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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작가님, 어떻게 이런 책을 쓰실 수가 있으신거죠? 필력에 감탄할 뿐입니다. 치정 문학(비정상적인 성생활을 향락주의적인 입장에서 다룬
문학)이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죠. 기발한 상상력이 실로 먼 미래, 지하세계 어딘가에서는 이뤄지고 있지 않을까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쾌한 화법, 거칠고 냉소적인 표현들이 읽는 재미를 더하는 이 책은, 뭇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결혼과 사랑이라는 속살을 조금 들여다 보게
되었어요.
각설하고, 책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아요. 결혼정보업체 웨딩라이프의 비밀 자회사인 NM(new marriage) VIP팀에서 입사
육년차 차장으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노인지'의 시점에서 다가갑니다. 다른 부서의 사원들이 미혼 남녀의 결혼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것과 달리
직접 VIP회원의 기간제 부인인 FW(field wife)가 되어주는 업무를 맡고 있어요. 계약 연애를 필요로 하는 이들처럼, 비혼주의자 곁에서
필요에 의한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일이라고나 할까요.
비혼주의자란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이'를 일컫는 말이에요. 혼인 의지가 없으며, 법적 결혼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이들을 위한 비밀 자회사 NM 그 곳을 은밀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몰랐으면 좋았을 그들만의 세계가 하나씩 껍질을 까놓고 드러납니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가 흔들리며, 공기의 흐름이 변화하는데요. 마지막 반전과 여전히 궁금증을 남기는 의문의 남자 덕분에 책은
궁금증과 느낌표 투성이에요.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 고액의 연회비와 혼인성사금을 지불하는 NM회원들에게, 이런 아내는
어떠신가요? 하고 내미는 기호품이 된 기분이었다. 몰랐고, 끝까지 몰라도 됐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그런 세계가, 내 손을 그렇게 잡았다.
-p26
"그만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왜 이런 결혼을 하는 걸까요?"
"법적 결혼을 하면 사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더 복잡하고 피곤하거든. 상대한테 치명적인 실수가 없으면
순탄하게 끝낼 수가 없어. 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이 싫은데 더 큰 이유가 있나. 통통한 발이 곰발로 보이기 시작하면 사는 게 괴롭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자유롭고 싶은 거야. 그런 면에서 합리적이긴 한데 끈끈한 정은 없지."
"자발적 비혼인 거네요."
"또는 모든 걸 감수하더라도 청혼하고 싶은 상대를 만나지 못했거나. 결혼에 반대하는 대다수가 기혼자야.
자기는 제도 속에 들어 앉아놓고, 해보니까 별로더라 하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에 몇이나 끝내고 나올거 같아? 뭐라고 하는 건 아냐.
뛰쳐나와서 뒷일을 수습하는 게 결혼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피곤하거든. 그냥 살아야지 뭐" -p35
결혼을 비롯한 사회의 여러 관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해온 작가의 산물이기도 하다라는 이 책, 그런거 같아요. 계약결혼,
성소수자 등의 소재를 전면에 드러냈고, 사랑의 이면적인 모습들을 맹렬하게 꼬집어내고 있거든요. 속물적인 모습들을 낱낱이 비꼬고 있어 통쾌하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와 사랑에 대한 맨얼굴을 마주했을때의 행복감과 더불어 처참함이 전해져왔어요. 타인의 욕망에 짓밟히는 이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자는 건 좋은데 그 정에 빠지면 안된다. 아니다 싶으면 딱 끊어. 질질 끌려다니면 너만 고생해. 한번
자면 서방처럼 구는 놈도 많으니까 조심하고. 불쌍해서 자주는 건 안된다. 그거는 뭣도 절도 아녀. 몸 보시는게 하는게 아니라고.
알겠냐?"
"돈하고 사랑은 똑같애. 없어도 지랄 많아도 지랄이야. 한 백명 만나면 든든할 것 같지? 하나 깊이
만난 것보다 더 헛헛해. 적당히 만나고 길게 사랑해라. 자꾸 갈아치운다고 더 좋은 놈 안 나타나. 총천연색이 한가지 색보다 선명하지 못한
법이다. 알아듣냐?" -p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