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변화 - 하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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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롱카가 사랑한 남자, 그녀의 전남편 페터는 ‘시민’에 대한 강박증을 갖고 사는 남자다. 평생을 스스로의 기준과 엄격한 규율로 마치 자신을 타인처럼 대하고 다루며 살아온 남자. 아마 칸트처럼 일과가 늘 완벽하게 짜여진 남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폭풍이 휘몰아친다. 감정의, 자멸의, 스스로를 기꺼이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종의 광기의 바람이.

광기에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법일세.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광기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네. 그런 감정의 폭풍우에 휩쓸려보지 않고 그런 지진에 의해 토대가 흔들려보지 않은 삶, 지금까지 오성과 예의범절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유지된 모든 것을 울부짖으며 내동댕이치고 지붕 위의 기왓장을 날려버리는 돌풍에 휘말려보지 않은 삶, 그런 삶은 초라할 걸세. 바로 그런 광기가 내 인생을 덮친 게야.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너울거림을 인정한다. 자신의 비겁함과 불안까지도.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과 아내에 대한 연민과 불운함, 그리고 그녀를 선택함으로써 처하게 될 모든 상황을 충분히 인지한다. 담담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이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가 참으로 가엾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일롱카의 관점에서 읽을 때는 냉혈한에 비겁하고 무책임한 -심지어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남자라며 페터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는) 친구가 되어 음조의 변화도 없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런, 그는 그저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희망을 원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런데 불현듯 얼마간의 준비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오직 자신만을 향한 다가오는 바람, 토네이도처럼 무시무시한 돌풍. 사랑의 광기라는 재앙 앞에 그는 내진설계조차 되지 않은 건축물에 지나지 않았다. 사랑을 할 준비는 물론 받을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약하기 짝이 없는 구조물.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떤 건축물도 토네이도를 막을 수는 없으니. 그는 도망치고 부인하고 두려워하다 결국 유디트에게로 뛰어든다. 아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를 흡수하고 만다.

그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개인으로서 나라는 인물이나 내 사회적인 위치나 남성으로서의 인간적인 특성이 아니었네. 나는 그녀한테 모든 행복과 불행을 의미하는 수수께끼 같은 기호로 가득 찬 비밀문서 같은 존재였네. 그녀는 나와 같은 상태에 이르길 일평생 갈구했어. (중략) 유디트는 서서히 나라는 사람을 깊이 알게 되면서, 내가 자신이 ‘바라던 초록색’이 아니라고 느꼈네. 오랜 세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려 하지 않았던 거야. 사람들은 대부분 갈구하는 것,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절대로 인간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하지 않네. 우리가 함께 살면서부터 우리의 지난 세월을 열병처럼 뒤덮었던 견디기 어려운 긴장은 사라지고 없었어. 우리는 서로에게 단순히 남자와 여자, 신체적인 약점과 일상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도 그녀는 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나를 원했네. 내가 성직자나 다른 세상에서 온 숭고한 존재이길 바랐어. 그러나 나는 다만 희망을 버리지 않은 외로운 인간에 지나지 않았지.  

이보게, 나는 기적을 믿었네. 어떤 기적을 바랐냐는 뜻인가? 그저 사랑이 초인간적인 신비스러운 영원한 힘으로 외로움을 덜어주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고 사회와 이름, 재산, 과거와 추억이 우리 사이에 쌓아 올린 인위적인 벽을 허물어주길 바랐네. 나는 마치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딘가에 아직 온정과 동정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은밀히 힘차게 심어줄 손을 찾는 사람 같았어.

일롱카의 이야기가 멜로드라마의 서사였다면 페터는 부르주아적 자질과 강박, 인간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 알았다. 그리고 무엇을 두려웠했는지도 알았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추문의 대상, 호기심 어린 시선의 응담함을 알았다. 페터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바꾸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정열적인 애인이나 헌신적인 아내 등이 아니라 자신을 관찰하며 조소하는 정념(情念)의 상대뿐이다. 그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도 지속되지도 못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자신을 먹이로 던지며 많은 것을 바꾸거나 포기했지만 유디트는 돈을 가져갔고 넘을 수 없는 간극을 제시했으며 자존심을 훔쳐갔다. 유디트의 시선과 그 안에 담긴 함의(含意)와 감정을 읽어내며 견뎠다. 그리고 한참을 더 바라보다 끝을 선고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우아했다.

