마니처럼 한 쌍을 이룬 두 개의 상처는 각각 기다란 호를 그리고 있었으며 조각칼로 길을 낸 것처럼 오목하게 패어 보였다. 조금 어긋나게 덮은 뚜껑 같은 상처 사이로 한 올의 실만큼 드러난 진홍빛 살이 두근거리는 심장의 움직임처럼 일정한 리듬을 갖고 천천히 달싹거리다 잦아들었다. 이윽고 뚜껑이 잘 닫힌 모양이 되어 속살도 가지런히 덮이자 그 자리는 그저 붉은 금이 가 있는 정도로 보였다. (중략) 뚝뚝 듣는 물기를 뒤집어쓴 상처가 다시금 꽃잎이 열리듯, 콩껍질이 갈라지듯 살며시 벌어졌다. 석류 열매처럼 드러난 속살이 두근거리는 모습은 명백히 생명의 움직임이었다. 결코 아물어가는 상처가 억지로 쑤셔진 게 아니라, 희박한 산소를 찾아 호흡하려는 태곳적 기관의 발현이자 몸부림이었다.

정말이지 곤도 그런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만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살랑이는 물풀에 걸려 가동거리는 자디잔 은빛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가 얼마나 가냘픈지, 바위 뒤 그늘진 곳에 누군가가 산란해놓은 구슬 같은 젖빛 알 무더기는 얼마나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굴절된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지, 물고기들의 비늘은 얼마나 영롱한 색깔이며 만지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지, 또 어떤 물고기는 만져보면 얼마나 촉촉하고 부드러워며 점착성마저 있어서 손대는 순간 그대로 빨려들어 하나가 될 것만 같은지, 무엇보다도 말이 통하지 않는 물고기들과 자신의 서로의 살 한 번 닿기만 하면 얼마나 오묘한 직감으로 영력 내지는 신앙에 가까운 몸짓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그러자 곤은 한 마리의 생선이 되어 도마 위에서 토막 나지 않도록, 자신의 살과 내장에서 간유를 짜내고 그 찌꺼기가 어박과 어분으로 분리되어 어느 짐승의 입에 들어가지 않도록, 어딜 가든 감추는 데 급급해온 자신의 몸이 누구도 들려준 적 없던 그 말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

아, 죽이지 않습니까(아이고, 이런 문장을 읽고 이런 속된 표현을 쓰는 제가 부끄럽습니다만 이 말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비룡의 음식을 평가하는 심사위원단의 입속에서 벌어진 향연이 이런 것일까요. 아삭한 오이의 식감이 제대로 베여있고 밥알은 저들끼리 톡톡톡 튀어 오르며 트리플 악셀을 구사하고 입 안에서 도미가 춤추는 것 같은 것 말입니다(써놓고 보니 저는 대체 무슨 요리를 생각하며 비유한 것일까요, 오이로 만 도미초밥정도 될까요). 특히 이녕이 설명하는 마약의 여진(餘塵)과 환각의 표현은 얼마나 기가 막힌 지 작가가 꼭 약을 해 본 사람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라니까요. <레퀴엠>을 보고 대런 아로노프스키를 의심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아, 하지만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이런 식이라면 범죄사건을 다루는 영화나 책의 작가나 감독은 모두 연쇄살인범, 방화범, 강간범이며 법정소설을 쓰는 존 그리샴은 변호사이게요. 아, 존 그리샴은 전직 변호사였던가요, 흠. 어쨌든 이 책의 묘사는 그 정도로 리얼하게 다가옵니다. 할머니의 자개장을 만졌을 때의 그 껄끄러움과 매끄러움, 펄떡이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에 손댔을 때 펄쩍하던 그 꼬리의 유연함. 그런 것들을 퍼뜩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마치 제 살을 만지는 듯 생경한 촉각이 남아있습니다.

