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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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아가미』이후 다시 구어체 리뷰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미리 인사드릴게요. 아, 그러고 보니 그날도 비가 내린 후였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이군요. 이런 날에도 굳이 산행을 도전하거나 계곡으로 캠핑을 가서 119아저씨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불어난 물에 휩쓸려 하릴없이 죽음의 길로 떠내려가는 이들도 분명 생기겠지요. 사람 목숨은 참으로 질기고도 찰나라는 것을 이럴 때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로 깨닫게 되지요. 여기에도 질기고도 순간인 사람의 생사를 목격하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김애란 작가의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이 오늘 이야기할 글입니다.

김애란, 그렇습니다 여러분 김애란입니다. 저는 그녀를 말할 때 늘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아, 얄미워. 아직 충분히 젊은 작가인데도(차라리 어리다고 말하는 게 어울릴 나이였지요) 성량이 풍부하고 감정까지 풍부한 목소리를 내곤 했죠. 게다가 그 목소리 안에 담긴 것들은 깊으면서도 맑았죠. 놀랄 만큼 디테일하고 섬뜩하게 현재를 잘 포착해내고 무엇보다도 재밌고 즐겁고 책장이 술술 넘어가죠. 그런데도 결코 가볍지도 비루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았더랬죠. 뭐랄까, 김애란을 읽으면 ‘평론가들이 칭찬하는 글들은 어렵고 비(非)대중적이다’라는 은근한 편견을 -거의 처음으로- 의심하게 되죠. 젊은 작가 중에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김연수 작가와 함께 평단과 대중을 함께 만족시키는 젊은 작가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으더군요.  

저는 그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런 모습이 떠오릅니다. 좋은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반듯하게 자란, 공부도 잘하고 생긴 것도 말끔한, 등굣길에는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어 강아지를 구할 것 같고(!) 아침부터 상쾌하게 농구를 하는가 하면 하굣길에 할머니 짐을 들어줄 것 같은 그런 소년 있잖습니까. 하물며 심지어 겸손하고 사교성도 좋은 뭐 그런 소년 말입니다. 순정만화에 나올법한 캐릭터, 서브 남자주인공의 느낌말입니다. 도저히 수상한 구석이 없는 그래서 나와는 도무지 연관될 구석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 말입니다. 부럽고 분하다가 그냥 이 정도로 우월해주시면 그저 허허허 하게 된 달까요. 저에겐 김애란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재밌고 꼼꼼하고 영민하고 매력 있고 문장력까지 좋은, 얄미운 작가. 그런데 6월, 드디어 첫 장편소설이 출간되었습니다. 허나 큰 기대는 대부분 큰 실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냉정한 척 하며 기대를 조정하려 애썼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목이 의아합니다. 게다가 파스텔 톤의 여리디 여린 표지라니. 이래저래 지나치게 트렌디한 거 아냐? 거부감과 불안감이 모여 함께 술렁거립니다. 책장을 엽니다.

읽었노라, 느꼈노라, 쓰노라. 이것이 리뷰를 완성시키는 삼단계지요. 네, 씁니다 쓰려구요 리뷰.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괜히 얼토당토않게 쓰다가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처럼 얼룩덜룩해질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말이 고여 있지 못하고 자꾸만 찰랑이다 못해 범람할 것처럼 덤벼드는데 연설문을 쓰듯 정갈하게 뽑아 낼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문어체 문장은 도대체가 나오지가 않았어요, 읽는 이가 얼마나 되던 어떤 생각을 쓰든 문어체 문장은 강단에 서서 말하는 기분이 들곤 했거든요. 하지만 친한 친구가 “너 그 작가 좋아하잖아. 이번 책은 어때?” 라고 물어보면 봇물 터지듯 -두서는 없어도- 이야기가 쏟아질 것 같았어요. 그게 이 리뷰가 문어체인 이유입니다. 네? 아, 그래요 실은 조악한 아이디어마저 똑 떨어진 것도 맞긴 합니다.

