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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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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에 한두 번쯤 어릴 적 살았던 시골집을 간다.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족 모두가 살았던 그때의 흔적이 아직은 그대로 남아 있어 타임머신을 탄 듯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착각이 들곤 한다.
늙어도 향기를 잃지 않고 제일 먼저 환하게 꽃을 피우는 마당 가의 매실나무,
사르륵 사르륵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던 집 뒤로 둘러쳐진 대 숲,
마루에 걸린 긴 괘종시계,
시화전에 출품했던 각자의 작품들,
할머니가 쓰신 반닫이,
엄마의 장롱,
아버지가 사오신 낡고 오래된 세로읽기의 세계 명작 전집들,
그리고, 엄마, 아버지가 젊었을 때 찍은 흑백사진과 우리가 어렸을 적 찍은 붉은색이 진한 초기의 칼라사진들로 채워진 가족 앨범.
사진인 듯 박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물건들을 볼 때마다...
시간은 멈추고 추억들만 남아 우리가 남겨놓고 떠난 물건들만이 서로 아련한 눈길로 마주서서 그때를 기억하고 도란도란한 얘기로 사람이 빠져나간 공간을 채우고 있었구나 싶은 착각이 든다.
이도우 작가의 <잠옷을 입으렴>은 내게 오래전 살던 집의 빈 마당에 나를 데려다 주었다.
내가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울며 지내던 방문을 열고 책장 구석자리에 놓인 낡은 앨범을 펴 그 시절의 사람들을 차례차례 만나게 하고 다시 포옹하게 해주었다.
비슷한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의 공감대!!
각자의 추억은 다르지만 그 시절의 공통된 문화와 통용되던 정서 자잘한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귀에 익은 상표들...
아...그랬어, 정말....그땐 그랬어!!
헤어졌던 오래 전 친구를 다시 만난 행복한 기분이었다.
'할머니는 자주 <이것이 누구의 아편이다>라는 말을 입에 올렸어요'(p.67) |
수안과 둘녕.
둘녕에게 아편이 마당앞의 아가위 나무인데 반해 수안의 아편은 둘녕이었다는 사실이 둘녕으로 하여 수안의 잠옷을 손 수 짓게 되는 이유가 됐을 것이다.
수안이 둘녕을 놓지 않아도 둘녕이 먼저 수안을 놓을 것 같았다는 할머니께 쓴 편지 속의 독백은 수안과 둘녕 관계의 복선이 어둡게 깔려있음을 짐작케 했다.
같은 듯 다르게 각자의 삶을 전개해 나가는 걸 보며 누구의 편도 될 수 없는 채 때론 안타까워하고 때론 응원하며 수안과 둘녕이 진심으로 행복해 지기를 바랬다.
수안과 둘녕 둘이서 장갑을 낀 손으로 넘기며 읽었던 <고양이를 산 사나이>에서 얻은 교훈처럼 거저 받는 행복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힘든 날들을 지내온 둘녕의 생이 조금 편안해져도 괜찮기를..
'어떤 것들은 거져 주면 안되고 반드시 팔아야만 하는구나. 액운이라든지 행운이라든지 꿈이라든지. 그래야 완전히 떠나가는 거구나'(p.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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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우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은 그의 오랜 침묵을 기다린 팬들에게는 축복이었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로 로맨스 레전드 반열에 오른 작가의 차기작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면서 신작이 나온다면 대세를 몰아 로맨스 계의 독보적인 존재 굳히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했었다.
하지만, 작가의 신작은 성장소설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성장소설을 펴내고 있고 나온 책의 대부분은 평작이상의 평을 받고 읽히고 있기도 한다.
큰 성공도 없지만 큰 실패도 없는 것이 성장소설이 지닌 장점이자 단점이라 볼 때, 그 차별화는 자기가 건너온 시대를 같은 시대를 살아 온 사람 혹은 그 시대를 이해하고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공감을 주고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느냐에 달렸다고 여긴다.
시대적인 배경과 개인사의 점철이 조밀하고 확대되어 나가면서 아픔과 성찰의 공감대가 형성될 때 성장소설의 가치는 더 빛났다.
이도우 작가의 성장소설은 시국을 아울러 통찰하거나 개인의 아픔이 시대의 아픔이었음을 대변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누군가 거국적인 죽음을 맞이 할 때 누군가는 철처히 개인적인 이유로 소멸될 수도 있음을 그런 이유들이 결코 하찮거나 치기기 어린 선택이 아닌 상대적인 질량으로 다가오는 고통에 대해 사람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게 하는 따뜻함이 있다.
둘녕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버지, 이모, 외삼촌, 산호씨와 웅이를 통해 보여주는 그림들은 내 고향집의 책장 구석을 지키고 섯는 낡은 앨범을 상기시키고 그 안에 차렷자세로 서서 어색한 웃음을 웃는 그들과 차례로 포옹의 시간을 갖게하는 아련함과 애틋함이 있다.
같은 모습의 차렷자세로 선 그들이지만 저마다의 삶의 무게와 저마다의 행복의 이유가 다르다는 걸 수안과 둘녕의 가족을 통해 끄덕이게 되고 내 삶의 길위에 만났던 사람들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이 슬쩍 행복해지고 어쩐지 위로 받은 느낌이 든다.
작가의 필력이 주는 힘이다!
계몽사, 어깨동무, 소년중앙, 호랑이기름, 원기소와 용각산,보이스카웃, 걸스카웃, 독서클럽, 만화가게, 수예점, 수학여행, 귀신이야기....
이제는 더 세련되고 기능좋은 것들로 대체되거나 없어진 이름들.
그런 이름들과 연결되어 있는 그시절의 나를 오버랩시키는 흐뭇함은 독자로서 또 하나의 덤이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이끄는 신비스런 등장 인물들과의 대화, 몽유병이 주는 묘한 긴장감도 중간에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들었던 플롯중의 하나였다.
다만 한때 몹시 아름다웠던 것들을 기억한다. 그것들은 지금 어디로 달아나서 금빛 먼지처럼 카를거리며 웃고 있을까. 무엇이 그 아름다운 시절을 데려갔는지 알 수가 없다.(P.462 ~ 463) |
카를거리며 웃(이런 표현 너무 좋다^^)던 추억을 누가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읽는 동안 우리에게도 분명 있었을 한때 몹시 아름다웠던 기억을 수안과 둘녕의 추억에 슬몃 끼워가며 읽게 해 준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잠옷을 입고 외할머니의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이젠 잘 시간이다.
부디 맨발로 헤매는 둘녕의 아픈 밤이 지속되지 않기를...
둘녕의 잠옷을 입은 수안의 불면의 밤들이 이젠 편안해 지기를...
어쩌자고 나는 또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