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청춘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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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9동 지하 고시촌 만화방에서 처음으로 본, 아찔하고 강렬했던 타이요 임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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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영화평론집 세트 - 전2권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필사의 탐독
정성일 외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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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의 두꺼운 평론집 두 권을 읽었다. 결론은 앞으론 애써 정성일의 평론을 찾아서 읽게 될 것 같진 않다는 거다. 그의 지나친 추측과 억지스런 과잉해석과 논리의 비약에 대하여, 한국어 문장 구조를 어긋내는 것도 불사하는 애매모호한 문장들과 제대로 걸려있지 않은 지시어들, 텍스트 내부에 그 연결고리가 만들어져 있지 않은 '섬처럼 떠오르는' 번역된 개념어들이 섬광을 뻥뻥 터트려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반박을 무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한국문학 비평 판에서는 정과리를 읽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로 정성일 또한 놓고 싶어진다. 현재의 그가 생각하는 방식, 글쓰기 방식에서 환골탈태하는 전환기를 맞을 것 같지도 않다. (그도 이제 나이가 꽤 들었다.)


그의 굉장한 교양과 감식력과 ‘필사의 탐독’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열정을 인정한다. 각각 오백 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는 대부분 2001년 이후에 씌어진 이 비평 모음집에도 기억할만한 통찰을 보여주는 명문을 분명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부 글에서, 아니 매 글마다 일부 구석진 데서라도 꼭, 부작용을 일으킨 현대 프랑스 철학의 악취를 맡게 된다. 특히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의 프랑스 예술 영화 취향의 감독론과 영화에 관한 일반론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좀 더 명징해질 수 있는 부분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한문장을 두 세번 반복해 읽어서 뜻의 낱낱이를 까뒤집고 보면, 스타일 때문에 희생이 되는 구절들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그렇다고 스타일이 좋지도 않다. 까놓고 말해서 문장의 정련됨에 관해서라면, 아름다운 글이냐는 논할 것도 없이 비문인가 아닌가를 따져야 하는 수준이다.  

 수식어가 어디에 걸치는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문장들도 속출한다. 모든 글들이 명백할 필요는 없고 그럴수도 없다. 고수는 쉽게 쓴다는 신화를 나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정성일의 말들을 압축 해제하고 나서 선후를 비교해보았을 때 노력의 가치를 못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문제다. 속단할 순 없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반문하고 걸러내서 미니멀하게 만드는 '쓰기 이전의 정련의 과정'을 어떻게 거치는지 궁금하다. 정성일 식의 아리까리한 역설을 나도 뿜어보자면, 그의 글은 ‘솔직’할지는 몰라도 ‘정직’하게 씌여졌다는 느낌은 안든다.


톡 까놓고 말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들뢰즈를 읽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책 제목부터 들뢰즈가 한 말이다.) 들뢰즈는 자신이 쓰는 개념들을 작동시키기 위해 자신의 방대한 저작들을 온전히 할애하고 있는데, 정성일의 비평들은 거두절미하고 (들뢰즈 문외한들에게는) 한자어 의미의 조합만 가지고 추측하도록 들뢰즈 번역어들을 털어 놓는다는 점에서, 즉 들뢰즈 저작들과 결합해야지만 정성일의 글이 온전히 작동한다는 점에서 들뢰즈 원저보다도 더 어렵다. 그리고 이건 심오함이 아니라 책임방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영화로 보는 들뢰즈 해설서인 양 뚱뚱한 각주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나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이 탐지했던 최초의 직관을 보존할 수 있는 논리의 경제성만으로 충분히 지탱해낼수 있는 글이 한편의 완결된 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물론 영화 평론은 최소한 대상이 되는 영화와 결합되어야만이 온전히 작동할 수 있다. 이것이 이 글 장르의 한계이면서 발판이다.


생각의 투명성이 위치해야 하는 자리에 ‘사유의 이미지’들이 대체되어 놓여있는 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직관적 충격을 요구하는 시를 쓰고 있는 게 아닌 이상은 그것은 많은 경우 사이비-사유처럼 보인다. 담쟁이덩쿨처럼 주렁주렁 엮어진 고유명사들의 묶음을 논리의 회로를 이루어야 할 개념의 자리에 대신 놓거나, 또는 고유명사를 수식어인 양 꼬리를 접어서 접붙여 버린다. 어떤 고유명사들은 투명하지 않은 대신 화학수지로 코팅이 된 명품백처럼 빛이 난다! 텍스트 속에서 간접경험물에 대한 하이퍼링크로 출몰하는 고유명사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논리의 구멍들이다. 우리가 미처 채우지 못한 그 구멍들을 각자가 외로된 교양의 길 위에서 점진적으로 채울 수 있다고 환상을 가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기회는 늘 미뤄진다. 왜? 독자인 우리 쪽의 지적 게으름 때문에! 우리가 그때 할 수 있는 것은 당장에 잡히지 않는 구멍의 '깊이' 앞에서 신도를 가장하면서 내뱉는 찬탄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봤자 고유명사들은, (채워지고 다리로 놓이기 위해 적절하게 잔가지가 솎아지고 왜곡된) 이미지의 형태를 띄게 될 뿐이다. ‘베케트적이다’, ‘존재론적이다’는 말을 썼을 땐 결단에 가까운 선택이 거기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제발 컷을 나누는 데서만 '윤리적으로 결단'하지말고 문장을 쓰는 데에 있어서도 그런 결연함을 보여주기 바란다. (도대체 ‘존재론’이란 말의 의미가 뭔가? 당신은 무슨 뜻으로 거기서 ‘존재론’이란 말을 결단했나? 그 맥락에서 존재론이라는 거대한 개념어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베케트적' 혹은 '베르히만적'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동일한 질문이 가능하다.) 누군가 그 말의 모호함을 지적했을 땐 충분히 풀어 써줄수 있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축한 이유를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그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광대한 철학적 추상의 세계를 장님처럼 깨물어버린 것이다. 정성일의 글들에 대해서 참/거짓 판단을 내리기 모호한 이유는 많은 경우 이 때문이다. 논리의 관절이 탈구된 추상적 개념어들과, 유연해서 아무데서나 잘 들러붙는 '형용사화된 고유명사'-이미지라는 접착제.


