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토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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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단순한 여고생 실종 사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미와의 친구 아야코의 살인 사건과 미와의 친한 친구 가나의 실종 등 사건이 갈수록 복잡해간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미와의 실종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전반전이 지나고 중반전이 지날 때까지 이야기는 그렇게 진전이 되지 못한다.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미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지? 살아있을까?  등등 여러 가지 궁금증을 가지며 하무라 탐정이 안내하는 사건과 추리 과정에 함께 했다.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사실들이 큰 퍼즐 속의 작은 조각들처럼 하나하나 모여서 하나의 큰 그림들을 완성해간다. 그리고 그 퍼즐조각들이 완성한 그림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과 결과로 이어졌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한지,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는지...너무나 충격적이고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퍼즐 조각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생명의 위험을 무릎쓰고 완성한 하무라 탐정의 능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이 책은 '살인곰 사점의 사건 파일 시리즈 중 하나라고 하는데 다른 책들 속에서 하무라 탐정의 활약도 너무 궁금하다. 앞으로 그녀가 보여줄 활약과 사건 해결이 너무나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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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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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고 느끼는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20년 만에 만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새로운 번역과 해석으로 다시 만났다. 어렸을 때 세계문학작품 전집으로 읽었던 책, 그래서 그때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이야기 줄거리를 파악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후 다시 보게 된 노인의 모습이 내 마음 속에 아련히 남았다.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고 결국엔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노인을 보면서 우리가 사는 인생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어렸을 땐 그런 노인의 모습이 참 어리석게 보이기도 했고 노인의 무모한 도전이 헛수고라고 느껴졌지만, 이제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최선을 다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이렇게 다른 시각과 생각, 다른 새로운 번역을 가지고 이 책 『노인과 바다』를 읽어보게 되었다. 그리고 노인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 노인을 믿고 따르는 한 소년의 존재도 눈에 보였다. 그 소년이 없었다면, 노인은 자신의 투쟁을 계속해나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노인과 바다』의 작품의 줄거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85일 째는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운이 좋을 거라고 기대하며 노인은 바다에 나가고 낚싯대를 드리운다. 그리고 그의 기대처럼 대어를 잡게 되고 결국에는 상어에게 물고기를 빼앗기고 거의 빈 손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부분이었다. 노인과 물고기와의 한판 승부, 힘겨루기가 너무나 박진감있고 긴장감있게 전개된다. 

그 사투는 끝이 나지 않을 듯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마치 물고기나 노인이나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그들의 힘 겨루기는 팽행선을 유지하는 듯 보인다. 그렇게 물고기와 노인은 며칠 동안 힘겨루기를 하며 팽팽히 맞서다가 지쳐간다.

 

내 계획은 녀석의 엄청난 몸집으로 인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이루어져야만 해.

만약 녀석이 뛰어오른다면 나는 녀석을 죽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녀석이 영원히 아래 머물고 있어. 그러면 나는 녀석과 함께 영원히 머물러야 한다. 

-p.63-

 

노인은 피로와 아픔, 고통, 배고픔 등을 참아가며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 끝에 드디어 거대한 물고기를 잡는다. 정말 노인의 생각대로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였다. 처음에는 그 물고기를 잡으면 모든 일이 다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물고기를 잡아서 목표는 이루었지만, 그 이후부터가 문제라는 걸 몰랐다. 

 

노인이 물고기와 벌이는 사투의 과정이 너무나 긴박하게 펼쳐져서 그 이후에 더 큰 위험이 가디라고 있을 거라는 것을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문제는 바로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지금까지 죽을 힘을 다해 버텨서 겨우 물고기와 싸움에서 승리했는데, 그것은 전반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 위험하고 힘든 후반전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어와의 사투였는데, 낚싯줄에 매달린 거대 물고기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노인은 불굴의 의지로 그 사투에서도 살아남았다. 몇 번이나 죽음의 위협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결국은 살아남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뼈만 남은 물고기였다. 

