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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평점 :

피해자도, 증인도 없는 법정을 상상해 보았어요. 피해인석과 증인석은 비어 있고, 사건과 사건 번호와 배심원들과 재판장과 피의자만 있는 법정을요. 그럴 때 L의 운동화가 피해자이자 증인이 되어 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피해자가 이미 죽고 없으니, 피해자를 대신할 운동화를 어떻게든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피해자이자 증인이니, 어떻게든 살아서 증언하도록요. _p.55
최근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관련된 기사를 읽었다. 백남준의 대작 '다다익선'이 전시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지난해 2월 '누전에 따른 화재 폭발 위험'이란 공식 진단명을 받고 상영을 중단한 상태였고, 미술관의 상징으로 무늬만 유지해왔던 터였다. '다다익선'은 1986년부터 88년 완성한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상징으로 존재했으나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이를 복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술관은 얼마 전 '다다익선' 작품의 시대성을 위해 '원형 유지'를 하겠다는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복원이 어려운 일부에 LED · LCD 등 모니터 교체를 우선 배제하고 브라운관(CRT) 모니터를 그대로 수리·보완을 이어가겠다는 뜻이었다. 『L의 운동화』를 읽지 않았다면 관심 가지지 않았을 기사였다.
『L의 운동화』는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청년 이한열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실제 미술품 복원 사례들을 통해 '복원'의 의미를 언급하며,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복원'이란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라면, L의 운동화의 원래 모습은 무엇일까? L이 운동화를 사서 처음 신은 때? 혹은 최루탄을 맞을 당시? 이를 통해 L의 운동화를 최대한 복원해야 할지, 최소한의 보존 처리만 해야 할지, 사망선고가 내리진 운동화의 레플리카를 만들 것인지 스스로 질문을 하며 '복원'의 본질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질문 외에도 『L의 운동화』에는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언급된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효순과 미선, 제주4.3사건, 일본군 위안부 사건, 홀로코스트까지. 역사 속에 억울하게 스러져 간 많은 사람들을 우리 기억 속에 되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L의 운동화가 복원된다는 소식을 들은 한 사내가 메일을 보내온다. L이 신었던 '타이거' 운동화는 한때 자신의 운동화이기도 했음을,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던지 자신의 친구인 M도, J도, K도 그 운동화를 신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운동화는 L의 운동화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을 겪어낸 그 시대 모두가.
우리에게도 잊으면 안되는 사건들이 있다. 이제는 스무 분밖에 남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도, 어이없이 눈앞에서 아이들의 죽음을 목도했던 세월호 사건도. 바쁜 삶에 치여 잠시 잊은 것처럼 살아가다가도 소녀상과 노란 리본을 보면 모두 같은 시간으로 기억은 복원된다. 이 시대를 겪어낸 우리 모두의 기억이고 아픔이었으니까. 아름다운 미술품이나 고시대 유물들처럼 귀중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기억을, 어떤 기억의 매개체를 남길 수 있을까.
"나는 역사를 기억의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억은 구체적인 매개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데, L의 운동화 같은 물건이 그 매개물이 아닌가 싶어요." (p.135)
어쩌면 우리가 살아있음은 그러한 '기억'들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보며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느꼈던 기억,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며 함께 위로하고 분노했던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는 한 그 순간에 나는 살아있던 것이라고. 그 기억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최루탄에 쓰러진 L을 부축한 마음, L을 병원 응급실로 옮긴 마음, L의 운동화를 들고 응급실 앞에서 기다린 마음, L이 툭툭 털고 일어나기를 기도한 마음, L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애도한 마음, 그를 영원히 기억하려는 마음, 그 마음들…. L의 운동화가 그가 그 시대에 살아있었음을, 그의 마지막 순간을 피를 토하며 증언하듯 결국 우리의 기억들도 증언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 순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