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있습니다 - 때론 솔직하게 때론 삐딱하게 사노 요코의 일상탐구
사노 요코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7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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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예상치못하게, 마음에 맞아가는 책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 책처럼요.

정말 이 책이 이리도 단숨에 읽힐거라곤 예상도 못했지요.


저자인 사노요코는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염소의 이사>를 펴내며 그림책 작가를 펴냈고,

<사는게 뭐라고> <죽는게 뭐라고> 등의 수필을 썼습니다.

수필집 <하나님도 부처님도 없다>로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받았고, 2010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책의 뒷 부분에는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받을 당시의 수상소감도 실려있지요.

 

표지를 보고, 우리 딸이 제일 좋아하더군요^^

뭔가 재밌으면서, 고양이도 보여서 그런가봅니다.

처음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지. 짐작도 안가더군요.

 

하지만, 점점 책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 부분에선 한 페이지를 모두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가슴에 새기고 싶었어요.

교훈이 담겨있다기보다, 정말 사심없이 빼거나 더함이 없이 제 내면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는 순간이었거든요.


총 4장으로 이뤄진 에세이책은, 각 이야기들이 2~3페이지에 불과할정도로 길지 않은 이야기들이지만

저에겐 어느 작가의 이야기들보다도 더 진실되게 여겨졌고,

솔직히 드러내기 힘든 이야기들조차도 오히려 초월한듯한 느낌으로 작가만의 연륜이 묻어나게 그려냈다고 생각이 들어요.


가난했던 가정이야기. 가정적이지 않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들.

치매 걸린 어머니와의 이야기. 90이 되어가는 본인의 노인으로써의 이야기들.

너무 아무렇지않게 이야기해나가는 모습에 뭔가 간질간질거리는 내면을 들킨것 같고,

그 내면을 긁어주는 느낌까지 들더군요.


<책 속 밑줄>

할머니는 또 "슈바르츠 헤르츠" "슈바르츠 헤르츠"하고 흥얼거리며 부엌 쪽으로 갔다. 당황한 나는 사전을 들고 할머니를 따라갔다. 할머니는 역시 '검정'을 가리키고 '마음'을 가리켰다. 검은 마음은 나쁜 마음이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검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검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알아본다. 너도 나도 검은 마음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안젤리카도 슈바르츠 헤르츠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양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할머니와 나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안젤리카와 대화할 때보다 할머니와 있는 시간이 더 편안하다는 것을.

p82


나도 언젠가 죽겠지. 암으로 죽어도 사고로 죽어도 좋아. 하지만 치매만은 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가는 길은 선택할 수 있지만 죽어가는 여정은 선택할 수 없다. 엄마도 치매가 되겠다고 선택한 게 아니니까.

요즘 엄마는 '고마워'와 '미안해'라는 말을 홍수처럼 쏟아낸다(엄마, 평생 그 말을 저축해뒀구나. 이제 일생을 마치기 전에 다 써버리려고 하는구나).

엄마 침대에 같이 누웠다. "엄마, 나 이제 지쳤어. 엄마도 지쳤지? 같이 천국에 갈까? 천국은 어디 있을까?"

엄마가 말했다. "그래? 의외로 근처에 있는 모양이야."

p96~p97


그네를 부딪친 남자 아이는 항상 난폭했다. 그래서 겁먹었던 것 같다. 여자친구가 생긴 기억은 없는데, 아마 있어도 잊었을 것이다. 아이들 집단에는 장난이 심한 아이가 한둘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어른이 되어 야쿠자 두목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보통 아이였다고 생각한다. 현실이란 그런거다.

세월이 흘러 이젠 내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닌다. 나는 엄마의 귀와 엄마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엄마의 눈으로밖에 아이들을 보지 못했다.

p121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갈 것 같다. 마당에 풀이 무성하다. 엉겅퀴, 도라지, 큰까치수염... 그 외에 두셋정도 이름을 말할 수 있을 뿐 대부분 모른 채 끝난다. 아는 것도 이름만 알지 그 이상은 전혀 모른다.

하늘 가득 별이 반짝인다. 나는 우주에서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다.

거기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뿐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p128


어른들이 작은 물고기 모양부터 큰 것까지 차례차례 잘라내어 아이들에게 건넸다.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봐"라고 하니 아이들 모두 흥분하여 굵은 붓으로 원색을 더덕더덕 칠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열다섯 마리 정도의 파워 고이노보리가 완성되었다. 추상적인 자태로 마치 몸부림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제일 큰 비단잉어와 보통 잉어는 어른 둘이서 만들었는데 비늘 같은 걸 성실하게 그렸더니 바보처럼 평범해보였다.

바닷가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

넓은 하늘과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스무 마리 가까운 잉어가 나란히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가장 큰 비단잉어와 보통 잉어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둘 다 미대 출신인데.

둘이서 "좀 창피하네"하고 얼굴을 붉혔다가 "우리 아이들 천재다"하고 웃었다.

p182


완성되고 나니 기타카루이자와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일 년 내내 여기서 지냈다. 살아보니 일 년 중 겨울이 가장 좋았다.

매일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봄이 끝날 무렵엔 산이 온통 잿빛을 띤 분홍색으로 부풀어 올랐다. 마치 산이 웃음을 참는 듯 보였다. 새싹이 하룻밤 사이에 1센티나 자란 걸 확인했을 땐 정말 놀랐다. 신기하게도 매년 놀란다. 놀라움은 기쁨이다. 그 기쁨은 공짜다. 마당에 자란 머위의 어린 꽃줄기도 두릅도 다 공짜다. 소리없이 쌓이는 눈을 멍하니 볼 때의 도취감도 끝없이 펼쳐진 은세계도 공짜다. 7월과 8월에만 스토브를 켜지 않았다. 나는 매일 장작을 넣고 춤추는 불꽃을 응시했고, 불꽃이 켜지는 걸 보기 위해 스토브 옆에 딱 붙어 담을 흘렸다. 안타깝게도 장작은 공짜가 아니었다.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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