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잡영 - 이황, 토계마을에서 시를 쓰다
이황 지음, 이장우.장세후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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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영'이라는 말은 '잡시'라는 말과도 통하는 데, 아무렇게나 쓴 시라는 뜻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흥취가 생겨날 때, 특정한 내용이나 체제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일이나 사물을 만나면 즉흥적으로

지어 내는 시"를  말한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아둔하고 어리석은 나이만 채워 오면서도 여태 잡영이라는 정확한 뜻 한 줄 제대로 꿰지 못하고 살다가

이제야 그 뜻을 알고 나서 무식한 것 만큼 용감한 것도 없다는 사실에 또 한번 부끄러워지고 만다.

 

이황!!

익숙하고 입에 익은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교과서에서 시험을 위한 암기용이나 역사와 철학을 얘기할 때 위엄스런 모습으로 등장했다 아무일 아닌 듯 사라지길 반복해

가까이 두고 사귀기엔 좀체로 만만해 보이지가 않았다.

사귀다니!!

언감생심 꿈꿀 수도 없는 일이지만, 혼자서 느끼는 친근감을 가지기에도 뭔가 껄끄럽게 느껴짐이 사실이었다.

 

이기원론에 입각한 인성론을 주장했던 이황은 사단칠정론으로 사람의 인성에 대한 연구로 조선의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근원에 접근하지 못하고 단순히 시험을 위한 암기용으로 외웠던 구절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에서 우습게도 나는 그의 철학의

무게를 느낀다.

 

퇴계 선생이 벼슬에 집착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와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자연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지은 시들을 모은 이 책에선 그의 복잡하고 머리아픈 철학의 심오함과는 거리를 둔다.

소개된 시들을 읽고 있노라면 그 날에 차오르던 달이 보이고, 날리던 꽃잎이 그려지고, 흥에 겨워 취하던 한 순배의 술이 생각난다.

연작으로 이어지는 긴 시와 금방 뜻을 이해하기 힘든 시들이 있음에도 그리 숨이 차거나 딱딱하지 않아,

내 즐겨 본 적이 없어 말할 수 없었던 풍류의 한적하고 멋스러움이 이런것이었으리..짐작을 하게 된다.

 

산의 꽃 흐드러지게 피는 것 막을 수 없는데

오솔길에 풀 많으니 오히려 어여쁘네

뜻 있는 이 기약해도 오지 않으니,

여기 있는 잘 익은 술 어찌하리오!

 

연작시 - 春日閒居.2  (P.123)

 

시어에 대한 주석과 시를 잘 감상할 수 있도록 도우는 풀이의 친절함이 시를 조금 더 깊이 감상하고 다가가는데

구름판 역할을 했음으로 나같은 문외한인 독자에겐 무엇보다 큰 감사이다.

그러나, 한껏 먹고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복감을 느끼게 됨은, 내가 다다를 수없는 경지에 있는 시의 고매함 탓이겠지만

이전에 출판되어 나온 책들에 젖은 안이한 타성도 한 몫했음을 알 수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공통분모를 뽑아낸 정서의 카테고리, (꼭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시가 쓰인 배경과 연결된 역사적 사건의 설명으로

감정이입에 도움을 주는 덧붙임을 기대했었던 것이다.

시를 오롯한 시로 읽어 내어 한 단계 높은 내것으로 만들어가는 창조적 노력과 누군가의 설명을 덧 입음으로 잘 소화시킬수 있었다는

포만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나를 본다.

분명한 것은 읽고 읽기를 게을리 말아야 겠다는 생각!!

 

시를 따라 걷는 동안,

위엄있고 허트러짐 없어 보이던 그 분은 아이들 가르치기를 흐뭇해하는 할아버지로, 이웃에게 따뜻한 술 한 잔 대접하는 아저씨로,

풍류를 알고 사람이 살아가는 낙이 무엇인지 아는 허물없는 친구로 다가온다.

소개된 시는 이전에 가졌던 선입견의 옷을 벗겨내고  따뜻한 옷을 새로이 나에게 선물해 주는것 같다.

어려우리 여겼던 시와 사람은 대번에 나를 보듬고 그와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했으니 말이다.

 

여담이지만...생각해보면, 그 분이 바라던 일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극구 벼슬을 사양하고, 나아갔다가는 다시 돌아올 구실 먼저 찾았던 모습에서,

천원짜리 지폐 속 모델은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는 말이다.

현대인의 거친 삶속을 이런 방법으로 오르내리며 절망과 위안을 고루 주게 되리라고 생각했었을까?

사단과 칠정!!

그의 철학은 어쩌면 그가 인쇄된 돈의 쓰임만큼이나 널리 퍼지고 있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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