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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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는 후루하시 가문의 비극에서 시작해요. 후루하시 소자에몬이 뇌물을 받았다는 누명을 쓰고 할복합니다. 죄는 일단락되지만, 형제는 근신을 받고 죄인의 자식으로 출셋길이 막힙니다. 형의 등용과 후루하시 가의 재건을 위해 에도로 향하게 된 쇼노스케 - 아버지의 결백을 믿으며, 날조된 사건의 배후를 찾아 진실에 다가서는데 가족의 숨겨진 속내가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기에 이르죠.

 

부모 자식 간에도 궁합이 있게 마련이다. 외골수에 승부욕이 강한 가쓰노스케에게는 아버지의 온화함이 연약함으로 보였을테고, 아버지는 자신을 닮지 않은 적자를 일찍부터 기피했다 -p25 쿵짝이 잘 맞는다는 말에 있어 어미 사토에와 장남 가쓰노스케, 아비 소자에몬과 차남 쇼노스케의 성향이 비슷합니다. 실의속에서도 자기를 굽히지 못하는 대찬 기질과 고집스러운 성격을 지닌 모자와 상반되는 부자,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진 가족의 속사정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요

 

세상에는 설령 부모 자식 간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감정이 엇갈려 서로가 서로를 용서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상대방을 생각해도 그 마음이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입장과 신분이 마음의 진위를 뒤바꾸는 경우가 있다. 어떤 이가 소중히 지키는 것이 다른 이에게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경우도 있다. -p608

 

아버지의 죽음, 오명을 벗기는 일보다 장남의 미래를 중요시 여기는 일이 사뭇 씁쓸하나 그 속내를 어찌 다 안다 할 수 있을까요. 더욱이 내 배에서 나온 자식이라 하여 그 뜻을 같이 한다 할 수 있을까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향이 부모와 자식간의 끈을 단단하게 이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갈등을 심화시키기도 합니다. 배우자의 단점을 빼다 박은 자식이라면 차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자문해보게 되요. 한편으론 나를 닮은 자식에게 더 애정을 쏟게 되는 점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한 이​,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족이라는 연결고리와 맺어 이야기합니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상처를 더 헤집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형태를 잘 꼬집는 것 같아요. 온갖 계산이 충돌하며 자신의 이득을 위해 얕은 꾀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미미여사가 던져주는 메시지 중의 하나는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간판이 중요한가, 장사가 중요한가, 체면이 중요한가, 뜻이 중요한가 하는 이야기라네." -p283 무엇을 얻기 위하여 서로의 다툼이 극에 이르도록 만드는걸까 생각해봅니다.

 

 개인의 이기심으로 무장한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며 달콤한 감언을 속삭이는 유혹을 어찌 물리쳐야 하는걸까요. 잘못된 사고방식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야겠지요. 그들의 삶이 지금에와서도 투영되어 보이는 것은 돈과 명예욕을 이유로 다툼이 날로 극심해져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설하고 쇼노스케를 중심으로 하여 그가 만나는 사람과 관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겉으로 드러나보이지 않는 가족문제가 심각한 분열을 야기하기까지 그 속내를 들여다보게 해요. "작은 우물만 보고 있어. 대국을 보지 못하고 제 손에 들어올 이익과 권익밖에 눈에 보이지 않지. 게다가 그것이 주가를 위한 일이라고 믿고." -p853 자신의 잇속 차리기에 급급하여 멀리 내다보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도 자리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진실 은폐에 관하여 경종을 울리는 듯 합니다

 

 믿고 보는 작가, 미야베 미유키. '가족이 만능은 아니다' 라는 사실을 이야기 함과 동시에 저마다 등장인물들이 갖고 있는 고충을 잘 드러낸 거 같아요. 그들만이 숨기고 있는 은밀한 비밀을, 자꾸 감추려고 할 때 문제의 본질은 흐려진다는 점을 느껴요. 동시에 비뚤어진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하면 어느덧 그에 물들어버리곤 하지요. 색안경을 끼지 않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려해야한다는 사실을 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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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도 - 관점을 뒤바꾸는 재기발랄 그림 에세이
김수현 글.그림 / 마음의숲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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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을 딱 꼬집으면 그래요. 김은주님의 [1cm] 가 생각났어요. 독창적인 생각, 관점을 달리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행위 등이 유사한 느낌을 주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책을 선호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생각해요. 긴 말 하지 않아도 30초의 광고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받는 것처럼, 이런 재기발랄한 에세이는 단시간내에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말이죠. 엇비슷한 내용들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찾아보게 되는 것은 공감을 통한 힐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일러스트레이터 겸 글쟁이이자, 꽤 괜찮은 그래픽디자이너인 저자 김수현님의 글과 그림이 담긴 <180도>에요. 다양한 직업을 함축하면 크리에이터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저는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주변의 모든 이들은 크리에이터의 면모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또한 일상에서 보여지는 것들을 날카롭게 살피고, 감정을 영민하게 묘사하여 자신만의 색채로 나타내는 일은 쉽지 않지만 도전해보고 싶어지기도 하구요.