2000년 이후에 개봉한 한국 영화를 놓고 한 편씩 분석해놓은 글들의 모음인 <필사의 탐독> 쪽은 번역된 프랑스 철학의 개념어라는 모호한 연막이 적은 편이고, 구체적인 작품론 답게 생생하게 잡히는 쇼트 속의 이야기 구조와 이데올로기론/윤리적 태도론에 치중해 있는 편이어서 <영화..>보다는 훨씬 읽기 쉽고, 문자 그대로 '손바닥에서 땀이 날 정도로' 박진감 있는 글빨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론으로 영화를 심판하는 태도가, 그가 비난하는 인문 사회과학의 특정 분과를 끌어 들여 개념 해설을 하는 사이비 평문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잘 모르겠다. 이준익의 <님은 먼곳에> 관한 영화평은 속독감있게 읽히는 훌륭한 글이긴 하지만, 논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화 속에서 감지되는 가부장적 남아선호 사상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발' 그 이상은 아니며, 영화 초반부의 병행 편집과 쇼트 설계에 대한 분석은 이 글의 대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슷한 의미에서 왜 장철의 영화는 고발하지 않는가? guilty pleasure? ) 정성일은 도덕주의자와 모랄리스트 사이에 나 있는 빗금을 식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어떤 보수적인 틀에 갖혀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자신은 그걸 ‘휴머니즘’이자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지만 말이다.


대개 그의 평들이 그렇듯이 차라리 '필사의 단정짓기'라는 제목이 어울릴만큼 이 책에서도 직관적으로 나와 있는 결론 이후에, 이런저런 쇼트의 몽타주들을 연상시키는 비약적인 단문들을 차곡차곡 포개놓는다. 비약은 비약인데 틈새를 보여주지 않는 느낌이어서 논리의 어느 부위에 비평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 그 사이에 어떤 숨겨진 절차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식의 쓴 약을 삼키기 위한 필요악처럼 보이지 않고 논리외적인 포즈처럼 느껴진다. 정신분석학, 그것도 의료행위라는 퍼포먼스를 털어버린' 철학적' 정신분석학이라는 이 시대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으로 행위의 파편들을 이면에서 짜맞추는 과정이 교묘하긴 한데, 때론 붕뜬 요설처럼 보여 의심스럽게 보이긴 마찬가지다.


전제의 도식에 맞추려고 어거지를 부리는 듯한 부분들이 종종 보인다. 예를 들어, 올드독의 그림에 대한 해석과 이창동의 <오아시스>에 대한 해석 등.. 물론 이창동의 그 영화에서 느끼는 역겨움이 뭔지는 충분히 잘 알겠지만 어거지 논리까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감정 상의 오바액션이 이론적인 부분으로까지 넘쳐흐르는 것도 같다. 그게 멋있어 보이진 않고 때론 허세처럼 느껴진다.


최근 <하하하> 찍은 직후 홍상수와 인터뷰 한 것도 그렇고, <취화선> 촬영장에서도 정말이지 정성일은 한심한 질문들을 던진다. 역사적 맥락의 존중이라는 것이 컷-나눔과 시선의 윤리와도 직결되므로 명분으로선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자기가 읽은 문화사와 교양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되려 과시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감독론 서두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를 '인상비평의 대가'라고 요약한 것도 내게는 어떤 징후처럼 읽힌다.) 감독들의 연출론이라든지 장소 헌팅, 카메라 세우는 법 등에 대한 통찰들은 눈부시고 재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정성일의 몇몇 글들로부터 적지 않은 것을 배웠다. 때때로 섬광같은 통찰이 그의 말과 글 속에서 들어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어쩌면 언어감각과 관련해서 취향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애용하는 낱말들, 예를 들어 ‘우정’, ‘근심’, ‘정말로 이상한 것은’,‘숨박꼭질’, ‘내기’..등등의 말들이 어김없이 그 위치에 가있을 때, 나로서는 그게 좀 느끼하게 다가온다. '심금을 울린다'는 표현에 대해서만은 읽으면서 그 복고적인 말느낌이 썩 맘에 들어서 한 번 써먹어봐야 겠단 생각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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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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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빛의 기생충, 빛처럼 보일지라도 그건 니 내장을 빠는 기생충이라는 걸 이 책이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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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5
스탕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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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투성이의 불량품. 범우사의 김붕구 번역판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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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 헬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에디 캄벨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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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작품이지만 번역 진짜욕나오는퀄리티. 시공그래픽노블 반성좀해라. 교정은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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