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이 있던 자리
신경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4월
평점 :
절판


장장 열흘간의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일욜이다.

110만이 해외로 빠져 나간다는 뉴스가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고 빠져 나가지 못한 나는 저런 사람들은 뭔 복이래? 하며 물끄러미 테레비를 본다.

진짜 조상 잘 만난 사람들은 해외 여행가고 조상 덕 1도 못 본 사람들만 차례상 준비하느라 전 디비고 나물 무치고 설거지 통 앞에서 벗어나질 못하다 집에와서 부부싸움 하는거라는 밴드에 올라온 글을 보며 씁쓸히 웃는다. 맞는말이네ㅠ 


올해 추석상은 간소하게 차리자는 시어머니의 전화가 있었으니 혹시 모르지 진짜 시간이 남아 틈틈이 책 읽을 시간이 있을지도-

추석에 읽을 책을 골라 봐야겠다...싶어 책장을 훑다가 신경숙의 책에서 눈이 멎었다.

아,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가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키며 해외 22개국으로 번역이 되어 출간이 되었다, 연극으로 발표되었다, 한국 문학사에 드문 100만부 판매를 올린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린 베스트 셀러라는 문구들이 시들해 질 무렵, 그녀의 단편 '전설'이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에 나오는 문장과 흡사하다는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신경숙은 우국을 읽어 본 적도 없는 책이라도 했고 창비는 신경숙을 두둔했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누가봐도 문장은 비슷했고 미시마 유키오가 먼저 출판한 책이었기에 신경숙의 말은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후, 신경숙의 문학은 갈갈이 해부되어 이것도 저것도 표절이 아니냐?는 의혹이 계속되었고 신경숙도 창비도 사과를 하는 선에서 일단락 되긴 했다.

그리고, 마지막 사과를 하는 신경숙의 인터뷰에서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절필은 하지 않겠노라고, 글쓰는 일이 전부이고 생명인데 글을 쓰지 않으면 죽는것과 같다고 한 말을 읽었다.

그때가 2015년 이맘때쯤이었으니 2년이 지났다. 내가 관심있게 보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그 후, 어디서도 신경숙의 근황이나 가십성 기사를 본 적이 없다.

절필은 하지 않겠노라 했으니 발표를 하고 있지 않을 뿐, 글을 쓰고 있으리라 믿는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1993년 신경숙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할 때 샀던 책이다. 1985년 문예중앙에 중편 '겨울 우화'로 등단하긴 했지만 우리에게 신경숙의 신화를 알리기 시작한 책은 '풍금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서서 훑어 보리라 생각하며 넘기던 책을 어느새 쇼파로 자리를 옮겨 푹 파묻혀 읽고 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불륜의 이야기다.

가정있는 직장 상사를 사랑하게 된 나와 어렸을 적 기억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가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

말 줄임표와 소녀 취향적 문장이 난무 하지만, 읽다보면 불륜이라는 게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가? 뭉클해지고 만다.

신경숙의 미려한 문장은 윤리의 벽을 흐물흐물 허물어버리고 불륜의 처지에 서있는 화자의 입장에 동화되어 쥐었던 돌을 슬그머니 놓게 한다.


다리를 다친 후 뚱뚱해진 점촌댁이 다른 여자를 본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절뚝이며 줄넘기를 하는 것과 에어로빅 저녁반 운동 도중 폭삭 무너지며 바람난 남편 때문에 자주 울던 여자의 이미지, 어머니와는 다른 그 여자를 좋아한(아버지와) 내가 그 여자처럼 되려할 때 기억한 '나...... 나처럼은......되지 마.' 하던 그 여자의 말. 인물들의 중첩이 봄이 오기 시작한 시골 풍경과 어우러지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게 전부다.

큰 사건도 없고 반전도 없는 밋밋한 불륜의 이야기에서 미당의 시처럼 어떤이는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이는 천치를 읽고 가기도 하겠지만, 신경숙의 문장들은 느린 듯 깊고 아련한하지만 스며들어 털어지지 않는다.

개인의 불편한 슬픔을 타자에게 이토록 아름답게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30년간 써 온 신경숙 작품 대부분을 읽어왔다. (빌려 준 책을 돌려받지 못한 게 더 많다. 엄마를 부탁해도 안 보이는군 ㅠ)

톤이 높지 않고 거칠지 않아 답답을 읽기도 했도 거사를 논하거나 시대를 평하는데 약간씩 비켜서있어 비겁을 읽기도 했으나, 아무렇지 않게 넘겨 버릴 수 있는 사소한 감정의 파장을 신경숙만큼 섬세한 필치로 옮겨 쓸 수 있는 이는 드물다고 본다.

한국인이 가진 한의 정서를 가장 잘 옮길 수 있는 문체를 가진 작가라고 생각한다.

[엄마를 부탁해]가 100만부를 찍어낼 수 있었던 까닭도 문학적인 완성도가 높았다기 보다는 보통 사람들이 가진 정서를 신경숙 특유의 감성적인 문장이 덧입혀져 내 얘기로 읽히게 하는 감정의 동화가 가져 온 감동의 쓰나미 덕분이었을 거라 혼자 추측했다. (나는'엄마를 부탁해' 보다는'외딴방'이 신경숙의 대표작이라 본다.)


썰이 길었다.

추석이 목전이고 몸이 아파 아무것도 못하는 엄마 생각이 났고 엄마를 부탁하던 신경숙 작가는 지금은 무얼하고 있는지 뜬금없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표절 시비는 작가에게 치명타이고 오명이다.

그렇지만, 궁형을 견뎌낸 사마천이 사기를 썼고 과하지욕을 견딘 한신이 유방을 도와 중국을 통일했듯 지금의 힘든 시간이 언젠간 전화위복의 시간이었음을 말하게 될 날이 올것이다.


신경숙의 글은 우울이 스며있고 맥이 빠져 - 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깊은 심연을 건드릴 줄 알고 남모르게 토하는 한숨을 쓰다듬는 글이었다고 급수정하고 싶다.

어디서라도 부디 건강하고 무슨 글이라도 꼭 쓰고 있어 독자들에게 다시 돌아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