Enjoy life This is not a rehearsal.​

  각설하고 ​남들 시선, 타인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란 어려워요. 자꾸만 재단하고, 주변 눈치를 살피게 되는 이 현실이 때론 버티기 힘겹지요. 최선을 다해도 '그것 밖에 못해?'라는 소리에 포기하게 되고, 초라한 자신을 탓하며 한 발 내딛기도 겁나는 요즘 작가는 말해요. 불완전한 세계 속에 나답게 사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계속하여 '오롯이 자신과 보내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구요.

  무책임한 위로의 말보다는 오늘도 수고한 당신에게 보내는 일상 속 낭만을 찾아 작가는 말하는 거 같아요.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냐고, 괜찮지 않냐고' 담백하고 솔직한 문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로서 상념에 잠길 수 있도록 만드는 이런 책은 백 마디 설명보다는 책장을 넘겼을 때 마음을 선덕이게 하는 글귀 들이 더 와닿지 않을까 해요. [성실이 길어지면 과로가 되고, 휴식이 길어지면 나태가 되고, 반성이 길어지면 죄책감이 된다] 삶에 있어 절취선 혹은 적정선이 필요하다는 글 외에도 많은 글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답니다.

문득 마음 속에서 '나는 잘 살고 있는 건가?' '나 혼자만 이렇게 멈춰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때로는 그들의 경험과, 꿈과, 도전에 비해 내 삶이 비겁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강인함이란 일상 속에서 삶을 일구며 살아가는 것

당신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험난한 삶을 버텨내고 있는 것이고 떠나지 않는 것도 역시 삶의 용기인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권태 속에서도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살아가는 당신에게 애정과 박수를 보낸다

지금, 당신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다

- 버텨라, 그리고 이겨라

그녀는 식당​ 종업원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그는 버스 기사가 아니라 눈만 붙이고 집을 나서서 16시간 핸들을 잡는 누군가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조금만 더 친절하기를

당신의 일상 속을 지나가는 엑스트라는 누군가의 영울일테니

- 슈퍼맨을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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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위로 한마디 - 나에게 전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격려
메러디스 개스턴 지음, 신현숙 옮김 / 홍익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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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이 들때 곁에 있는 이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위로가 되곤 해요. 토닥거려주는 이의 따스한 손길, 마음 따뜻해져오는 음식, 책 속 격언들 또한 마찬가지죠. 나를 붙잡아 일으켜주는 것들, 숱한 위로의 목소리에서도 제가 가장 귀를 기울이는 것은 명언, 속담과 관련된 것이에요. 오랜 세월 살아간 이들이 전하는 진리와 혜안을 통해 놓치고 살았던 점들을 되돌아보게 만들거든요.

​  이 책은 그러한 격언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책들과 비슷해요. 첫 느낌은 호기심 가득어린 어린아이처럼 책장을 넘겼지요. 현인들의 삶의 지혜를 담은 궁금함과 더불어, 감성적인 일러스트의 느낌이 좋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막상 좋았던 것들은 무엇인가 싶으면 딱 꼬집어낼 수가 없더라구요. 익숙하게 보고 들은것이 많았기도 했고, 지금의 나에게 와닿는 것은 많지 않았어요.

  [우리는 항상 잘 살아보려고 준비만 할 뿐, 정작 오늘을 제대로 살지 않는다. - 에머슨], [오늘 시작하지 않은 일이 내일 끝날 리는 절대 없다. - 괴테]​ 등의 말이 와닿았어요. 하지만 활자를 보기에 여념이 없어 정작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에는 깊이 들어가지 못했어요. 저는 이런 일러스트를 감수성 어린 시선으로, 사랑스럽게 바라보기에는 마음이 많이 굳어졌나 봅니다.