 

노인은 결국 물고기와의 싸움에서도, 상어와의 사투에서도 승리한 것일까? 이 싸움에서 진정한 승리는 누구일까? 어쩌면 저자인 헤밍웨이는 이 싸움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의 인생과 삶의 투쟁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한 물고기의 사투 과정은 폭력적이거나 잔인하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노인이 자연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친화적 관계를 이루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노인은 자연을 정복한 것이 아닌 자연에 패배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그러나 그 패배는 어쩌면 진정한 승리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물론 노인과 물고기와 사투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로 항상 노인을 챙기고 노인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그 소년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노인은 물고기와의 사투 속에서도 그 소년 '마놀린' 생각을 한다. 헤밍웨이는 마놀린을 소년이라고 썼지만, 역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소년의 나이는 아니라고 말한다. 12살 이하가 아닌 17살 이하의 나이일 거라 의견을 제시한다. 작품 속 이야기 속에서 그가 그물을 손질하고 노인을 도와 고기도 잡는 걸로 보아 어느 정도 나이가 있을 거라고 짐작은 할 수 있다. 이 소년의 존재가 『노인과 바다』의 단순한 이야기를 더욱 생동감있고 아름답고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그 소년이 노인을 끝까지 믿어주고 사랑해주었기에 노인이 그렇게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그 소년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힘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20여 년만에 다시 읽어보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이제는 노인의 도전과 사투가 무모한 도전이 아님을 알게 된다. 노인이 비록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인간적 한계에 도전해서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도 그렇게 때론 노인처럼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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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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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번역과 해석으로 다시 보는 이방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p. 16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너무나 유명한 문장이다. 이렇게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엄마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죽음에 대한 슬픔, 애도, 비통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양로원에서 온 전보처럼 다소 딱딱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는 양로원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엄마의 관을 마주하게 된다. 관을 열어 어머니 얼굴을 보겠냐는 질문에 그는 '아니' 라고 말한다. 몇 번을 물어도 그의 대답은 'No'이다. 왜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것일까. 양로원에서 친하게 지냈던 노인들의 밤샘 조문의 모습과 그의 조문은 상당히 비교된다. 자신의 어머니와 친하게 지냈다던 한 여자분의 끊임없는 울음과도 너무도 대조된다. 그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결코 울지 않는다. 너무나 무심한 태도를 보이고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제 3자가 죽은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된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가지 상상을 하게 된다. '평상시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나?" '원래 그의 성격이 무심하고 냉담한 성격인가?" 뭔가 분명히 다른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왜 주인공 뫼르소가 이런 태도와 행동을 보였는지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그의 무관심하고 냉정한 태도가 그의 인생을 좌우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마 뫼르소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별로 말도 없고 감정 표현도 서툴고 솔직한 그의 행동이 그를 절망과 불행으로 빠뜨리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장례식 이후 전혀 애도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변함없는 일상을 해나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 함께 수영도 하고 영화도 보면서 말이다.그렇게 언제까지나처럼 변함없는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또 한 번의 일요일이 지나갔고, 엄마는 이제 땅속에 묻혔으며, 나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것이고, 결국,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p. 42-

 

그는 장례식 이후 전혀 애도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변함없는 일상을 해나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 함께 수영도 하고 영화도 보면서 말이다.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게 회사에 가서 일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그런 일상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의 주변 이웃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데 뫼르소는 자신의 아파트 이웃인 살라마노 영감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자신의 개에게 욕설을 퍼붓고 매질을 하는 개주인인데 나중에 개를 잃어버리고 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진다.

또한 뫼르소는 같은 층에 사는 다른 이웃인 레몽과 친하게 되는데, 동네에서 그는 여자들로 먹고 산다고 한다. 뫼르소는 그와 친하게 지내며 , 이야기도 나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함께 저녁도 먹는다. 거의 친구같이 친하게 지내지만, 이것이 뫼르소의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왜냐하면 레몽은 아랍인들에게 위협을 받고 쫒기고 있는데, 그 일에 뫼르소에 연루가 되게 된다. 왜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 아랍인이 뫼르소 본인 자신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는 끝내 무엇에 홀린 듯 방아쇠를 당긴 것일까. 

이로 인해 뫼르소는 어떻게 될까. 이렇게 그의 불행의 서막은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와도 같은 것이었다.'

-p.86-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다. 그리고 그의 살인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하지만, 재판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내용은 그가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것보다는 왜 그가 그의 엄마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느냐, 엄마를 왜 양로원으로 보냈느냐 등과 같은 엄마와 그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그의 엄마 장레식때도 애도하지 않고 울지도 않는 냉혈안이기 때문에,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의 분노로 인해 사람을 죽인 것이다 라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와 친하게 지내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그의 적이 되어서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다. 

 

그런데 그가 엄마 장례식에 가서 제대로 애도를 표하지 않고 울지 않은 것과 그가 아립인을 살해한 것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검사의 주장이나 증인들의 증언 내용, 배심원들 판단을 보면서 왜 그들은 그의 엄마의 장례식과 살인 사건을 연결지으려 하는 것일까. 

