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배삼식 지음 / 민음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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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창 : 그만하게. 다들 험한 시절을 산 거야. 죄를 묻자면 우리 모두 죄인이지. 그 바닥을 들여다보자면 살아 있을 며리가 없지. 그렇다고 다 죽자고 들 건가? 그 사람들이 다들 떳떳하고 부끄러운 게 없어서 그럴까? 아니. 떳떳하지 못허구, 부끄러워서 더 그러는 거야. 거짓말루래두, 아주 못쓰게 살진 않었다. 자기를 위로허구 변명허구, 그런데두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따지자니 분풀이를 헐 데가 필요허구……. 그게 옳다는 게 아니네……. 그저 사람이란 건 그렇게 비겁하고 옹졸한 족속이고, 산다는 건 그렇게 추저분한 일이라는 말이야.



해방기의 문학은 조선의 고통스러웠던 식민지 시기를 지나 해방을 소망하고 해방을 맞이하는데, 「1945」는 해방의 감격이 아니라 해방은 되었으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해 여전히 목숨을 걸고 아귀다툼을 하는 전재민 구제소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그린다.

위안소를 탈출한 여성 명숙과 미즈코, 식민지 하에 끌려가 노동을 착취 당하며 노역을 했지만 해방으로 인해 오갈 곳을 잃은 사람들. 그들은 조선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 구제소에 모인다. 그들은 기차표를 구해 조선으로 가기 전까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자들은 노동판에 나가고 여자들은 떡장사를 하며 돈을 번다. 구제소 안에서 떡을 찌고 정을 나누며 다정한 동포애를 품는 것은 잠시 뿐. 누구는 일본을 도왔었고, 누구는 일본어를 한다는 이유로 서로를 힐난하고 자기 이해에 위협이 되는 순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


"우린 모두 고통을 겪었어요. 더러운 진창을 지나온 겁니다. 지옥을 건너온 거예요. 다들 그을리고 때에 전 건 마찬가지예요. 정도가 다를 뿐이죠. 진창에 더 깊이 빠진 게, 더 새까맣게 그을린 게, 이 여자들 잘못은 아니잖아요? 우린 이 여자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이해해 줘야 합니다. 운이 나빴을 뿐이에여. 어쩌면 우리 대신, 지독히도 운이 나빴던 거죠. 우리가 씻어 줘야죠. 그 고통을. 지옥에서 건져 내야죠."


「1945」에는 해방 후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위안부 여성 명숙과 선녀가 등장한다. 그들은 해방이 된 후에도 자신들이 당했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잠시나마 한 가족처럼 떡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다가도 명숙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고백하자 그들은 등을 돌린다. 그 시대를 지나 온 죄로 모두 함께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들의 고통은 누군에게도 위로받지 못한다. 해방은 되었으나 여전히 그녀들을 향한 모든 말과 시선에는 낙인이 찍혀있다. 누군가 씻겨 주어야 할, 더러운 존재로. 그들의 고통은 해방되지 못했고 지금도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 연세대 사회학 교수가 수업 시간에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교육자이기 이 전에 한 인간으로서 누군가의 '한 생애'에 대해 어찌 이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위안부'라는 호칭이 아닌 그 분들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알기는 할까? 그녀가 어떤 딸이었고, 누구에게 사랑받았었고, 해방 후 조선으로 돌아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생각이나 해봤을까? 나 또한 단지 명숙이라는 인물의 삶을 상상해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고통의 시간들이 모두 지난 후 태어난 덕에, 그들이 그 시대를 지나 온 죄로 우리 대신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일 수 있다. 운명은 누구도 선택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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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2
켄 키지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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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뇌 검사를 받으러 간 환자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병동에서 나갈 때만 해도 발버둥을 치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는데, 몇 주 뒤 주먹다짐이라도 한 양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든 채 돌아올 때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얌전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한두 달 뒤에 퇴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행복한 꿈에 젖어 몽유병 환자 같은 얼굴을 하고 돌아다닌다. 병원에서는 이를 성공 사례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런 사람은 콤바인을 위해 만들어진 또 하나의 로봇에 불과하다. 그 같은 로봇이 될 바에는 차라리 실패작이 되는 게 낫다. 



