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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 상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경우 경찰 소설이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게 [경찰 혐오자]란 87번 관서 시리즈의 작가 에드 맥베인이다. 30년 이상 52편의 시리즈를 써냈다니 경찰 소설의 최고봉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이제는 접어야 할 것 같다.
물론 에드 맥베인도 경찰 소설의 한 획을 그은 작가이지만 그의 소설과는 다른 전개, 다른 깊이로 경찰 소설의 한 획을 그은 작가의 작품을 접했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는 기존 내가 가지고 있던 일본 소설과 경찰 소설의 범주를 뛰어넘는 수작이다.
차차 설명하겠지만 단순히 경찰 소설이라 말하기엔 소설을 너무 작은 카테고리에 가두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경관의 피]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 삼대에 걸쳐 경관을 배출한 집안의 이야기다.
1대 안조 세이지, 2대 안조 다미오, 3대 안조 가즈야 이 삼대를 통해 일본의 현대사와 경찰 조직으로 대표되는 관료제의 실상, 조직으로 인해 파괴되는 인간상등을 매우 심도 있고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때는 쇼와 23년 (1948년), 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인의 삶은 공습으로 인한 주택의 파괴, 산업시설파괴로 인한 실업의 증가, 거기에 필연적인 가난과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다.
당시 치안 인력 부재의 문제가 심각했던 도쿄경시청은 간단한 시험만 보고 많은 수의 경관을 임용했는데 안조 세이지도 그렇게 경관의 길을 걷게 된다. 일자리가 마땅치 않던 시기에 박봉이지만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다 해서 들어간 경찰이지만 매사에 원칙과 규율을 중시하던 그에게 경관은 천직처럼 보인다. 그렇게 순찰 경관으로 생활하던 어느날 우에노 공원의 남창이던 미도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있다가 자신의 주재소 구역에서 철도 공원인 다가와 가쓰조가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미제 사건인 두 살인에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한 세이지는 하지만 주재소 옆 덴노지 5층탑에 불이 나던 날에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고 만다.
작가가 한국어판 서문에 적은대로 소설은 전후 일본의 도쿄 풍경을 사실적으로 하지만 정겹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은 전자상가와 상업중심지구로 유명한 아키하바라와 이케부쿠로를 판자촌으로 묘사한 부분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며 공습으로 주택을 잃은 우에노 공원 노숙자의 묘사는 전후의 비참함을 말하면서도 어딘지 따뜻하다.
또한 경관의 결혼시 상부에 보고하고 허락을 얻어야 하는 취처원제도나, 총기를 집에까지 휴대하고 다니는 모습, 패전 후 민주 경찰로 전환되면서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기존 경관의 모습을 통해 일본 경찰의 과거를 볼 수 있게 해준다.
2대 안조 다미오는 생활고의 타개를 위해 경관이 되고 어릴 때 각인된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며 주재소 경관이 되고자 하지만 당시 공안 정국하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훗카이도 대학에서 좌익 학생들 틈에 스파이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적군파 스파이로 활동하던 그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신경손상을 입게 되고 결국에는 그 신경문제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
쇼와38년 (1963년)부터 헤이세이5년 (1993년)에 걸친 다미오의 이야기에서는 당시 좌익 무장 혁명을 꿈꾸던 적군파를 통해 일본의 사회주의 폭동과 테러등 불안정한 사회 모습과 한국 전쟁을 통해 경제적 부흥의 발판을 마련한 일본의 풍요로운 상반된 사회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는 양담배 한 개피에 행복해하지도, 다다미 여섯칸짜리 방 두개인 주재소의 생활여건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일본 사회에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이 됐지만 전후 계속되어온 이념 갈등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내가 알기에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일본 대학생들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심취해 서로 대립하고, 비행기 납치, 테러, 폭동, 반미로 대표되는 무장 혁명을 꿈꿨다는 얘기가 낯설었다. 또한 지금은 춘투라는 축제적 성격으로 변한 노동자들의 파업이 좌익세력과 연계된 사회 불안 요소였다는 게 흥미로웠다.
3대 안조 가즈야는 할아버지, 아버지와는 다르게 대학을 졸업하고 1류 채용 경시청 경관이 된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그보다는 어쩌면 경관의 피에 이끌려 경관이 된 가즈야는 주재소 경관이 되기 위해 지역과를 가고자 하지만 폭력단을 상대하는 수사4과에 경무과 스파이로 들어가게 된다. 수사4과의 의심스런 경관 가가야의 부패와 비리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게 된 그는 가가야와 경찰본부 커리와의 연계, 폭력단과의 밀착, 사건 조작등을 알게된다.
헤이세이5년 (1993년) 이후의 일을 다루는 가즈야의 이야기는 1대와 2대에 걸친 공안 이야기 보다는 경찰 내부 조직에 관계된 이야기다. 일본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에서 익히 보아오던 캐리어와 논캐리어의 불합리한 차별, 경찰의 공식적 조직 윤리와 현장에서 경찰 활동중 느끼는 괴리감, 범죄조직과의 정보거래, 부패한 경찰, 성과주의적 관료제의 문제점등을 안조 가즈야를 통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세이지를 거쳐, 아버지 다미오를 통해 손자 가즈야까지 내려온 두건의 살인사건과 할아버지, 아버지 죽음의 진실이 밝혀진다.
사실 200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작이라곤 하지만 미스터리적 요소가 강하지는 않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세이지대의 모든 죽음의 비밀을 어렴풋이 짐작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미스터리적 요소와는 별개로 작가는 전후 60년의 일본을 실제 사건을 간간히 섞어가며 생생히 재현하고 있다. 패망이후 일본의 빈곤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도시노동자의 사회주의 운동, 경제 성장을 거치면서 무장세력으로 변모한 사회주의 세력과 관료제에서 파생된 부패 범죄, 조직 범죄등 묵직한 사회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경찰 업무와 생활을 함께 하는 주재소 근무 경관의 모습을 통해 잊혀져가는 일본의 전통적 가치관과, 일본 서민들의 생활모습, 경관으로서 겪어야하는 갈등과 경찰 윤리등개인적 문제도 놓치지 않고 묘사하고 있다.
고지식한 세이지, 조직윤리와 개인윤리에서 심한 갈등을 한 것으로 보이는 다마오, 조직 윤리 속에서 처세를 배운 듯한 가즈야의 모습은 현대 일본 3대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3대가 헤쳐 나가는 일본은 그리 만만하거나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3대의 삶은 그 자체가 전쟁 같다. 그 거친 삶을 살아온 그들의 모습을 보면 절로 숙연해진다.
처음 접하는 작가 사사키 조. 그의 유려한 필력과 꼼꼼한 구성은 읽다보면 빈틈이 없음을 알게된다.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정말 시간가는줄 모르고 몰입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경관 3대를 통해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는 최고의 소설이다. 사사키 조의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단순히 경찰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경관의 피]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