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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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나 커피나 달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가끔 진한 블랙을 마시면 개운해질 때가 있다.

농축된 밀도가 주는 중후함이 식도 밑까지 내려가 위에 퍼지는 느낌을 받을 때, 카페인의 독한 기운이 신경을 따라 흐르면서 정신이 맑아지는 걸 자주 느낀다. 인생이든 커피든 쓴맛을 알아야 단 맛이 정신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지.. 개똥철학을 읊으며 한 가지만 고집하지 않는 나는 얼마나 개방적이고 치우치지 않는 사람인지에 대해 스스로 칭찬하곤 한다. 하하하.

'추우면 외로움도 깊어진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블랙커피가 아니라 오리지널 에스프레소를 더블 샷으로 마시는 듯한 독하고 매운 기운이 서려있어 읽을수록 정신이 쨍해졌다.

의료사고를 낸 뒤 세상과 단절하고 섬에 갇혀 사는 초로의 의사 프레드리크 벨린의 이야기다.

얼음을 깨고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일주일에 세 번 오는 집배원 뿐. 변화가 없고 단조로운 삶에 느닷없이 40년 전의 연인이 찾아오면서 고요하고 적막하던 그의 아성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하리에이트가 찾아오기 전까지의 삶이 춥고 외로웠던 것이라면 옛날에 했던 약속을 지키라며 도망쳐 온 현실에 대한 책임을 묻는 하리에이트의 추궁은 늘그막의 삶을 더욱 무겁게 한다.

회피했던 시간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벨린은 느린 걸음과 깊은 호흡으로 맞닥뜨린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 속으로 걸어간다.

삶을 반추하고 비겁을 후회하고 책임질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할 생각으로.

배신당할까 봐 먼저 배신했지만 왜 그랬는지 자신도 설명할 수 없고 자신의 행동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손을 내민다. 거칠고 투박해 잡기가 꺼려질 수도 있으나 너무 늦게 내민 손이 아니길 바라며 딸을 기다리고 자신의 실수로 한 쪽 팔을 잃은 환자를 기다린다.

벨린을 당황스럽게도 하고 두렵게도 했지만 들뜨게도 한 딸이 주문해 준 이탈리아에서 온 구두를 신는 장면이 마지막에 나온다. 옛 연인이었던 하리에티트가 혼자 키워 온 40년 만에 존재를 알게 된 딸이다.

바깥으로 신고 나가는 일은 절대 없고 매일 부엌을 몇 바퀴씩 돌다 상자에 다시 넣는데 개나 개미에게 보여는 주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느낀다.

너무 좋아서 밖에는 신고 나가지 못하고 매일 부엌을 몇 바퀴씩 돌다 다시 상자 안에 구두를 넣고 있는 초로의 노인을 상상하니 그만 짠해져서 코끝이 시큰했다.

이렇게 외롭고 무겁게 늙어가는 중에도 작은 기쁨이 있다는 것은 반짝이는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하는구나.

외롭고 추운 시간을 스스로 선택했다 해도 나눠 줄 작은 관심만 있다면 꺼지지 않는 모닥불을 가슴에 피워주는 것과 같겠구나. 영화의 엔딩 신을 보는 것처럼 그림이 그려져 더 마음이 아팠다.

얽매이는 관계의 두려움으로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은 벨린뿐만은 아니다. 두려움이던 관계가 기쁨이 될 수도 있음을 알 때 누군가를 기다리게 된다는 것을 겨울의 한 가운데를 견디는 벨린을 통해 깨달았다.

더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여기까지 왔음에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그게 어떤 삶이든, 누구를 위한 삶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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