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터
이경자 지음 / 문이당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잠시 헷갈린다.

이 책은 픽션인가, 논픽션인가에서.

굳이 말하자면 소설인지, 전기(傳記)인지 구별이 잘 안간다는 것이다.

'이경자 장편소설'이라고 적혀 있으니 소설로 읽어야함을 '염두'에 두기는 했다.

작가의 유려함일까?

아니면, 내가 박수근과 그의 가족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탓일까?

전기처럼 읽히게 하는 소설의 유려함과 문외함으로 인해  사실인 양 받아들이게 되는 일화들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읽고 난 후 격식에 맞는 독후감을 바로 제출해야 하는 학생이 되어 책장을 넘겼다.

(오독이었겠지만) 박수근 평전에 가깝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 채.

 

나는 90년대 초반에서 2000년 즈음까지, 그의 생가가 있는 양구군 정림리( 박수근미술관이 소재한 곳)에서 살았다.

박수근이란 화가가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박수근이란 이름보다 박완서 작가의 '미망'속에 그려진 화가의 모델로 더 알려졌을 때, 

그의 그림이 한국 미술계에 이렇듯 큰 파장( 값으로 든, 진위여부 든)을 몰고 오리라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때,

동네에 미술관이 자리잡기 전에 살았으니, 박수근의 생가가 그 동네라는 걸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90년대 중반이었을 게다.)양구군에서는 박수근미술관이 세워지기 몇 해 전부터 박수근 추모전을 열어 왔고,

그의 일대기와 그림을 군민회관(..으로 기억한다.)에 전시하고 그를 추모해 왔었다.

인쇄물이긴 하지만, 그의 그림을 팔기도 했는데 그때 내가 산 그림이 '빨래터'였었다.

인쇄물이긴 했어도 그의 작품이 주는 편안한 질감에 단박 정이 들었고, 그림속 일상의 고단함이 베인 여인들의 등과

고단함을 잊게하는 여인들의 수근거림이 고스란이 들려, 꽤 오랫동안 책상 앞 자리를 지키던 그림이었다.

 

그가 태를 묻은 곳이 내가 살았던 곳이라는 수구지심 때문이었을까?
박수근의 생이 안타까운 만큼 최근 그의 그림과 관련된 수많은 루머와 위작논란은 안타까움을 넘어 씁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박수근이라면 무조건 그의 편이되고야 마는데,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내 생각은 박수근이 숨겨 둔 빨래터에 관한 암묵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나 그림을 둘러싼 음모를

파헤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나보다.

 

아무도 몰랐던 박수근의 숨겨둔 애인을 그림 속에서 찾아낸다든가, 고개를 떨군 여인들이 가진 저마다의 신산한 삶,

빨래터 그림을 두고 펼쳐지는 위작과 진짜의 숨막히는 숨박꼭질..뭐 그런거!!(아, 또 소설 쓰신다.--;;)

(최근 출판된 다빈치 코드나 렘브란트의 유령 같은 책에 현혹된 까닭도 있다.)

아무튼, 신윤복을 트랜스젠드로 보이게 한 파격적인 설정의 '바람의 화원' 정도는 아니더라도

다 알고 있는 일대기를 양념만 조금 더 쳐서 내 놓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서 사실은, 조금 실망했다.

 

'빨래터'의 위작시비로 전개되는 책은, 아들 '성남'의 회고와 자신 '박수근'의 시선으로 나뉘어,

성남이 어린시절 부터 봐 온 아버지에 대한 느낌과 그림으로 인해 구원 받고 그림 때문에 상처받는

박수근의 내면이 쌍곡선을 이루며 나아간다.

잘 알려지지 않은 박수근의 아내 김복순여사에 대해 상당 부분 할애한 지면은 그의 그림의  모델이

민초의 삶을 살아가는 동네의 아낙이기도 하면서 그의 아내였음을 시사하는 듯 하다.

아버지의 후광에 덮인 아들이 느껴야 했던 참람한 마음은 이 책의 향방을 소설로 각인시키는데

한 몫한다.

무엇보다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던 아들이 어린 시절과오롯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기까지의 시간들의 묘사는

작가의 글을 끌어가는 힘이 느껴져 (내 기대와는 달르다는 이유로..;;) 앵도라졌던 마음을 스르르 풀게했다.^^

 

작가가 편향된 관점으로 한 장르만 고집하는 것을 나는 반대하는 편이지만,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절반의 실패'에서

느꼈던 파닥거림은 무척 좋았다.

 

밥에 돌이 섞였다고 밥이 돌이 될리는 없지만, 돌이 자꾸 씹히면 밥한 사람을 나무라게 된다.

기분에 따라 입맛을 바꾸는 까다로운 손님들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돌을 걸러내는

체 질에 땀을 흘릴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수랏상에 올라 오는 기름기 좌르르한 흰 쌀밥 보다는, 포만감에 행복해지고 피와 살이 되어 살아갈 힘을 얻는

잡곡 섞인 거친 밥이 더 몸에 좋은 법이니.

 

미각을 잃은 나는 잘 차려진 산해진미에도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또 불평이다.

못된 버릇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