생각합니다. 이 아이에게 남아있는 것이 퇴화기관인 아가미가 아니라 날개였다면 어떨까요. 프랑수와 오종의 영화에 나오는 아기처럼. 그랬다면 그의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요.그럴지도 모릅니다. 사람 안에 존재하는 우물, 강, 호수 등의 표현은 늘 어둡고 낮고 더러운 곳의 이미지니까요. 죽기 위해 강으로 간다는 사람은 봤어도 죽으려고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곤이 떠도는 곳이 쓰레기가 버려지고 토사물이 흘러들어가고 물건을 잃어버리고 수초가 춤을 추는 지저분하고 질척한 강이 아니라 하늘로 붕 날아갈 수 있었다면 아이의 인생이 달라졌을까요.  날개는 상승의 이미지이고 아가미는 미처 사라지지 않은 퇴화의 흔적인가요. 그의 날개를 우연히 본 사람은 그를 숭배하게 되며 그렇게 본의 아닌 빛의 세계에 살게 될까요.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은 있어도 물고기맨은 없는 것도 그런 이유인걸까요. 생각해봅니다. 곤과 강하(江下), 해류(海流). 큰 물고기와 강의 하류, 물의 흐름. 이 상징적인 이름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강하는 강의 하류로 떠내려갈 운명이고 해류는 강의 움직임에 휩쓸려 곤이라는 물고기를 만나게 될 인연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이녕은 이녕(泥濘)이라는 한자를 가졌을까요. 이름이 운명을 좌우한다는 미신이라는 이야기를 곤이 했던가요. 작가는 그 미신을 의심하는 것일까요 믿는 것일까요.

물론 이 책에도 의아한 부분은 있습니다. 우선, 책의 페이지가 짧은데에 반해 곤에게 할애되는 부분이 너무 적습니다. 이 아이의 특별함은 조금 더 오래 비추어도 좋습니다. 매일 보는 석양이 지겨울 만도 하는데 우리는 매번 새삼스레 넋을 잃듯. 이 아이를 좀 더 오래 바라보고 싶었는데, 구성이 견고하지 못해 아이가 외곽으로 밀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게다가 곤의 아가미에 대한 일말의 설명이 없다는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년의 아가미가 자라나는 시점과 뭍으로 건져진 후의 이야기 등에 대해 지나치게 두루뭉술한 것이 아닌가 갸우뚱해봅니다. 하지만 이건 아까 말했다시피 제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독자가 ‘난 이 소년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갖는 불평일수도 있습니다. 허나 이 아이가 얼마나 특별한지 알기에 이 아이의 특수함을 특이함을 특별함에 대해 듣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군요. 때문에 전체적인 구성면이 아쉽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언제나 말하듯 단점이나 약점이 있다해도, 그것을 덮고도 남는 장점이나 강점이 있다면 문제 없습니다. 소설을 읽는 것은 영어듣기평가나 수질평가가 아니니까요. 장점과 단점은 동그라미, 엑스의 숫자나 테트리스처럼 합산점수가 아닌 무게에 달려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제 기준에서는- 아름다움으로 종결짓습니다. 저는 한글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다른 언어들을 배척하는 ‘최고’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로써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와 같은 한글을 배웠으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하는 이들을 만나면 부끄럽고 부럽고 화가 납니다. 아니, 그들도 결국 나와 같은 40개의 자모음으로 단어와 문장과 문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문장은 이토록 아름답고 무연한데 내 것은 이렇게나 조야하다니. 그렇게 혼자 투덜이 스머프처럼 중얼대다가 결국 그저 감사하고 아름답다고 탄복하고 맙니다. 제가 어쩌겠습니까,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를 두고.

참 이상하지요, 저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어쩐지 슬프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걸 두고 왜 슬픈 감정이 수반되는지, 아름답다는 감정과 감각은 대체 왜 사람을 서럽게 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비애의 감각까지 모두 합쳐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 더 아름다워지는 건가 생각합니다. 『아가미』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단단하고 유연한 언어의 골격도 언어 안에 담긴 강렬하고 모순된 감정까지도. 고와서 눈물 나고 아름다워서 슬퍼지는, 그런 감각으로 가슴이 뻐근해지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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