페터는 제일 낭만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사랑을 했다. 희망을 희구하는 것, 상대방에게 구원을 바라는 것, 그것이 가장 나쁘다. 가장 비현실적인 동시에 가장 자학적이다. 사랑이 사랑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실상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내 남편에게서는 파슬리 냄새가 나지 않았어. 나는 눈물 글썽한 두 눈을 감은 채 그 사람의 냄새를 맡고 전율했어. 그 사람에게서는 건초 냄새가 났어. 우리가 이혼하던 날처럼. 내가 처음으로 그 사람 침대에 누워서 씁쓸한 건초 냄새 때문에 메슥거렸던 그날 밤처럼. 그 인간은 그때도 변함이 없었어. 몸도 의복도 냄새도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똑같더라고.

유디트는 페터의 그 점을 원했고 증오했다. 마치 어디선가 배워온 것 같은 그 미소를 볼 때마다 목을 조르고 싶었다는 그녀.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솔직했다. 그래서 그녀는 페터를 소유함으로써 페터가 포함 된 세계를 가지기러 결심했다.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 그들은 태어나면서 갖고 있었던 것들을. 결국 페터와 신분을 함께 갖게 되나 그녀는 조금도 만족할 수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오랫동안 동경했던 것에 마침내 닿게 되면 사람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기 마련이다. 믿기지 않을만큼 큰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오르거나 그것을 경멸하게 되거나. 밑에서 올려다보며 동경하던 것에 닿았다는 것은 내가 올라갔거나 상대가 내려왔다는 말이니까. 자신의 상승을 깨달을 때는 그것이 한없이 고귀해보이지만 그것이 자신에게로 내려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은 그를 혐오한다. 유디트는 허무해진다. 조소하며 비소한다. 막연하게 깨닫는다. 자신이 그의 침대를 차지하고 부인이 되고 마음껏 집을 휘젓고 다닌다 해도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 해도. 자신은 여전히 그의 부인이나 애인이 아닌 하녀로써 스스로를 느낀다는 것을.

자격자심이란 말은 없는 자들의 사전에만 등재되어 있다. 부자의 장점은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 말처럼 진짜 부자들은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고 때문에 자신이 무얼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뺏긴다’와 ‘잃는다’는 애초에 갖지 않은 것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정말 없는 사람들은 뼛속까지 배인 열패감과 분노, 조바심을 감추지 못한다. 혹여 훗날 돈이나 명예, 지위를 갖게 된다하더라도 그들의 태도에서는 프롤레탈리아 특유의 기질이 드러난다. 아니, 오히려 바로 그 때 그들은 뼈저리게 깨닫는다. 귀족의 옷을 입을수록 자신은 -타고난- 귀족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런 면에서 페터는 진정한 부르주아다. 그의 복제한 듯한 미소, 비슷한 수 십 벌의 양복, 감정을 배제한 화법,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과 가히 우아하다고 할 수 있는 관대함이 얼마나 유디트를 애타게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차라리 페터가 화를 내고 으르릉거리며 그녀를 원망했다면, 단 한 번이라도 그녀와 다투기라도 했다면 유디트는 그를 떠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기꺼이 사랑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무심한 자와 싸우느니 적개심을 가진 자와 싸우는 것이 낫다는 걸 알고 있지 않는가. 단단하고 한결같은 벽과 부딪히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그 벽을 조금도 상처 낼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상처받았다.