줄거리부터 간단히 설명할까요. 아주 간단한 시놉시스, 아니 트리트먼트로 요약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 한 문장이면 가능하죠, 작가 자신이 정의를 내렸더군요.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남들과 다른 속도로 부모가 된 두 남녀와 남들과 다른 속도로 시간을 스쳐가는 한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17살에 부모가 되어버린 대수씨와 미라씨, 이제 17살이 된 두 사람의 보물 아름이의 이야기지요. 아름이는 조로증입니다, 남들은 경비행기를 타고 가는 시간을 혼자서 우주선을 타고 살아가는 성질 급한 우주선 티켓을 받아버린 아이이지요. 우주선을 타고 살아가는 아름이는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요, 같은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자신의 부모님에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우주선 속에서 아름이가 바라보는 세상과 대수 씨와 미라 씨에게 바치는 헌정사. 갑자기 떠오른 것인데, 책의 초입에 아름이의 엄마가 출산의 장단점, 대수의 장단점을 쓰는 부분이 나옵니다. 가운데에 줄을 쫙 그어놓고 양쪽에 나열해보는 그런 거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리뷰를 써볼까 합니다. 줄은 없고 좌우로 나눌 수는 없지만 장단점부터 나열하고 결론짓는 방식 말입니다. 네, 아이디어가 떨어졌으니까요.

우선 이 책, 상당히 찡합니다. 보십시오, 얼음인간이 아닌 이상에야 제 설명만으로도 뭉클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 본 글들은 때론 위험하지만 대부분 흡족한 성적을 안겨줍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김원일의『마당 깊은 집』과 은희경의 『새의 선물』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유치하지만 진솔한 표현도, 의뭉스럽게 진실을 관통하는 것도 아이들의 시선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그런데 하물며 희귀병에 걸린 아이라니요. 병에 걸린 아이들의 가장 안타까운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무나, 정말이지 너무나 조숙한 것이지요. 제 나이보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를 보면 어쩐지 미안하고 안쓰러운 것이 당연지사인데, 아픈 아이들은 그보다도 더합니다. 많은 고난을 지나온, 그래서 이제 그것 또한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아주 겸허하고 단단한 노인보다도 더 굵직합니다. 쓸쓸하고 아연하고 그래서 사람을 송구스럽게 만듭니다. 이 책의 아름이도 그렇습니다. 집보다 병원이 익숙한 아이,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삶을 진행해온 아이, 누구도 대신 아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고독하고 의연한 아이. 그런 아름이의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짠한데 이 아이가 하는 말들은 더 뭉클합니다. 세상이 태평양처럼 느껴질 때 호랑이가 되어주겠다는 아이, 완전한 존재가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냐고 묻는 아이, 엄마가 자신에게서 도망치려 했기에 엄마의 사랑을 믿는다는 아이. 가끔은 정말이지 아이의 시선 같아서 화들짝 놀라게 하는가 하면 어쩔 때는 백겁의 세월을 살아온 것처럼 말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점을 맡고 있는 것이 조숙한 아름이의 시선만은 아닙니다. 작가는 본인의 장기를 여지없이 드러내는데 특히 자연스러운 유머 구사와 눈부신 문장들은 발군이군요.

어릴 땐 온종일 말을 줍고 다녔다. 엄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종알대며 주위를 어지럽혔다. 각각의 이름은 맑고 가벼워 사물에 달싹 붙지 않았다. 나는 어제도 듣고 그제도 배운 것을 처음인 양 물어댔다. 손가락을 들어 무언가 가리키면, 식구들의 입에서 낯선 소리를 가진 활자가 툭툭 떨어졌다. 바람에 풍경이 흔들리듯 내가 물어 무언가 움직이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건 뭐야?'라는 말이 좋았다. 그들이 일러주는 사물의 이름보다 좋았다.