정유정 작가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읽으며 “전두엽 절제술로 인해 인간성을 빼앗긴 맥 머피”를 베개로 눌러 죽이는 장면을 보며 “살인이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 을 처음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1960년대 발표된 작품으로 체제 순응적인 보수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한 반문화 운동이라 할 수 있는 히피 문화의 확산으로 기존의 도덕, 제도에 반하여 인간성을 회복하고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대변한다.


이 소설은 정신병원에 수감된 환자들의 이야기로 작중 체제에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평범한 환자들에게 정신병 진단을 내려 격리시키고, 치료라는 명분으로 정신적 학대를 일삼는 행위를 저지른다. 하지만 아무도 저항하지 못하는데, 저항했다가는 전기충격이나 뇌 전두엽 절제술을 받아 식물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주인공 맥 머피는 노동형 선고를 받고 작업장에서 일하다 미치광이인 척 하고 정신병원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러한 억압의 현장을 발견하고 권력의 중심인 수간호사와 병원 체제에 저항하다, 끝내 인간성을 빼앗는 “전두엽 절제술” 이라는 수술을 당하게 된다. 맥머피의 저항은 가치가 있을까?


사회학자 미셀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정신병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인간적 장치가 아니라 이성중심적 사회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기준으로 광인을 추방하고 감금해온 장소로서 인간에 대한 권력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억압적 수단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분석한다. 아마 켄 키지는 이러한 권력과 통제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정신 병원'이라는 배경을 설정하지 않았을까.


이 작품은 거대한 사회 지배 구조에 주목한 책으로,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무력하게 만들어 통제 내에 머물도록 하는지에 주목한다. 어느 사회나 법, 도덕, 제도를 통하여 체제와 규율을 정하고 이제 반하는 사람은 서로의 합의하에 감시와 처벌을 하며 통제해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체제를 이용해 다수를 지배하려는 권력이 등장한다. (항상..꼭..)


그렇다면 지금 이 사회에서 우리를 무력하게하고 통제 내에 머물도록 하는 장치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도 수많은 감시와 처벌의 체제가 존재하지만 나는 '노동'을 통해 체제를 통제하고, 이러한 통제 속 과도한 노동을 통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봤다. 수년 전,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자필 메모가 공개된 적이 있다.

1. 야간의 주간화, 2. 휴일의 평일화, 3. 가정의 초토화, 4. 라면의 상식화


일자리가 줄어들고 실업률이 높아진다는 말만으로도 우리가 처한 노동 환경에서 경직될 수밖에 없다. '노동'은 우리 삶에 필수불가결하고,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때로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쉽게 저항하지 못하게 된다. 야간이 주간화되고, 휴일이 평일화되어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노동'에서 고개를 들 수 없도록, 그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지친 일상에만 머물게 하는 것이 그가 생각한 통제 방법이었을까?


정유정 작가가 했던 “살인이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란 말을 떠올려 본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정유정 작가는, 켄 키지는 자유없이 억압된 통제 속에서 저항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인간답지 못하다'고 바라본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내 마지막 인간성이 자유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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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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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 하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잘도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저는 도대체 세상에서 말하는 '방자한 노'인 건지 아니면 반대로 마음이 너무 약한 놈인 건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쨋든 죄악 덩어리였던 듯, 끝도 없이 더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가네기 은행 소유주이자 귀족원 의원인 대지주의 6남으로 태어난 다자이는 혜택받은 자로서 못 가진 자에 대한 죄의식 내지는 부채 의식을 평생 짊어졌단 작가이다. 이러한 죄의식은 『인간 실격』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 중 하나인데 지금의 시점에서 그의 죄의식을 떠올린다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천성적으로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에 일본 전쟁과 패망의 시대배경과 연결하여 본다면 어느정도 그의 죄의식은 이해된다. 특히 기근이 많은 가난한 지역에서 수많은 하인에 둘러싸여 특별 대접을 받았던 어린 시절과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그의 부채의식은 가중되었다.


결국 그는 네 번의 자살 시도를 실패하고, 서른 아홉 번째 생일에 강물에 뛰어들어 사망하고만다. "태어나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남긴 그의 죽음은 『인간 실격』의 요조의 삶을 통해 고스란히 담긴 듯하다. 그가 창조해낸 '요조'라는 인물을 통해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고뇌는 슬픈 자화상이자 세상에 내뱉는 마지막 유서일 것이다.