  일상 속에서의 예술의 힘에 매료된 작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화가라고 해요. 담백하고 고운 수채화로 아름다운 책을 펴낼 뿐 아니라, 그림 작업이나 텍스타일 디자인, 종이 그릇 디자인도 함께하고 있다더군요. 제 개인적인 취향이 이런 아기자기함 보다는 단순함을 더 좋아하는 탓에 책을 더 흥미롭게 보지 못했어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격언들로만 이루어진 딱딱한 책보다는, 이런 감수성이 돋보이는 그림으로 하여금 덜 부담스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 아닐까 싶었어요.

  [너 자신이 되어라. 너 이외의 다른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의 몫이다. - 오스카 와일드] 의 멋진 문장만큼은 제 마음 깊숙하게 자리할 거 같아요. 다른 이의 걱정거리를 내 것으로 끌어안고, 어깨에 눌러진 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스스로​를 반성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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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컬러링북 아름다운 고전 컬러링북 1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글, 최연순 옮김, 이호석 그림 / 북로그컴퍼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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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러링북에 대한 자세한 소개 없어도 되겠죠? 유행 타기 시작하면서 너나할거 없이 출판사에서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어요. 몇 개 소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컬러링 북은 또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여 하나 둘 사모으게 되는 조금은 나쁜 소비습관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더라구요. 남의 것이 더 좋아보여 사모으기 시작하니 어느덧 욕심으로 채워져 있더군요. 색칠도 잘 하지 못하면서 말이에요)

  색칠을 통한 힐링의 책들이 넘쳐나는데, 이 책이 더 와닿았던 이유는 단 하나에요. 고전을 읽으며 컬러링 북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 이것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어린왕자, 눈의여왕,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이어 쭉쭉 고전 컬러링 북이 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조금 더 기대가 되기도 해요. (컬러링 북 유행에 뒤쳐지면 더 안나오지 않을까 싶은 작은 걱정도 되지만 말이죠.)

 

 어른들의 눈에 비친 모자 그림이 아이의 순수했던 눈에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어린왕자의 책을 시작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지요. 나이들수록 굳어져가는 사고에, 순수성, 창의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 참 많이 반성하게 되요. 스토리와 함께 하는 색칠이라 더 즐거웠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코끼리=회색이라고 단정짓고 칠하는 나는 예술성이란 없겠다-라구요.

 

 

 

  바오밥나무도 칠해보고, 아래 그림의 술꾼도 칠해보고 했더랍니다. (술꾼 사진은 망했어요.) 그 밖의 다양한 그림들도 칠할 수 있게끔, 중간 중간 작은 그림들이 함께였더랍니다. 책도 읽으며 색칠도 하며 힐링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닐까요? 특히나 표지 속 어린왕자처럼, 자신이 꿈꾸는 모습대로 색칠하는 즐거움이 큰 거 같아요. 하지만 꼼꼼하게 칠하고 싶은 분, 혹은 저처럼 예민하신 분들에게는 이 책을 신중히 구매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름다운 고전을 읽고, 컬러링북도 할 수 있다, 즉 내 상상속의 어린왕자를 표현해낼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으로 보여지지만, 혹여나 색칠에 실패했을때,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더는 칠하고 싶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분들에게는 이런 책이 단점이 될 거라고 봐요.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 것인 만큼, 너무 부담을 갖지 않는 선이 좋겠죠?

 

 "그건 생활 습관의 문제야. 아침에 일어나 단장을 한 후에는 행성도 꼼하게 단장해줘야 해. 바오바브나무가 아주 어릴 땐 장미와 비슷하기 때문에, 항상 살펴보다가 장미와 다르다 싶으면 뽑아버려야 해. 몹시 귀찮긴 하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뒤로 미루어도 괜찮은 일이 있지만, 해야 할 일을 미루면 엄청 큰일이 날 것임을 이야기하는 어린왕자의 말이 와닿았더랍니다. 요즘의 제 생활을 보면 '내일', '다음에', '잠시후에' 미루는 습관이 있거든요. 이런 컬러링 북 또한 마찬가지로 미루면 한도 끝도 없는거 같아요. 하지만 취미로만 즐긴다면 때론 방치해두었다가 스트레스가 쌓이면 칠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보내는 것도 나쁠 거 같진 않다고 말이에요. (자기합리화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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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가 있던 자리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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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여행하고 글을 쓰는 오소희 작가의 생애 첫 번째 소설입니다. <해나가 있던 자리>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한 사람이 마음 속에 자리한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이야기에요. 어린아이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낯선 길 위에서 만남과 이별을 통해 아픔을 회복해나가는 해나의 과정은 지난 참사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수 백의 목숨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안타까운 일이었고, 애도의 물결이 줄을 이었습니다. 참담한 나날들의 연속 가운데 이를 시시닥 거리는 이들, 면피와 서로 다투며 계산하기에 급급한 이들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지요.

