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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마지막 여름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 지음, 김현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_로마는 우리의 도시였고 우리에게 관대했으며 우리를 달래주었다. 나 역시 실직한 이루 불규칙적인 일로 돈벌이를 하며 몇 주째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못 하고, 누렇게 바래고 삐걱거리는 가구 몇 개가 전부인 음습한 여관방을 전전해야 했지만 로마는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_p23
_.... 침대를 보니 배가 뭉치는 느낌이 들어서 바로 이불을 털어 말끔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침대 시트에서는 여전히 그녀의 향기가 남아 있었고, 나는 차를 끓이러 주방으로 향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라디오를 켰다. 예전 노래들과 세계곳곳의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모든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_p100
1973년 이네디토상을 수상하고, 출간과 재출간을 되풀이 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의 <도시의 마지막 여름>. 독자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2016년에 재출간된 후에 20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 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히스토리부터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던 이 소설은 첫페이지부터 나를 매료시켰다. 1970년대 초 로마의 어느 여름이라고 하는데 어쩌다보니 이러고 있네... 하는 종종 느끼는 그것 그대로를 아주 잘 표현해 놓았기 때문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 100% 이해되는 기분이였다. 아마도 이 순간부터 이미 주인공에게 나를 투영해서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로마라는 거대한 도시 속에서 얼마 되지 않은 직장생활, 실직, 불안정한 일을 오고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또..... 그렇게 헤어지기도 하고.....
하지만 ‘나에게’ 무슨 일이 있든지 이 도시는 그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만약 20대에 이 소설을 만났다면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들었을까? 즐거운 시절을 지나서, 마침내 시작하게 된 사회생활은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끔찍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도시의 계절을 지나오며 버텼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었다.
누구나 이 시기에 선택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아마도 이런 삶의 진통과 과정의 보편성이 독자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 모든 과정들도 지나고 보면, “내게 주어진 운명이 있고 그것을 따라 살았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라는 것을 나이 들어 알게 되지 않는가!
때론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의 클리쎄도 보였지만, 확실히 사람을 끄는 매력 있는 문체와 내용이였고 저자의 다른 작품들도 읽고 싶어졌다. 금년에 읽은 인상 깊었던 문학작품들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_그 옛날 카바피스의 말이 옳았던 걸까? 그가 말하기를 당신이 속한 도시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며, 당신을 위한 배도 도로도 없기에 다른 곳에서 희망을 품지 말라고, 이 세상 작은 구석에서 인생을 낭비한 것처럼 그 어느 곳이라고 해도 당신의 망가진 인생은 달라질 것이 없다고 했다. ........
뭐, 나는 내가 와야 할 곳에 왔고, 이제 남은 것은 집에 돌아가는 일뿐이었다._p127
_"이런 불행이 또 있을까.“ 황량한 광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계속 말했다. ”나도 아리아나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_p179
_이 도시에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시내 이곳저곳을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면서 어디로 갈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이 도시를 미워하지 않았고,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_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