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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한 시절이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두루뭉술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시절'은 지나온 사람들은 모두 한마디씩 할 말을 가지고 있는 달려가는 바람과 성난파도의 시간이라 국한하자.
이전과는 다른 나, 나 조차도 나를 제어할 수 없고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나를 시간이 이끌고 가는 시절.
어둡고 긴 터널 이다가도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이기도 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컴컴한 동굴같기만 한 시간.
그런 시간들이 나를 키우고 깊어지게 하며 단단히 여물게 만든다는 건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나 깨닫게 되는 일이고 사춘기의 시간은 진창에 빠진 걸음을 옮기려 애쓰는 질척거리는 시간 일 뿐이다.
책의 제목을 빌리면 '그치지 않는 비의 시간'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내가 통과해야하는 그 한 시절 내내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린다면...
무너지지 않고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서있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한 밤중 베낭을 꾸려 여행을 떠나는 열아홉 소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대를 이해 할 수 있는 폭이 내 경험의 한계선과 일치하는 것이라면 베낭을 매고 남쪽을 향하는 소년의 여행은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해 보려는 의지보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에 부딪혀 보기로 작정한것 같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형은 시종 시니컬한 모습으로 나의 여행길에 동참하지만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은 만큼 아무것에도 미련이 없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사랑한 사람에 대한 연민도,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 마저도.
하지만, 그치지 않는 비의 시간을 지나는 동생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기를, 견뎌내며 꿋꿋이 빗속을 헤쳐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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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 사람은 언제든지 비가 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하지만,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는 너덜너덜하지만 우산이 되어주는 말 한마디쯤은 베낭을 꾸릴 때 함께 싸 넣어야 한다는 것도 읽는다.
남쪽으로 향하는 여행의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짧은 인연은 어쩐지 미당의 시 '자화상' 한 부분을 떠올리게 했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여행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가출이라고 믿는 사람들,
학교라는 울타리를 숭배하며 돌아가라는 충고를 잊지않고'
너무 쉽게 쓸데없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뉘우치지 않는 소년은 어딘지 대견스럽기도 하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니 뉘우치지 않아도 된다는 우산 같은 말 넌지시 찔러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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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학상 대상에 빛나는 오문세의 [그치지 않는 비]는 첫 소설이라 믿기 힘들만큼 괜찮은 소설이다.
절제된 듯 하면서도 리듬감있는 언어와 텔레토비 집에 돌아갈 시간을 알려주는 '이제 그만' 식의 감정의 수위조절도 훌륭했다.
독자들로 하여 궁금증을 갖고 인물을 따라가게 하는 극적인 요소들도 적재적소에 잘 배치했고 은근한 복선으로 반전을 암시하는 구성도 멋졌다.
첫 장편이라는데 데뷰작임에도 최고작이 아닐까? 싶을만큼 기대를 갖게 하는 작가다.
단지,
이 소설이 로드 픽션(이런 장르도 있나?) 형식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여행도중 만나는 사람들 이야기에서 약간 산만해졌다는 건 아쉬움이다.
주인공인 '나'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처와 연결짓기엔 억지스런 만남들로 인해 깊어져야할 심연은 어수선해져 버렸고, 길위의 만남을 통해 의도한 성찰과 성숙의 계기 마련은 필요 이상의 지나가는 행인들을 불러옴으로 시끄럽고 소란스럽기만 했다.
만남마다엔 (나는 읽어 낼 수 없었던ㅠ) 작가가 의도한 은밀한 복선과 의미들이 진을 치고 공격명령을 기다리며 나름의 임무수행을 마치고 장렬히 사라져 갔겠지만, 설마 독자들의 마음에 가벼운 찰과상을 남기려고 그 많은 군사들을 동원한 건 아닐터. 확실히 치고 빠지는 정예군 몇 명이면 되었는데 싶은 아쉬움이 있었다.
가뜩이나 비는 그치지도 않고 내리는데...
여행에서 돌아 온 소년이 좀 편안해 졌으면 싶다.
작가의 차기작을 기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