그래서 유디트가 페터를 안았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자신이 그 냄새를 그리워했다는 것과 그만큼 증오한다는 것을. 그 냄새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뀌지 않는 페터의 부르주아적 기질을 상징하며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근성을 확인시킨다. 절대로 이해할 수도 합일될 수도 없는 깊은 격차의 강물 같은 것이 바로 그 ‘냄새’ 안에 담겨있다. 전쟁 통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페터를 어떻게 그녀가 사랑할 수 있을까.

고백컨대 나는 유디트 알도조를 뇌쇄적인 아름다움과 치명적인 파괴력을 가진 팜므파탈의 전형이라고 상상했다(변명하자면 이름도 유디트라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려 상처입은 여자일 뿐이었다(그래서 새 애인에게 자산을 탕진하듯 자학적으로 모든 걸 내주는 것이 아닐까, 페터의 물건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신에게 그런 시기가 있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하긴 일롱카는 연약하고 우아한 귀부인으로 페터는 지독한 냉혈한으로 공상하며 읽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의 사념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페터 자신과 주위의 시선은 물론, 일롱카의 페터와 유디트의 페터도 닮지 않았다.

문득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깨닫는다. 모든 사랑은 일반화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때문에 세상에 사랑보다 더 이기적이고 도취적인 감정은 없다는 것을. 같은 이유로 어떤 사랑도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아는 나 자신이 세상에 하나 뿐이듯 내가 아는 그(또는 그녀)도 단 한 명 뿐일테니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라고 말한 알랭 드 보통의 말은 얼마나 탁월한지. 결국 그들은 서로를 관찰할 뿐이다.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상대의 투과상을 비출 뿐이다. 그리고 주변인에게 말한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으로. 일롱카는 페터를 페터는 유디트를 유디트는 페터와 세자르를(세자르란 인물은 작가의 페르소나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의 모호성과 사상도. 그는 이들 셋 모두와 닿은 동시에 아무와도 닮지 않았다). 사랑도 다른 것들처럼 마지막이 답이 된다. 결국 헤어졌잖아, 라는 말 앞에서는 그간의 어떤 아름답고 고결한 추억도 모두 그저 그런 것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풍화되고 희석된 후 남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 방식을 취하며 누군가의 사랑을 희구하며 살고 있는가.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제목이 ‘사랑의 변화’ 나 ‘결혼’이 아닌 ‘결혼의 변화’인 이유를 확실히 깨닫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대화의 시기가 서로 어긋나있어 지금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페터가 말하는 시점에 유디트는 어디에 있었을까, 일롱카는 여행을 떠났을까 그 때는 친구에게 어떤 말을 할까. 유디트가 말하는 시점에 일롱카는 이미 죽었다고 했는데 페터는 어떨까. 그는 미국으로 갔을까. 일롱카가 죽은 것, 유디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까. 숨겨진 인물들이 지금은 어느 공간에서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상상하고 예상하게 만든다.

새삼 작가의 위엄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고 만다. 마치 빙의되기라도 하듯 세 사람의 목소리는 제각각인데 모두가 굉장한 설득력을 담고 있지 않은가. 일롱카에게서는 처절하기까지 한 안타까운 구애의 목소리가 들리고, 페터에게서는 두려움이 묻은 냉정함, 근본적인 외로움과 현재에 대한 따가움이 느껴지고 유디트에게서는 계급의 차이가 느껴진다. 페터의 가족에 대한 묘사, 이해할 수 없는 거리감과 따라할 수 없는 초연함에는 분명한 계급(계층이 아닌)의 차이가 느껴진다. 그리고 곳곳이 숨어있는 망각과 시대와 현실과 전쟁. 이런, 산도르 마라이의 글은 여전하다. 저도 모르게 삶의 정수를 관통해 온 사람, 너무 많은 것을 겪고 알아온 노인의 목소리. 폐허에서 발견한 물을 머금은 수선화 같고 쓸쓸하기 그지 없는 첼로의 선율 같기도 한 그 목소리와 언제 어디서 어떤 페이지를 읽어도 훔치고 싶은 문장이라는 것 역시. 휴, 그의 글은 절대 도서관에서는 읽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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