비는 비. 낮은 낮. 여름은 여름…… 살면서 많은 말을 배웠다. 자주 쓰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상에 뿌리내린 것이 있고 식물의 종자처럼 가볍게 퍼져가는 말이 있었다. 여름을 여름이라 할 때, 나는 그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다 믿어 자꾸 물었다. 땅이라니, 나무라니, 게다가 당신이라니…… 입 속 바람을 따라 겹치고 흔들리는 이것, 저것, 그것. 내가 '그것' 하고 발음하면 '그것……' 하고 퍼지는 동심원의 너비. 가끔은 그게 내 세계의 크기처럼 느껴졌다.

이제 나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은 거의 다 안다. 중요한 건 그 말이 몸피를 줄여가며 만든 바깥의 넓이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바람이라 칭할 때, 네 개의 방위가 아닌 천 개의 풍향을 상상하는 것. 배신이라 말할 때, 지는 해를 따라 길어지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쫓아가보는 것. 당신이라 부를 때, 눈 덮인 크레바스처럼 깊이를 은닉한 평편함을 헤아리는 것. 그러나 그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바람은 자꾸 불고, 태어난 이래 나는 한 번도 젊은 적이 없었으니까. 말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부모는 왜 아무리 어려도 부모의 얼굴을 가질까? (중략)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중하고 산뜻하게 머무르면서도 초라하지 않습니다. 단어들이 서로와 서로를 이어 마치 은하수처럼 펼쳐지는 장관을 이 젊은 작가는 정말이지 탁월하게 해내지 않습니까. 어떤 아포리즘 식으로 진실을 관통하면서도 허세나 허위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얕습니다. 언어를 오래 만져온 사람, 그렇기에 이제 그 말의 무게와 부피와 유연함까지 알고 있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역시 김애란이다, 싶은 부분이 바로 이 문장력에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시키죠.

그러면 이제 오른쪽으로 넘어가 단점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가장 먼저 꼽고 싶은 것은 역시 설득력 부족입니다. 개연성이 약하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면, 멋진 옷을 샀습니다. 그리도 기다렸던 브랜드의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옷입니다. 벅찬 가슴으로 옷을 입어봤는데 과연 옷태가 납니다. 그런데 이런, 박음질이 맺음 되지 않은 부분을 발견했다면 어떻습니까. 반품 사유는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기분은 이미 상하죠, 뭔가 억울한 기분이나 괜히 찜찜한 느낌까지 받을 수 있겠죠. 제가 이 책에 느낀 감상이 이것과 비슷합니다. 크게 비판할 만한 점이 확연한 건 아닌데 꼼꼼하지가 않습니다. 몇 가지 것들을 해결하지 않은 채 완성해버렸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과장되게 붙이거나 삭제한 것과 같달까요. 특히 이서하의 등장과 그 반전의 의미를 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가여운 아이를 조롱했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게 무얼까요(저만 모르는 건가요). 게다가 엄마와 PD아저씨의 수상한 기류, 장씨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등은 역시 석연치 못합니다.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그래서? 저는 우매한 독자일까요.

외람되지만 아마도 원인을 짐작해보면 장편소설에 미숙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애란은 노련한 작가이지만 뛰어난 단편소설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여태껏 단편만 써온 그녀는 단편의 호흡을 놀랄 만큼 정확히 꿰뚫고 있죠. 그런 그녀가 장편을 씁니다. 연재는 아니지만 역시 막바지에 가니 호흡이 부족했던 걸까요. 장편의 페이지가 너무 그득하게 느껴진 걸까요. 장편에서만 가능한 소재, 쓸 수 있는 문장 구사를 하게 된 것은 좋았으나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것이겠지요. 컷과 시퀀스는 좋은데 씬의 흐름이 좀 벅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단막극만 쓰던 작가에게 불쑥 16부작을 요구했거나, 미니시리즈 쓰던 작가에게 대하드라마 대본을 쓰게 하면 이런 기분일까요.

