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배삼식 지음 / 민음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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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창 : 그만하게. 다들 험한 시절을 산 거야. 죄를 묻자면 우리 모두 죄인이지. 그 바닥을 들여다보자면 살아 있을 며리가 없지. 그렇다고 다 죽자고 들 건가? 그 사람들이 다들 떳떳하고 부끄러운 게 없어서 그럴까? 아니. 떳떳하지 못허구, 부끄러워서 더 그러는 거야. 거짓말루래두, 아주 못쓰게 살진 않었다. 자기를 위로허구 변명허구, 그런데두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따지자니 분풀이를 헐 데가 필요허구……. 그게 옳다는 게 아니네……. 그저 사람이란 건 그렇게 비겁하고 옹졸한 족속이고, 산다는 건 그렇게 추저분한 일이라는 말이야.



해방기의 문학은 조선의 고통스러웠던 식민지 시기를 지나 해방을 소망하고 해방을 맞이하는데, 「1945」는 해방의 감격이 아니라 해방은 되었으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해 여전히 목숨을 걸고 아귀다툼을 하는 전재민 구제소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그린다.

위안소를 탈출한 여성 명숙과 미즈코, 식민지 하에 끌려가 노동을 착취 당하며 노역을 했지만 해방으로 인해 오갈 곳을 잃은 사람들. 그들은 조선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 구제소에 모인다. 그들은 기차표를 구해 조선으로 가기 전까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자들은 노동판에 나가고 여자들은 떡장사를 하며 돈을 번다. 구제소 안에서 떡을 찌고 정을 나누며 다정한 동포애를 품는 것은 잠시 뿐. 누구는 일본을 도왔었고, 누구는 일본어를 한다는 이유로 서로를 힐난하고 자기 이해에 위협이 되는 순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


"우린 모두 고통을 겪었어요. 더러운 진창을 지나온 겁니다. 지옥을 건너온 거예요. 다들 그을리고 때에 전 건 마찬가지예요. 정도가 다를 뿐이죠. 진창에 더 깊이 빠진 게, 더 새까맣게 그을린 게, 이 여자들 잘못은 아니잖아요? 우린 이 여자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이해해 줘야 합니다. 운이 나빴을 뿐이에여. 어쩌면 우리 대신, 지독히도 운이 나빴던 거죠. 우리가 씻어 줘야죠. 그 고통을. 지옥에서 건져 내야죠."


「1945」에는 해방 후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위안부 여성 명숙과 선녀가 등장한다. 그들은 해방이 된 후에도 자신들이 당했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잠시나마 한 가족처럼 떡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다가도 명숙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고백하자 그들은 등을 돌린다. 그 시대를 지나 온 죄로 모두 함께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들의 고통은 누군에게도 위로받지 못한다. 해방은 되었으나 여전히 그녀들을 향한 모든 말과 시선에는 낙인이 찍혀있다. 누군가 씻겨 주어야 할, 더러운 존재로. 그들의 고통은 해방되지 못했고 지금도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 연세대 사회학 교수가 수업 시간에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교육자이기 이 전에 한 인간으로서 누군가의 '한 생애'에 대해 어찌 이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위안부'라는 호칭이 아닌 그 분들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알기는 할까? 그녀가 어떤 딸이었고, 누구에게 사랑받았었고, 해방 후 조선으로 돌아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생각이나 해봤을까? 나 또한 단지 명숙이라는 인물의 삶을 상상해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고통의 시간들이 모두 지난 후 태어난 덕에, 그들이 그 시대를 지나 온 죄로 우리 대신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일 수 있다. 운명은 누구도 선택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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