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형수가 된 여자
엘리자베스 L. 실버 지음, 신상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10년 전 살인죄로 사형수가 된 노아 P. 싱글턴은 6개월 후 사형집행이 예정돼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희생자의 어머니이자 거대 로펌의 시니어 파트너인 말린 딕슨이 나타납니다.
그녀는 사형 반대청원을 넣겠다며 10년 전 사건 당일의 진실을 설명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말린 딕슨과 함께 온 신참 변호사 올리버는 노아가 감추고 있는 사실이 있음을 확신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노아는 10년 전 법정에서도 그랬듯이 입을 굳게 다뭅니다.
노아는 올리버가 갖고 온 공판기록을 읽으면서 자신에게 닥친 비극의 전말을 회상하고,
동시에 나름의 회고록, 즉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진실을 한 줄씩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 ● ●
태어난 후 한시도 평탄한 적이 없는 삶을 살아오다가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수가 된 한 여자의 드라마 같은 일생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출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는 사형수 노아의 회고,
죽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노아를 용서하려는 진짜 이유를 밝히는 말린 딕슨의 고백,
노아와의 거듭된 면회를 통해 10년 전 사건의 진실을 캐려는 올리버의 노력이 그것입니다.
보통 사형수와 변호사가 만나는 이야기라면 극적인 반전을 통해 무죄를 입증하거나
최소한 사형제도에 관한 논쟁을 펼쳐 사형수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개입니다.
사형수는 어떻게든 진실을 위한 단서를 기억하려 애쓰고,
사형수를 돕는 변호사는 거대한 권력이나 악에 맞서 사방팔방 노력을 경주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형수가 된 여자’는 그런 비현실적이고 상업적인 전개 대신
죄와 벌이라는, 조금은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난해하거나 어렵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행한 출생과 성장, 한순간에 삶을 추락시킨 임신과 낙태,
23년 만에 나타난 아버지와의 재회와 그 재회가 불러온 끔찍한 살인사건,
과잉보호 속에 키운 딸에 대한 집착과 그 집착이 일으킨 돌이킬 수 없는 비극 등
다분히 막장에 가까운 캐릭터와 사건들이 등장하여 내내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왜 사형수 노아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도, 감형이나 사형중지를 애걸하지도 않느냐는 점입니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정황을 보면 분명 억울한 사연이 있을 법한데,
또, 정말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왜 노아는 사형집행을 6개월 앞둔 지금도 저렇게 냉소적이고 쿨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만, 노아가 회고하는 자신의 일생은 조금은 지루하게 읽히는 지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최후까지 감춘 진실을 알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대목입니다.
딸을 살해한 노아에게 용서의 손을 내밀면서 실제로는 다른 속셈을 지닌 말린 딕슨의 계획도
독자에게 끝까지 미스터리와 긴장감을 안겨주는데,
후반에 노아의 회고를 통해 드러난 진실은 말린 딕슨을 한편으론 악녀로,
또 다른 한편으론 딸을 잃은 비극적인 어머니로 만듦으로써
독자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사형수가 극적으로 무죄를 입증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사형제도에 관한 고지식한 논쟁을 다룬 이야기도 아니지만,
한 여자의 굴곡진 일생과 사형수가 되기까지 벌어진 기막힌 사연들에 대한 서사는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다양한 여운을 남겨줍니다.
어딘가 모호하고 작위적으로 오픈된 듯한 엔딩이 아쉽긴 하지만
묵직한 비극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기억에 남을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