그런데 말이죠 이건 뭐 팬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허허, 다음에 좀 더 잘하시면 되요 하면서 폭 안아주기라도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말이죠, 김애란답지 않다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깊이였어요. 젊은 작가들은 잘 쓰지 않는 방식, 말투, 생각, 서사, 무엇보다 감정이나 사물의 겉이 아닌 내부를 바라보려는 깊이 있는 시선. 그러니까「노크하지 않는 집」의 서늘함과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의 날카로운 공감, 「칼자국」이 보여준 굵직하고 튼튼한 서사와 「침이 고인다」의 다정하지만 쓸쓸한 정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이 책은 지나치게 말랑말랑합니다. 독자들을 울리기에, 공략하기에 이 얼마나 탁월한 소재입니까. 착하지만 불행한 가족과 남다른 가족애와 조숙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아이. 독자 깨나 울릴 수 있는 이야기.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기획소설인걸까요. 플롯은 클리셰 그 자체이며 ‘베스트셀러가 되는 법’ 책에서나 볼 법한 요소들이 일진해있더군요. 읽고 나면 분명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에- 짠하고 뭉클하긴 한데 약간 속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 말하자면 (제가)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조창인의 『가시고기』를 -눈물 콧물 짜며 읽어놓고도- 쉬이 '좋은 소설'에 꼽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사람들이 잔인한 건 말이죠,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고 재현한다는 겁니다. 저는요 <병원24시>나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프로그램을 웬만하면 보지 않습니다. 무섭거든요, 타인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목격하면서도 그들은 이해한다거나 연민한다고 믿는 제 자신이. 그 고통을 좀 더 슬프고 아프게 표현하려는 이들도 잔인하지만 결국 그것을 보면서 그 고통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나의 불행은 견딜만한 것이라고 자위하는 게 제일 잔혹한 거잖아요? 어차피 돌아서면 잊어버릴 것, 타인의 불행을 발판삼아 내 자신에게 행복감을 고양시키는 것, 겨우 그 정도밖에 못할 거면서 마음껏 동정하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않으면서) 연민하는 마음으로 됐다고 생각할- 제 자신이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어요.

물론 그렇다고 모든 건강한 이들은 아프고 약해진 이들에 대한 글을 쓰면 안 된다는 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그런 글들이 필요할 거예요. 세상에 모든 낮고 어두운 곳에 포진한 것들을 수면 위로 부드럽게 올릴 수 있는 것, 작가가 해야 할 어떤 '책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어쩌면 그런 것일 테니까요. 문제는 시선이겠죠, 걸음이고 방향입니다. 작가가 '쓰고 싶어서' 썼다 하더라도 혹은 동정이나 이해, 연민, 짐작, 깨달음 등이 목적이지 않다 해도 역시 타인의 고통을 너무 쉽게 전시하고 있다는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네? 맞습니다, 인정할게요. 저는 김애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고통을 재현하고 전시할 수 있습니다, 연민하고 골몰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작가라면, 좋은 소설이라면, 아니, 김애란이라면. 더 나아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소재를 선택했다면 좀 더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러나 따뜻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밀어붙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애란이라면, 김애란이기에. 제목과 표지의 불안감을 씻어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꽤 좋게 평가하려고 합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갔다 나 갖다가 장난 하냐(엥, 써놓고 보니 싸이의 '새'군요) 하시면서 짜증내시겠군요. 그러게요, 단점이라 생각하는 부분에 한참 열을 내며 페이지를 소비해놓고 다시 좋게 본다니 헷갈릴 만도 해요. 저도 사실 꽤 고심했어요, 우호냐 비판이냐 어느 쪽에 조금이라도 더 높게 들어야 하나. 그런데요, 제가 생각하는 '단점'은 결국 '김애란이니까'의 다른 말이더군요. 약한 맺음새를 지적한 첫 번째 부분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김애란은 이러면 안 된다' 하고 있더라고요. 다른 작가였으면 이렇게 신랄하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불편한 점으로 느껴진다, 정도겠죠. 혹 작가의 이름을 명시되어 있지 않다면 저는 이 글을 꽤 높게 평가했을 텐데, 김애란이라는 세 글자가 제 마음을 콕콕 쑤시네요. 등단 10년차이기에, 첫 장편소설이기에, 김애란이기에. 당신은 이러면 안 돼, 하면서 눈을 흘기게 되더라고요. 물론 작품 밖에 위치한 작가에 대한 기대나 작품 전반에 대한 분위기 등도 책을 평가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신인작가와 중견작가는, 데뷔작과 십 년 후의 작품은 물론 다르겠죠, 때로는 달라야 마땅하고요. 하지만 역시 지나치게 주관적인 판단이 섞인 듯 한 머쓱함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예, 그리고 팬심이라는 사심도 조금 있습니다. 마음이 약해지는 건 별 수 없었어요. 그래요 이 책, 베스트셀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김애란다움'도 녹아있구요. 읽고 나서 뭉클했던 것, 타인에게 추천할 만큼이 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문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랄까, 역시 그 녀석은 달랐어(그 녀석은 앞에 등장한 상큼한 엄친아입니다). 따라 하고 싶은 스톼일, 아니 문장이랄까요. 전요 정말 이런 문장, 한번쯤 구사해보고 싶어요. 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저는 이 책을 우호적으로 말하려 합니다.  

