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결론부터 말하자면, 뜻은 감사하지만 책에 붙어있는 책갈피 끈은 필요없었다고 출판사 측에 살짝 귓뜸해 주고 싶다.^^

첫사랑이 보내 온 연애편지를 중간쯤 읽다 접어두고 밥을 먹고 난 후, 다시 펴 읽을 사람이 없듯이,

이 갈색끈을 한 번도 사용해 볼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지방 축제를 갔다가 손수건에 꽃물들이기 코너를 체험한 적이 있다.

준비해 둔 하얀 손수건에 형형색색의 꽃을 놓고 콩콩콩.. 두드려서 꽃의 형태를 옮겨오는 프로그램이었다.

너무 세게 두드리면 꽃이 금방 짖이겨져 색깔이 뭉텅 묻어나오고, 약하게 두드리면 군데군데 빈 곳이 남아

오롯한 꽃의 모습을 담아 오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천천히 8분의6박자로 손을 놀려 꽃잎의 가는 실 핏줄까지 스며들게 하는 신중한 정성, 그게 관건이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느린 소설이다.

숨 고를 새 없이 후다닥 읽지 마시라고.. 한 장씩 천천히 넘기시라고..그래도 해가 지기전에

분명 마지막 장이 보이는 것을 아쉬워하게 될거라고...미리 말해주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사랑에 아주 경험이 없지 않은 그리고 마냥 젊은 것도 아닌 방송국의 피디와 작가의 안단테로 진행되는 사랑!

그들은 둘 다 머뭇거리고 조심스러워 한다.

때론, 그 감정에 불성실하기조차 하다.

상처 입기가 두려워 혹은 상처를 주게 될까봐..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끌리고 있음에도 때론 무시하고 때론 아닌척, 나아가고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포들이 언제나 그렇듯 각 세포 위에 세워진 안테나는 상대방의 일거수 일투족을 향해 뻗어있기 마련이다.

그 안테나를 타고 흐르는 주파수가 가끔 지지직거려 꺼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차마 엉뚱한 주파수로 채널을 돌리지 못하는 마음이

고스란이 담겨있다.

 

이건과 공진솔의 사랑은 참 아날로그다.

창경궁의 밤 풍경을 구경하고 싶은 진솔을 위해 경비의 눈을 피해 숨어 기다리기,

마지막 교외선을 타고 도착한 도시의 카페에서 연인을 향해 부르는 노래,

작정을 하고 간 제부도에서 물길이 막히기전에 돌아나오는 바보스러움,

느닷없이 찾아가서 한밤중까지 기다리는 그사람 집 앞,

원나잇 스탠드로 쿨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지금의 연애풍속도에 비하면 어지간히 답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손 잡는 것도 키스하는 것도 쉽지 않는 그들의 비등점없는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런데 있다.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 (P.398)

 

책은 금방 읽히고 끝났는데,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다시 책을 천천히 뒤적여 보게된다.

그들의 사랑이 무사하길..

나는 조금 부럽고 아련한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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