그의 말대로 그 재판 속에 뫼르소 자신은 없었다. 그의 동기, 그의 생각, 판단, 감정 등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고 그들 멋대로 판단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뫼르소는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완전히 폭력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괴물로 바뀌게 된다. 그는 결코 시니컬한 성격의 소유자도 냉혈안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거짓말을 못하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못하고 신념을 믿고 사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그래서 저자인 알베르 카뮈도 그런 타자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물론 뫼르소가 그렇게 사람들하고 원만히 어울려 지내고 감정과 생각을 잘 표현하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에게 사형이란 처벌은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거짓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신념을 가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이었다. 자신의 판결에 대해 받아들이고, 그에게 내려진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는 자신이 가진 신념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은 과연 범죄인 것일까? 그 소신이 그런 시민 윤리와 통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 소신을 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신념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어느 새 부조리한 인물로 낙인 찍히고 마는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알베르 카뮈- 

 

이 책  「이방인」의 역자 이정서씨는 잘못된 번역과 해석으로 인해 원저자인 알베르 카뮈가 표현하고 하는 의미가 왜곡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원전과 번역 사이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 「이방인」의 내용이 잘못 해석되고 전달된 것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출판사 책과 다르게 원전과 가깝게 해석을 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 프랑스어로 쓰여진 이 책 원문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원문과 가깝게 해석해서 그 의미가 왜곡되지 않게 번역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번역과 해석으로 다시 읽어보게 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그래서 그런지 더욱더  「이방인」 의 주인공인 뫼르소의 고뇌와 진심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그는 냉혈안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소시민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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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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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물고기와의 사투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마치 물고기나 노인이나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그들의 힘 겨루기는 팽행선을 유지하는 듯 보인다. 그렇게 노인은 물고기가 힘이 빠져서 배를 선회할 때까지 기다리지만, 물고기는 도저히 항복할 뜻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물고기와 노인은 며칠 동안 힘겨루기를 하며 팽팽히 맞서다가 지쳐간다. 노인은 피로와 아픔, 고통, 배고픔 등을 참아가며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 끝에 드디어 거대한 물고기를 잡는다. 정말 노인의 생각대로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였다. 처음에는 그 물고기를 잡으면 모든 일이 다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물고기를 잡아서 목표는 이루었지만, 그 이후부터가 문제라는 걸 몰랐다. 

 

노인이 물고기와 벌이는 사투의 과정이 너무나 긴박하게 펼쳐져서 그 이후에 더 큰 위험이 가디라고 있을 거라는 것을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문제는 바로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지금까지 죽을 힘을 다해 버텨서 겨우 물고기와 싸움에서 승리했는데, 그것은 전반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 위험하고 힘든 후반전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어와의 사투였는데, 낚싯줄에 매달린 거대 물고기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노인은 불굴의 의지로 그 사투에서도 살아남았다. 몇 번이나 죽음의 위협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결국은 살아남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뼈만 남은 물고기였다. 

 

노인은 결국 물고기와의 싸움에서도, 상어와의 사투에서도 승리한 것일까? 이 싸움에서 진정한 승리는 누구일까? 어쩌면 저자인 헤밍웨이는 이 싸움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의 인생과 삶의 투쟁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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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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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다. 그리고 그의 살인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하지만, 재판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내용은 그가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것보다는 왜 그가 그의 엄마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느냐, 엄마를 왜 양로원으로 보냈느냐 등과 같은 엄마와 그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그의 엄마 장레식때도 애도하지 않고 울지도 않는 냉혈안이기 때문에,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의 분노로 인해 사람을 죽인 것이다 라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가 엄마 장례식에 가서 제대로 애도를 표하지 않고 울지 않은 것과 그가 아립인을 살해한 것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검사의 주장이나 증인들의 증언 내용, 배심원들 판단을 보면서 왜 그들은 그의 엄마의 장례식과 살인 사건을 연결지으려 하는 것일까. 

그의 말대로 그 재판 속에 뫼르소 자신은 없었다. 그의 동기, 그의 생각, 판단, 감정 등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고 그들 멋대로 판단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저자인 알베르 카뮈도 그런 타자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물론 뫼르소가 그렇게 사람들하고 원만히 어울려 지내고 감정과 생각을 잘 표현하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에게 사형이란 처벌은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거짓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신념을 가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이었다. 자신의 판결에 대해 받아들이고, 그에게 내려진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는 자신이 가진 신념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자기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것이 그가 아립인을 살해한 죄보다 더 중하고 나쁜 죄일까? 카뮈가 한 말이 심금을 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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