다시, 김애란입니다(이렇게 말하니 무슨 종교의 추종자 같지만; 『침이 고인다』띠지 문구를 인용한 거 아시죠?). 등단 10년차라고 하지만 이제 겨우 서른두 살이며, 첫 장편소설입니다. 아직 쓰고 싶은 것도, 쓸 수 있는 시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좀 더 지켜볼 수밖에요. 그것도 팔짱 끼고 거만하게 앉아서 관찰하는 게 아니라 관심과 배려로 기다리고 기대할 수밖에 없겠지요.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역시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앗, 빈곤한 아이디어 소굴 속에서 갑자기 이 리뷰의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두근두근 김애란. 너무 뻔한가요? 아이디어라고 할 것도 없다고요? 에이 좀 봐주세요, 요즘 아이디어가 떨어졌으니까. 그리고 두근거린다는 말 빈말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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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4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4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저, 이 소설 다 읽고, 감상문 착실하게 쓰고, 그리고 이 글 읽었어요.
근데 저는 이 이야기가 잘 따라가져서 좋게 읽은 쪽이랍니다. 어찌 보면 말랑말랑하다고도, 독자의 기대에 영합이든 부응이든 하려는 소재나 주제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저도 <병원 24시> 이런 거 안 보는 쪽인데, shining님과 마찬가지 이유로, 어설프게 이해하고 연민하고 이런 거 싫어서요. (보면 결국 그럴 거, 그럴 수 밖에 없을 거, 뻔하니까요.) 근데 이 이야기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비판받는 반전(?)까지 그냥 편하게 봤어요. 그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이라는 진실을 주목하면서 말이에요. 숨도 못 쉬고 다 읽어 버렸어요. 무척 잘 읽히데요~! ^^

영화평 같은 거 읽으면서도 느끼던 건데, 결국 책읽기든 영화읽기든 그 읽기의 체험은 굉장히 주관적이고 그 찰나에 어떻게 받아들였냐의 의미가 강한 거 같아요. 사후에 설명하는 거죠. 그 찰나의 인상, 의미화에 대해. 근데 이상한 건 다시 읽어도 결국 대부분은 똑같다는 거! 그게 사실 재밌는 점이에요...ㅎㅎ

Shining 2011-08-01 14: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녀의 여타 다른 글처럼 굉장히 술술 읽히죠. 찡하고 재밌고요. 그래서 저는 장단점과 결론을 구분지어서 쓸 수 밖에 없었어요. 장단점이니 하는 것도 결국 어디까지나 제 생각에 의지한 것일 뿐이니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은 주관적인 거니까요(끄덕끄덕). 그래서 공감이라는 말을 동감이라는 말보다 보편적으로 쓸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비슷할 수는 있어도 같은 것은 아마 불가능할테니까요.

김애란이기에, 김애란이니까, 김애란이라면;;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길 원한 것도 결국 제 욕심인, 주관적인 감상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