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단단한 하드커버와 많지 않은 페이지, 예쁘지만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여인의 얼굴. 헝가리의 대문호라는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난 책인데 신기하게도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책 속에 고개를 파묻고 마음껏 활자 냄새를 들이키며 도서관 한 구석에 앉아 -일명 나만의 자리- 책을 읽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아, 이것이 바로 거장의 문장, 그의 숨결이구나. 초의 미세한 떨림, 커튼의 흐느낌, 깊은 호수의 잔잔한 파동, 은식기와 촛대의 우아함, 겨울 별장의 나무 냄새와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담담하고 차분한 말투, 그렇지만 어딘지 고압적이기도 하고 여유롭기도 한 목소리. 마치 억겁의 시간들을 지나 온 사람, 그야말로 견고하고 부드러움을 가진 노인이 보내는 시선의 온도가 느껴졌다. 책장을 덮고 이곳이 도서관이라는 것에 안도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니 하마터면 이 책을 훔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갖고 싶은 문장, 탐이 나는 책, 세상의 이 책을 모두 없애고 나만이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글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것이 마라이와의 시작이다.  

그의 글은 마치 고성(古城)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 한 때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부인과 점잖고 부드러운 신사가 살던 곳. 그런 곳의 붉은 벨벳 의자에 앉아 둔탁하고 세심한 나무 결들을 쓰다듬는 순간이랄까, 다락방에 숨겨둔 먼지 낀 하얀 천 뒤에 숨은 여인의 그림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니면 코안경을 낀 백발 노인의 서재에서 부드러운 빛을 맡으며 책을 만지는 느낌이랄까. 마라이의 글은 언제나 이런 곳을 떠도는 듯한 백일몽에 시달리게 한다. 그는 고루하고 먼지 냄새 나는 ‘이미’ 지나 버린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달라고 애쓰며 말하지 않는다. 특별한 척하며 어른인 걸 잔뜩 티내며 그럴듯하게 굴지도 않는다. 애써 이해하거나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고, 복잡한 이야기를 진리인 척 하지도 않는다. 거창한 스토리텔링이나 복잡한 플롯, 다각적인 인물들도 물론 그가 만들어낸 세상과 무관하다.

그는 그저 애정과 배려, 관심을 담은 눈으로 우리의 시간을 목격하고,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다. 무연하고 단단한 표정으로, 수많은 함의와 상처를 안은 채. 강하기 때문에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상처를 알기 때문에 부드러울 수 있는 마음으로. 그래서일까. 마라이의 글을 읽다보면 안도감과 뭉클함 같은 것이 혼종된 것 같은 오묘한 기분이 든다. 우리가 그토록 모질게 살지는 않았다는 것,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누군가 긍정한다는 것에 위안 받고 인간의 연약함에 구원받는다.

너 혹시, 다만 의미가 없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 그렇지도 않아.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일들이 있어. 아까 시내를 지나 이곳으로 오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라. 그것은 정말 거짓 없는 순수한 기쁨이었어. 전에는 다른 할 일이 있었고, 다른 데 정신이 쏠려서 세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그러다 그 사람을 잃어버렸고 그 대신 세상을 얻었어. 손해 보는 거래였다는 뜻이니? 나는 잘 모르겠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전략) 어제만 해도 복수나 구원을 갈구하고 그가 절실하게 사람을 필요로 하거나 전화를 걸어오거나, 감옥에 수감되어 처형되기를 바랬는데. 그런 감정을 느끼는 동안에 상대방은 멀리서 즐거워 할 수 있어. 너를 여전히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야. 복수심은 곧 그리움과 구속을 의미하기 때문이지.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하며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날이 온단다. 거리에서 그 사람과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아. 그 사람이 전화를 걸면 예의바르게 대꾸를 하고 그 사람이 만나고 싶어 하거나 만날 수 밖에 없으면 만나는 거야. 굳이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거든.(중략) 이제는 복수를 원하지 않아, 정말이야. 진정한 복수, 유일한 완벽한 복수는 그 사람에게서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단다. 그 사람이 이제는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랄 일도 없는거지.

