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쓸 수있는 얘기를 나만의 시선으로 옮겨와  모두의 공감을 끌어내기란,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그 방면의 매니아를

형성해 내는 것보다 성숙하고 깊은 내공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속에서 가시적인 성과없이 어제같은 오늘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지난한 삶.

담장에 햇살 들 듯 지난한 삶의 틈새로 짧게 비치는 작은 행복에 기뻐하고, 잊을만하면 뒤통수를 치는 이름도 제각각인 아픔들속에 배어있는 감정의 갈래들을 잘 벼려서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싶은 위로를 주고 인생의 미더움을 느끼게 하는 글...

요컨데,

이런 글을 가장 맛갈나게 잘 쓰는 이가 오정희작가라 나는 생각한다.

 

사춘기적 나는 마흔까지 사는 건 몹.시. 부끄러운 (사실은 치욕적이라고..ㅠㅠ)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도전할 과제는 다 잃고 꿈이 거세(?)된 펑퍼짐한 아줌마로 살아가는 듯한 모습들에서 나 역시 저 대열에 합류에 똑같이

살아 가리라 여기니 마흔이 되도록 산다는 게 소름끼쳤다.

스무살만 넘기면 아름답게 죽어야지..

모두가 아름답게 기억할 때 꽃 지듯 홀홀 떠나야지..

몽매하고 날리는 어린 생각으로 밤마다 시를 썼었다.

마흔 즈음의 삶이 인생의 깊은 향을 흡입하기에 얼마나 적합한 시간인 줄 꿈에도 모른 채.

 

오정희 작가의 글은 옹기 그릇같다.

질박하고 아무렇지 않다.

별스러울것도 없고 눈에 반짝 띄거나 생경한 얘기로 귀를 세우게 하지도 않는다.

어느 동네 반상회에 나가도 들을 수있는 얘기, 누구나 한 번쯤은 삶의 모퉁이를 돌다보면 만나게 되는 가슴이 쓸어지는

얘기들로 기쁨과 슬픔의 비례치를 균등하게 조율해 내는 끄덕거림이 있다.

당사자가 아니고는 들이 쉴 수없는 세세한 숨결과 저 밑바닥에 가라 앉아 있는 앙금의 농도까지 가늠하는 투과의 시선.

얘기를 품어 숨을 쉬게 하고 맛의 최정점으로 숙성시킨 후, 그 그릇이 아니면 그 맛을 낼 수없는 옹기의 매력처럼

구질구질해 벗어나고싶던 삶에도 진득한 향이 배고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발원지를 알 수없는 따스함이 느껴지니 말이다.

 

책에 수록된 25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소설이라기 보다 꽁트에 가깝게 느껴진다.

아침, 저녁으로 마주치는 일상들을 의외의 결말로 이끌어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얘기들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 삶의 이면들을 잘 보여준다.

 

다시 만난 옛사랑이 꺼내는 보험서류, 자원봉사로 하는 미아 안내방송이 내 아이인줄도 모르는 이웃집 아줌마, 가슴을 울리던

소쩍새 소리는 알고보니 쓰레기차 소리였고 호로록 핀 목련에 마음을 뺏기다 보면 밥은 타고 식구들의 볼멘소리로 마음도 탄다.

 

맥아더 기도문에서 인용한 것처럼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한 것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P.203)'는 글들은

새겨 읽을 수록, 어쩌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인생에서  오욕칠정의 덫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P.119) 조금씩 알아가는

마흔 즈음의 나이에 읽으면 흡사 오래 알아 온 친구와 뒷탈 걱정않고 주변의 허물을 얘기하듯 후련해진다.

 

그리고, 

마흔 즈음의 아줌마도 사춘기 소녀처럼 피는 꽃에 앓기도 하고, 새로운 일들을 갈망하며, 새로운 시작을 끊임없이 꿈꾸며 산다는 걸 이제는 안다.

맑은 정신도 기력도 다 도둑맞은 마냥 퍼져있는 삶으로 보일진 모르지만, 마흔의 가슴에도 꽃은 피고 새가 운다는 걸 작가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대필해 준 듯하다.

 

내 존재의 증명이 옅어져 사는게 허무하고 무력감을 느낄 때, 그런 생각으로 매번 마음이 허물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또 일어서야 할 수많은 제목들을 찾아내는 더 이상 푸르지 않으나 속으로 여문 사람들을 향한 격려와 위로의 책.

이쁠것도 없는 표지의 여인조차 괜히 마음에 들고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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