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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의 은밀한 업무일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8
도쿠나가 케이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달콤 음흉한 블랙코미디를 연상시키는 23글자에 달하는 긴 제목, 게다가 다분히 의도가 엿보이는 핑크빛 손 글씨 폰트와 일러스트 때문에 왠지 이 책을 읽고 나면 빙긋 웃음이 나거나 유쾌한 기분이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이리저리 뒤숭숭한 일들도 많고, 무겁거나 잔혹하거나 괴이한 책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아마도 머리 좀 식히라고 적당한 타이밍에 이 책이 제 손에 들어왔나 봅니다.
이야기는 심플합니다. 만화가를 지망하며 5년째 택배회사 콜센터 계약직으로 일하는 25살의 청춘 구에다 아야카가 새로 부임한 센터장이자 자칭 스파이인 46살의 기무라 이치로 덕분에 정신없이 보낸 약 한 달 동안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다루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해프닝 모음집 같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그 속에 녹아있는 유쾌하고 찡한 청춘의 성장담에 있습니다. 20살도 아니고, 30살도 아닌 어중간한 25살의 나이, 프로 만화가도 아니고 콜센터의 정식 직원도 아닌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 더구나 자신이 꿈꾸는 순정만화가에 대한 주위의 편견을 이겨낼 자신이 없는 소심함 등 25살 아야카의 청춘은 모든 것이 어정쩡하기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삶에 느닷없이 끼어든 기무라로 인해 아야카는 롤러코스터 같은 한 달의 시간을 보내게 되고, 자신의 인생에서 오랫동안 기억엔 남을만한 성장의 시간을 얻습니다. 20살 연상의 남자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학창시절 이후 잊고 있던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악동’ 노릇도 해보게 되고, 모처럼 자신감 있는 기분으로 만화를 그려 ‘방문 투고’까지 할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굴러가주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기무라의 존재감은 아야카에게 기분 좋은 삶의 가이드가 돼주었고, 언젠가 한번쯤 우연히라도 그와 재회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기무라는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만나고 싶은 판타지 속의 존재입니다. 별것 아닌 언행으로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가 하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유발시켜 ‘그래도 열심히!’라고 한번쯤 마음먹게 만들어 줍니다. 후줄근한 양복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백발, 매사에 허허실실로 일관하는 느긋함, 또 고등어와 배추를 함께 넣은 ‘의문의 전골’을 요리하는 중년의 남자로 포장돼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어쩌면 내 주위에도 저런 사람이 있을지도...’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생활감 넘치는 캐릭터입니다. 동시에 어딘가 진실을 감추고 있는 신비한 구석까지 갖추고 있어서 그가 벌일 스파이 역할이 읽는 내내 궁금했는데, 작가는 그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킬 깔끔하고 기분 좋은 엔딩을 마련해놓았습니다.
두 주인공 외에도,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게 고객의 클레임을 응대하는 오카모토, 외모만 보면 화류계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한없이 착하고 순정파인 히로미, 콜센터를 회자하는 모든 소문의 진원지이자 공포의 독신녀인 다치바나 여사 등 함께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매력적인 캐릭터라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미생’처럼 오피스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롭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평범한 격언이지만 기무라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던 25살의 아야카에게 남긴 인상적인 한마디를 인용하면서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사람의 인생이란 하룻밤만 공연되는 쇼 같은 거라고 생각해. 딱 한 번뿐이니까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아깝잖아? 게다가 전력을 다하는데 있어서는 본인이 즐거워야 하고, 그게 제일 중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