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시체처럼 누웠다 아침이면 좀비처럼 일어나 출근하는 나날들이다.

책 읽을 시간도 운동을 할 기력도 없어 영혼의 충만함은 방전되고 신체의 에너지는 고갈되는 느낌일 때, 하루키 옹의 책이 왔다.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 만의 장편 소설이다.
혼자(남이 인정해 준 적은 없다) 생각키로 나는 의리가 좀(많이는 아니다) 있는 사람이니, 원조 하루키 팬으로 그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모른척하는 건 배신이지 싶어 내용이 어떻든, 값이 얼마든 예약부터 했다.

한국어 판은 예약 판매 기간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고 책이 시장에 나오기도 전에 출판사에서는 중쇄를 결정, 3쇄까지 찍었다는 뉴스다. 누적 13만 부!

밥이 진밥인지 고두밥인지도 뚜껑을 열어보지도 않았는데, 코끼리 밥솥(80~90년대 엄마들이 모두 탐내던 일본 밥솥 상표다)은 자기가 알아먹기 딱 좋은 고슬고슬한 밥을 짓더라는 소문을 출판사도 신뢰한 게 아닌가 싶다.

80년대 일본 밥솥의 대표가 코끼리표 였다면 출판계의 떠오르는 별은 하루키옹 이니까.

하루키 옹이 노벨문학상을 받느냐 안 받느냐 보다 책을 써 낼 때마다 선인세가 얼마인지가 더 궁금한 세속적이고도 속물적인 내가 아는 바로는 2009년 '1Q84'를 출판할 때 10억 원을 넘었던 걸로 알고 있다. 이번엔 얼마였을지 사뭇 궁금해하며 하루키 옹, 리얼리 젤러스다.

761페이지의 위용을 자랑하는 이 벽돌 책을 오늘 다 읽고 서평까지 적을 수 있을까?
몸은 꺾이고 팔 다리는 뒤틀린 채 좀비처럼 허느적 거리며 일어나 두께를 살펴 볼 때만 해도 자신이 없었는데 커피로 카페인 수혈 후 훑어나 보자 폈는데 점심먹고 저녁 먹기 전에 끝냈다.

술술 읽혔다.
하루키 독자라면 익숙한 하루키 공식들이 포진한 하루키 월드 한 바퀴 휙~ 돌고 나온 기분이었다.
다만,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가 협소해 볼거리가 줄고, 괴이했던 감초 조연들의 무난함, 어린 주인공들의 안전을 염려해 활극을 배제한 채 도서관에 조용히 앉혀 두었다는 것, 팬 서비스 용 선정적 수위가 12금으로 하향된 점, 전작의 기시감이 답습되고 있다는 점은 아쉬웠다.

두 개의 세상을 나누는 벽 알지, 알지,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통로 웅덩이? 한 번 나와 줘야지, 상반된 세계의 공통된 장소 이번엔 도서관이군, 베일에 싸인 여자 주인공에게 초개와 같이 죽을 결심으로 덤비는 상대 배역이 이번엔 학생이네, 밑도 끝도 없이 어디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냐? 각자 상상에 맡기는 결말은 여전하시고...

솔직히 말하면 실망이었다.

43년 전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하루키의 대표작인 노르웨이 숲도 단편을 장편으로 개작해 성공한 케이스다.) 장편으로 다시 썼는데 70을 넘긴 하루키가 열여섯, 열일곱의 감성을 더듬어가며 완성시켰다는 건 고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생존 작가 중 한 명인 하루키 옹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43년 전 발표한 이야기를 개작하면서 자신의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좀 비겁했다 여겨진다. 자신의 공식이 시작된 시점에 쓴 이야기라 어쩔수 없었나?

'양을 좇는 모험', '1Q84',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봐 온 너무 익숙한 플롯이다.

소설 뒤 작가의 말에 ' 이 작품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라고 했는데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본 사람은 그 트라우마로 가시 있는 생선은 기피하게 된다.

하루키 옹도 이젠 힘이 딸리는 건가?

전편과 다르지 않는 이야기로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해 가기엔 버거워 보였다.

이 할배는 맨날 무슨 두 개의 세상을 왔다 갔다 하는 우물 이야기밖에 없어? 할까 봐 내가 괜히 걱정되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이 한 이야기만 읽은 독자라면 술술 읽히는 재미에 괜찮은데! 할 수 있겠지만, 이전부터 차근차근 읽어 온 독자는 주인공만 바뀌는 하루키 패턴의 식상함에 인이 박혀 먹기는 하지만 질리기 시작하는 대중음식 같다는 평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간 출간 소식에 예약 구매를 누르지 않을 수 없는 건,
'접시를 이고 있을 때 하늘은 보지 말라'거나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같은 가벼운 듯 철학인 메시지가 웃지만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끝까지 읽히게 하는 힘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또 아쉬운건,​

이미 하루키식 사랑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된 '봄날의 곰'이 여기서 '봄날의 토끼'로 다시 현신한 건 어휘의 소진인지 재미 본 경험의 재탕인지 의문스러웠다ㆍ(이 책을 먼저 써놨다 손 치더라도 곰이 보여 준 재주가 성공했으니 토끼에게도 시켜보자 한것 같아 불편했다ㆍ )

'1Q84' 전 3권, '기사단장 죽이기 전 2권'처럼 여러 권으로 나오지 않아 책값을 덜 수 있었지만 1만 9500원의 책값은 아직 뜸도 들지 않는 밥솥 뚜껑을 미리 열어보고 '냄새 만으로도 맛있겠네!' 하며 높여 놓은 선인세를 충당하기 위한 자구책은 아니었나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이젠 하루키 원조 팬이고 의리 다 필요 없다.
몰라도 까고 재미없는데 책이 비싸면 돈 아까워서 깐다.
이래서 친절함이 체력에서 나오고 여유로움이 통장에서 나온다고 했는갑다.
체력도 소진이고 통장도 텅장일 때 이 책을 읽은 게 잘못이다.

하루키 옹이 두 개의 세상에 천착하는 이유가,

하나의 세상에만 내가 존재한다면 아무개로 살다 아무도 모르게 죽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잊힌다면 슬픈 일이다ㆍ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의 또 다른 나는 괜찮고 특별하면서도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전설적인 존재라는 가정을 한다면 책을 읽는 독자들도 호접몽의 꿈을 꾸며 위로를 받지 않을까 하는 옹의 배려라 애써 생각키로 한다.

내일 또 좀비처럼 일어나 노동의 현장으로 휘청거리며 가야 하니 까댈 말은 많지만 여기서 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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