『인간 실격』의 요조도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였지만 자신의 실제 내면의 두려움과 우울함, 긴장감은 숨긴 채 '익살'이라는 가면을 쓰고 쾌활한 사람인 척 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나는 서비스였습니다.


나도 내 두려움과 우울함을 감추고 쾌활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어릴 때 '진짜 나'를 감추는 이유는 내 부끄럽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때문인데, 점점 어른이 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내 진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진짜 내 감정과 내 모습을 다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서 때론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가 아닐까? 모두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진실된 내 모습을 감추는 것을 부끄러워조차 하지 않고있다는 슬퍼지기도 했다. 어쩌면 요조가 (넙치와 호리키처럼) 추악하다고 바라본 사회에서 상식적인 인간상은 '나'일지도 모른다.


『인간 실격』이 그 시대 일본인들에게, 그리고 지금의 현대인들에게 중요하게 읽히는 이유는 그가 고민하며 몸부림치는 스스로의 나약함과 인간에 대한 불신감, 삶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사회화되어가며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인간에 대한 자조어린 목소리 때문이 아닐까? 우리도 요조처럼 쾌활한 척 하지만 홀로 있을 때 우리 내면은 두려워하고 절망감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까.


요조는 세상에 귀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다 인간 실격자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인간'이란 무엇이라고 규정하는가? 사회가 규정한 '인간다움'이라는 기준에 요조는 실격된 인간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가 규정한 '인간다움'에 맞춰 스스로를 감추고 점점 인간에 대한 구애를 잃어버린채 영혼을 잃어가는 우리야말로 인간 실격자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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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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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도, 증인도 없는 법정을 상상해 보았어요. 피해인석과 증인석은 비어 있고, 사건과 사건 번호와 배심원들과 재판장과 피의자만 있는 법정을요. 그럴 때 L의 운동화가 피해자이자 증인이 되어 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피해자가 이미 죽고 없으니, 피해자를 대신할 운동화를 어떻게든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피해자이자 증인이니, 어떻게든 살아서 증언하도록요. _p.55


최근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관련된 기사를 읽었다. 백남준의 대작 '다다익선'이 전시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지난해 2월 '누전에 따른 화재 폭발 위험'이란 공식 진단명을 받고 상영을 중단한 상태였고, 미술관의 상징으로 무늬만 유지해왔던 터였다. '다다익선'은 1986년부터 88년 완성한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상징으로 존재했으나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이를 복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술관은 얼마 전 '다다익선' 작품의 시대성을 위해 '원형 유지'를 하겠다는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복원이 어려운 일부에 LED · LCD 등 모니터 교체를 우선 배제하고 브라운관(CRT) 모니터를 그대로 수리·보완을 이어가겠다는 뜻이었다. 『L의 운동화』를 읽지 않았다면 관심 가지지 않았을 기사였다.


『L의 운동화』는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청년 이한열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실제 미술품 복원 사례들을 통해 '복원'의 의미를 언급하며,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복원'이란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라면, L의 운동화의 원래 모습은 무엇일까? L이 운동화를 사서 처음 신은 때? 혹은 최루탄을 맞을 당시? 이를 통해 L의 운동화를 최대한 복원해야 할지, 최소한의 보존 처리만 해야 할지, 사망선고가 내리진 운동화의 레플리카를 만들 것인지 스스로 질문을 하며 '복원'의 본질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질문 외에도 『L의 운동화』에는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언급된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효순과 미선, 제주4.3사건, 일본군 위안부 사건, 홀로코스트까지. 역사 속에 억울하게 스러져 간 많은 사람들을 우리 기억 속에 되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L의 운동화가 복원된다는 소식을 들은 한 사내가 메일을 보내온다. L이 신었던 '타이거' 운동화는 한때 자신의 운동화이기도 했음을,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던지 자신의 친구인 M도, J도, K도 그 운동화를 신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운동화는 L의 운동화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을 겪어낸 그 시대 모두가.


우리에게도 잊으면 안되는 사건들이 있다. 이제는 스무 분밖에 남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도, 어이없이 눈앞에서 아이들의 죽음을 목도했던 세월호 사건도. 바쁜 삶에 치여 잠시 잊은 것처럼 살아가다가도 소녀상과 노란 리본을 보면 모두 같은 시간으로 기억은 복원된다. 이 시대를 겪어낸 우리 모두의 기억이고 아픔이었으니까. 아름다운 미술품이나 고시대 유물들처럼 귀중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기억을, 어떤 기억의 매개체를 남길 수 있을까.