  각설하고,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의 마음을 어떤 것으로도 표현해내기 어렵겠지 비통함, 참혹함을 견뎌내기 버거운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 상실과 박탈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제대로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 책의 시작은 그러한 삶에 있어 응원과 위로의 말을 전해요.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거 같은 상실감, 어떻게 일어서고 방황하다가 연대할 손을 잡게 되는가에 대하여 - 말이죠. "아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현실이 이 책의 시작이 되었다"

꽃은 자랄 수 있어요 그 어떤 곳에서라도

- 뿌리째 잃고 나면 얘기가 달라지죠 -p153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그날'을 되풀이하며 보내게 되는 시간, 자포자기하며 잠들고 멍한 눈으로 세상을 보며 희망이란 불씨를 꺼갈 무렵 해나는 무작정 낯선 길위에 서게 됩니다. 자신의 실수라 자책하며 죽은 아이를 마음에 묻지 못하는 그미의 마음을 저는 짐작도 할 수도 없지만,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야 한다면 그 찢어지는 마음이 오죽할까요.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 뻣뻣한 막대기가 되어 꽂혀 있는 느낌이 아닐까, 작가의 글에 밑줄 그어봅니다.

​"하지만... 하지만 어떤 고통은... 감히 그것을 벗어나겠다는 발상만으로도 미안해져요."

- "이것이 당신에게 좋은 예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고통은 절대적인 것으로 시작해 상대적인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라는 것 자체가 일말의 부도덕을 안고 있죠. 당신의 고통이 인류 최초의 것이 아니라면, 인류 최후의 것도 아니라면, 아마 당신은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의 고통을 흔적 없이 지워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몸속의 장기처럼 떼어낼 수는 없지만 간직하기 편한 형태로 변모시켜서 함께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누구도 중간 과정을 건너뛸 수 없을 뿐이죠." -p74

​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새로운 생활 속에서의 일과를 구축해도, 작은 틈 속으로 생생하게 파고는 아이의 흔적을 마주할 때의 감정을 잘 담아낸 거 같아요. 함께했던 공존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당연했기에 감사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후회로 점철된 삶의 끝자락에서 그미는 깨달아요. 시간과 사연이 얹어져 단단해져버린 매듭처럼 끊어낼 수는 없어도, 이 매듭을 한 코 한 코 열심히 짜나가며 한발자국씩 나아간다는 것을요. 자신을 되찾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사랑하고 사랑주는 삶에 천천히 물들겠지요.

  작가의 말에서 '진짜 해나'는 아직도 옷장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땅에는 야만이 범람하고 있다. 그래서 해나가 안식을 찾은 곳은 이 땅이 아니다. 그린레프트라는 가상의 공간을 소재로 한다고 쓰여있어요. 우리 모두가 너무 힘들어서 이 곳을 떠나 살고 싶어 해요. 상처가 난 곳에 약을 발라주긴 커녕, 후벼파기 급급하니까요. 어설픈 공사로 책임을 피하고, 수박 겉 핥기식이 언제까지 괜찮을 수 있을지, 자식 잃은 어미새의 아픔을 넘어 사회가 안일하게 생각하는 부분들을 돌아보게 한 책이었어요.


​잃어버리는 기술을 통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도 많은 일들이 상실을 목적으로 삼는 듯하니 그들을 잃는 것은 이미 재난일 수가 없다​. 매일 무엇인가 잃어라. 방문 열쇠를 잃거나, 시간을 허비한 낭패감을 순순히 받아들여라 잃어버리는 기술을 통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더 많이 잃고, 더 빨리 잃는 법을 연습하라 : 장소들, 그리고 이름들, 그리고 당신이 여행하려 했던 곳을 이런 어떤 것도 재난을 불러오지 않는다 (중략) 잃어버리는 기술을 통달하기가 어렵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비록 그게 재난처럼 보일지라도 - pp64 *하나의 기술, 엘리자베스 비숍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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