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이름을 바꾸어 새로운 책을 낸 다는 건 독자가 봤을 때도 아슬아슬하지만 개인적으로 큰 모험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예가 문학사에 종종 있지만,' 낭중지추'거나 '모 아니면 도'로 나는 봤다.
'낭중지추' 이름자가 무슨 필요있냐? 작품으로 승부하면 되는거지!의 경우라면 탄탄한 문장력이나 작가 스스로의 자신감이 있어야 하고 '모 아니면 도'의 시도라면 잃을 게 없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 시간이 있다면 해리포터를 쓴 조엔 롤링이 필명으로 낸 쿠크스 롤링의 예를 검색해 보기로 하자.)
박생강 (본명 박진규) 작가가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가 이기는 하지만 작가의 인지도가 대중들에게 높지는 않다. 작품이 나빠서라기 보다는 작품이 많질 않아 대중에게 알려 질 기회가 적었던 까닭이라 생각한다. 내로라 하는 출판사의 소설상을 탄 작가이니 이 경력이 작품 활동을 해 나가는데 좋은 비빌 언덕이 되리라 사료됨에도 굳이 이름을 바꾸어 작품 활동을 해 나가는데는 충동적이었다고는 하나 나름의 절치부심 심오한 뜻이 있으리라 본다. (책 안쪽 날개 작가 사진도 바뀌었다. 더 젊어 보인다.^^)
10년 전 쯤 수상한 식모들을 읽었었다. 재밌게 읽었다는 생각 뿐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단군신화에서 사람이 되지 못한 굴을 뛰쳐 나온 호랑이가 호랑아낙이 되어 현대사회의 식모로 잠입 가정을 해체해 나간다 그런 얘기였는데 무거운 주제와 달리 가볍게 읽혔고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나 같은 작가(이름은 다른) 의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를 읽었다.
멤버십으로 이용할 수있는 대한민국 상류층 1퍼센트 남자 사우나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당연히 갑과 을이 존재하고 여러종류의 인간 군상들에 대한 관찰과 묘사와 감상을 사우나 매니저로 일하는 태권의 눈으로 적어 나간 이야기다.
주제는 무겁지 않고 재미는 뭐... 그냥 읽을 만 했다.(회식이나 계모임 때, 배터지게 먹고 나서 마지막 물 한 잔 마시면서 '물이 제일 맛있네!'하는 인간들이 꼭 있는데 내가 그런 인간이 된 것 같아 좀 죄송하긴 하다.)
소설이 주제 의식이 있어야 하고 뒷통수를 치거나 가슴 묵직히 내려앉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세계명작 할애비라 죽기전에 읽지 않으면 눈도 못 감을 필독서라 해도 내 취향 아니면 덮어버리면 되고 쓰레기 잡 지식이라 해도 내게 맞으면 양서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JTBC 안 봐요]는 끝까지 읽히게 하는 재미의 요소는 분명 있다. 대한민국 1%만 가는 사우나를 살아 생전 가 볼 일이 없을 거 같은 나 같은 사람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와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해서라도 읽게 되었다. 보통 동네 목욕탕에서 수건 갈아주고 청소해 주는 사람들을 사우나 매니저라는 직책으로 부른다는 것도 생소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거 모르는 바 아니나 [JTBC 안 보는] 사람들의 속내와 엽기적 행각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이 도를 넘을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대 놓고 갑질을 하는 것 조차 품위에 손상이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어서 이렇다 할 이슈라고는 없이 벗고 입었다.
1%들이야 사회적 체면과 포지션이 있으니 서민들의 동네 목욕탕 마냥 시끄럽고 무례한 행동과 말이오갈 수 없다면 나머지 99%에 속하는 사우나 매니저 그들의 삶에 대해 좀 더 충실히 스케치를 해야 하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이 있었다. 다들 비슷하게 힘들고 비슷한 사연들로 모여서 1% 시다바리 역할을 해 가긴 한다만 남 밑에 일하는 게 다 그렇지 뭐, 달리 해 줄 말은 없네. 그래서 시다바리도 고만 둔다. 책도 여기서 끝!
그런 느낌이었다.
그대로 끝내긴 찝찝했던건 나만이 아니었나보다. 사우나 매니저를 그만 두고 소설가로 돌아 온 태권과 여전히 사우나 매니저인 태권이 맥주 집에서 술을 마시며 성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박봉에 착취 당하는 인간의 고뇌가 없었던 건 아니었냐고? 장소를 너무 관념적으로 생각하며 비판하지 않아 자의식 없는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고 사우나 매니저는 소설가 를 탓한다.
소설가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벽과 벽 사이에 끼어 흐르는 어떤 존재로 느껴진 그 순간들이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부끄럽지도 않았고 두꺼운 관념의 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빈틈이 보이면 무너진다는 걸 1%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관념의 링 속에서 계속 돌고 있는 거라고.
끄읏-하고 덮어 버리지않고 주제를 정리해 준 건 고마우나, 사실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ㅠ
그러나, 계속해서 유수의 문학상을 섭렵해 가고 있는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며 골치 아프고 억지로 주입하려는 주제의식 따위 다 필요없으니 그만이 그릴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 독자를 인도해 가는 글로 자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작가의 말에서 전작 [수상한 식모들]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귀를 드나들며 꿈을 갉아먹는 쥐를 모티브 삼아 수상한 사우나 매니저, 알고 보니 쥐였지]가 초고의 제목이었다고 해서 하하하 웃었다. 쥐를 좋아하시는 듯.^^
출판사의 말을 듣길 잘 했다고 얘기해 주고 싶다.
속상한 건 소설도 좋아하지만 [작가의 말] 엄청 재밌게 읽는 사람인데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책이 여기서 끝나 버렸다.
쥐가 먹은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