"나는 역사를 기억의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억은 구체적인 매개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데, L의 운동화 같은 물건이 그 매개물이 아닌가 싶어요." (p.135)


어쩌면 우리가 살아있음은 그러한 '기억'들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보며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느꼈던 기억,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며 함께 위로하고 분노했던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는 한 그 순간에 나는 살아있던 것이라고. 그 기억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최루탄에 쓰러진 L을 부축한 마음, L을 병원 응급실로 옮긴 마음, L의 운동화를 들고 응급실 앞에서 기다린 마음, L이 툭툭 털고 일어나기를 기도한 마음, L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애도한 마음, 그를 영원히 기억하려는 마음, 그 마음들…. L의 운동화가 그가 그 시대에 살아있었음을, 그의 마지막 순간을 피를 토하며 증언하듯 결국 우리의 기억들도 증언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 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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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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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저 방안에서, 어린 요한네스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어린 요한네스, 그의 아들, 이제 그의 어린 아들은 이 험한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살아가는 동안 겪는 가장 힘든 싸움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의 몸속에서 나와 저 밖의 험한 세상에서 제 삶을 시작해야 한다


BOOK. 《아침 그리고 저녁》중에서




흔히 죽음을 눈앞에 두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는 말을 하곤한다. 만약 내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나는 내 삶의 어떤 장면들을 보게 될까? 내 삶을 말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의 시작은 한 아이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해안 마을의 한 집에서 태어날 아이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아버지, 그는 태어날 아이를 맞이할 설렘과 혹여 잘못되어 아내와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며 끊임없이 독백을 이어간다.


장이 바뀌고 막 태어났던 아이 요한네스는 노인이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해 가족을 이루고 고향을 떠나 어부가 되어 고기를 잡으며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하는 아내와 절친한 친구가 먼저 죽고 홀로 남아 고독한 아침을 매일 맞이하고 있다. 적막한 집 안에서 혼자 일어나 아내를 그리워하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빵을 먹는다. 오늘은 배를 타고 나가볼까, 산책을 할까 홀로 고민하면서. 평소와 같은 아침, 그 날은 익숙한 듯 조금 다른 느낌이 미묘하게 든다. 평소처럼 서쪽 만으로 산책을 나가 절친했던 친구 페테르를 만난다. 같이 배를 타고 나가 물고기를 잡고 돌아와 평소처럼 페테르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려고 한다. 하지만 뭔가 다른 하루, 요한네스는 페테르를 기다리다 함께 떠난다.


"확실한 것은, 그가 올라이이고 어부이며 마르타와 결혼했고 요한네스의 아들이며 이제, 언제라도, 조그만 사내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p.17)


이 작품은 요한네스가 태어나 성실하고 고된 삶을 살아내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친구를 먼저 잃어 고독한 나날을 보내다 죽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는 욘 포세의 서술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대부분의 문장들은 쉼표(,)로 이어져 있고, 이 작품 안에서 마침표(.)는 대략 열 번 정도 등장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삶과 죽음이 마침표도 없이 이어지듯 한 사람의 삶은 물론 죽음까지도 남아있는 이들의 삶에 스며들어 서로의 삶이 쉼표로 이어져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욘 포세의 생각이 담긴 것 같다.


사람의 생각도, 삶과 죽음도, 삶의 장면들도 마침표 없이 이어지듯 이 작품의 사건들도 마침표 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보통 삶의 마침표라고 생각하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도 욘 포세는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실제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에도 마침표가 없다.) 아마 작가가 그리는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한 '끝'이라고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다른 매력은 글이 지닌 음악성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읽을 때도 우리는 운율을 느낄 수 있는데, 쉼표로 이어진 이야기들은 호흡이 빠르게 읽히는 반면 여백으로 남겨진 부분은 숨을 고르게 되는데 이를 통해 의도된 운율을 느낄 수 있다. 요한네스의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차는 순간, 생각들은 가지를 치듯 빠르게 뻗어나가고 또 생각에 잠길 때는 긴 여백을 주는 방식이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순간 이 리듬은 의도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고, 그 감각에 경외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인생의 많은 순간, 우리는 생각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니까.


요한네스의 하루의 삶을 통해 아침 그리고 저녁, 탄생 그리고 죽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탄생' 뿐, 저녁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될 걸세"(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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