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애무
에릭 포토리노 지음, 이상해 옮김 / 아르테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상실이 주는 아픔.

상실한 대상의 애정 척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상실의 아픔으로 인해 현실에 대한 애착 마저 상실해 버리는 경우들.

이해한다거나 괜찮아질거라는 쉬운말로 위로를 하기엔 가당찮음을 알기에 나는 침묵하기로 한다.

누구도 그 상황이 아니면 이해 할 수 없을 뿐더러, 살아있는 한 괜찮아질 수 없다는 것을 그에 상응하는

크고 작은 우리의 경험만을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처음 책을 접할때의 심드렁은 펠릭스의 독백에 점차 귀가 열리고, 이야기에 동화되어  빠져들더니

마지막엔 차마 책을 내려 놓지 못하는 아픔으로 멍- 해야했다.

 

펠릭스와 마리 그리고 콜랭.

행복할 수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시작은 아니었음을 미리 알린다.

그저 아이를 갖고 싶었고, 그 아이가 일어서서 걸어다닐 수있을 때 까지만 옆에 있겠노라고 선언한 엄마,

아이만 남겨 놓고 훌쩍 떠나버린 엄마의 빈자리까지 완벽하게 재현을 해 내어야 했던 아빠.

돌연히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 양육을 분담하고 싶어하는 엄마,

그리고 어느날 오후 사고로 죽은 아들.

 

이 모든 이야기는 펠릭스가 들려준다.

처음 조용히 귀만 열어두고 끄덕거리며 이해한다고, 애썼다고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치다가,

그의 슬픔이 누구나 그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예측가능한 슬픔과는 농도가 다름을 직감한다.

 

예측 가능한 슬픔이 될 수없다는 것은, 그가 예측 가능한 부모(?)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펠릭스에게 있어 콜랭은 나라는 정체성을 포기하며 뜨겁게 껴안았던 붉은애무의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펠릭스가 되찾고 싶은 것은 살인범이 아니라 네 살배기 아이(P.136)이고, 그를 계속 괴롭혀 대는 것도 그 운전자(p.153)이다.

그토록 혼신을 힘을 다해 사랑을 쏟아 부었던 네 살배기 아이는 돌아올 수없고,

여자인지 남자인지 운전자는 누구였는지 목격자조차 없다.

마치,아빠였으면서 엄마였던 펠릭스의 모습처럼.

 

펠릭스가 끌고 다니는 죽은 콜랭의 유모차는 어쩌면 펠릭스가 영원히 끌고 다녀야 할 삶의 굴레인지도 모른다.

아들의 몸을 담겼던 유모차에 이젠 아들의 영혼을 담은 채.

마지막 반전이 주는 충격은 차라리 안타까움이다.

그의 마음을 오롯이 이해하고 따라왔던 독자에 대한 배신일 수도 있지만,

그럴수 있었겠다는..이해의 연민이 앞서는건 법과 도덕을 모르는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나눈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편들기라고 해두자.

 

이토록 많은 감동과 이토록 짜릿한 충격!!

이제 나는 또 가당찮은 말로 그를 위로하고자 한다.

이해한다고..또 이해한다고!!

 

견딜수 없는 슬픔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던지는 팔매에 그가 무사하길..

나는 그의 뜨거운 포옹을 풀면서  법보다 정에 이끌리는 아둔한 사람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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