이별을 당하고 (혹은 결행하고)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상처냈었던가. 과거를 희석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수정해야만 했는가. 마라이의 어떤 글을 읽었을 때 나는 누군가와의 이별에 라벨을 붙여가는 단계에 있었다. 좌절과 분노와 이성의 단계를 지나 나의 잘못과 그 사람의 잘못을 구별할 수 있었고, 자신의 나약함과 허기와 어두움에 질려있기도 했다. 그 사람의 괴로움을 위해 마치 악마처럼 집착하고, 그의 행복함을 순교자처럼 바라던 시간조차도 끝나 있던 시간. 잊어버린 척 털어내거나 기뻐하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지친 상태였다. 어느 순간에야 문득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는 순간 그가 나의 삶에서 온전하게 빠져나갔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길고 축축한 끝나지 않을 터널을 지나는 것만 같았는데. 그 터널의 끝은 광희라고 생각했건만 기억나지도 않는 틈에 빠져나와 이미 빛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다. 아, 인생의 어느 한 시간이 역사가 되어 끝나 있었다. 앨범에 년도를 매기듯 사진에 제목을 붙이듯 시간의 현재형은 사라지고 끝장조차 이미 넘어가있었다.

엄청난 쾌감과 안도감을 즐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씁쓸함에 떨었던 것 같다. 마이너스적인 생각을 할 때가 차라리 나았을까, 그때는 애정이나 연민이나 하다못해 원망이라도 들어있었을텐데. 이제는 무색 무취의 투명한 병 속에 시간이 봉인되었다. 한 때는 가장 가까웠던 어떤 이가 이제는 그저 A나 S등의 이니셜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 말끔함에 놀랐다.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제 어느 곳에서도 그때의 그 아름다움을 지닐 수 없기에. 허망함에 웃었고 쓸쓸했다.

일롱카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때의 내가, 아니 우리 모두의 '그 때'가 떠오른다. 페터와 관련된 시간들이 박제된 생물처럼 그녀 인생에 전시되었을 때, 페터와 그녀의 행복이 서로 조금도 이어져 있지 않음을 깨달을 때, 일롱카는 세상의 빛을 다시 발견했을까. 그녀는 사실과 감정을 얼마만큼 잘 구분했던 것인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광기는 그 순간의 그들의 세계관이 ‘그와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다는 데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광기는 종종 상대에 대한 미화와 자기연민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말이다. 페터의 모습을 바라보며 화장을 다듬는 그녀, 악어 가죽 지갑을 그저 ‘물건’이 아닌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일롱카의 모습을 두고 의구심과 연민으로 마음이 싸늘하다.

그래서인지 일롱카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페터에 대한 거부감으로 배가시켜 책장을 넘겨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는  예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일롱카의 시각처럼 그는 무뚝뚝하고 낯설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그토록 무자비하고 냉담한 가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상대의, 때로는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은 -상대가 그 사랑을 받을 마음이 있건 없건을 떠나서- 늘 고독하다는 것 또한. 페터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며,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가 사랑한 여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야기는 하권으로 넘어간다.

 

 


* 하권의 리뷰를 이어서 올리기 위해 (무려) 작년에 쓴; 글을 일부 수정해 재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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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9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0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8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봄, shining님의 추천 책, 음악은 모두 성공이었기 땜에, 이 책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Shining 2011-08-01 14:55   좋아요 0 | URL
그렇게 말씀하시면 다소 부담스럽지만(우물우물;) 이 책만은 자신있게 추천합니다(으쓱으쓱). 산도르 마라이니까요_-* 『열정』과 함께 그의 글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이에요, 개인적으로는 하권보다는 상권이 좋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