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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 들판에서
리스 보엔 지음, 정서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1년 4월
평점 :
런던 공습에 이어 독일군의 본토 공격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영국 전역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1941년. 런던 근교 켄트의 대저택 팔리 플레이스의 웨스트햄 백작 가문은 하늘에서 떨어진 난데없는 의문의 시체 때문에 혼란에 빠집니다. 일련의 조사 끝에 모종의 목적을 갖고 침투하려던 독일 스파이라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웨스트햄 백작의 3녀인 패멀라를 흠모해온 MI5(영국 정보국) 요원 벤 크로스웰은 상부로부터 이 수상한 시체가 접선하려던 자가 누군지 비밀리에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한편 암호해독 기관에서 근무하는 패멀라는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내려와 벤 크로스웰의 조사에 동참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스파이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내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역사 미스터리 첩보물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팔리 저택과 인근에 거주하는 인물들 가운데 스파이와 접선하려던 자, 즉 나치 독일에 협조하는 배신자를 찾아내는 이야기인데, 재미있는 건 딱딱하고 무거운 첩보물이 아니라 ‘종합선물세트’ 같은 다양한 장르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전쟁과 스파이가 전면에 포진돼있지만 달달한 로맨스와 함께 전쟁으로 인해 억압받은 청춘들의 들끓는 욕망도 적잖은 분량과 비중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작의 3녀 패멀라를 오래 전부터 흠모해온 벤은 그녀의 마음이 온통 자신의 절친인 제레미에게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전쟁은 세 남녀를 각각 정보국(벤), 암호해독 기관(패멀라), 전쟁터(제레미)로 흩어놓았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팔리 플레이스로 돌아오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벤은 독일 스파이와 접선하려던 배신자를 찾기 위해, 패멀라는 연이은 야근에 시달린 뒤 반강제로 받은 휴가 때문에, 그리고 제레미는 독일군 포로가 됐다가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면서 다시금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주인공이지만 슈퍼 히어로가 아닌 탓에 벤의 미션은 다소 지루하고 답답한 행보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사랑하는 패멀러의 도움으로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해냅니다. 그 와중에도 벤은 눈앞에서 제레미와 패멀러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겪는데 이 대목은 전쟁과 스파이의 공포를 잊게 만들 정도로 달달하게 전개됩니다. 특히 귀환한 제레미가 사랑보다 자신의 육체에만 관심을 갖자 실망과 회의를 느끼는 패멀라의 불안한 심리라든가 파티와 여자만 즐기려는 ‘타고난 금수저 한량’인 제레미의 폭주는 ‘배신자 찾기’ 못잖게 삼각 로맨스가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배신자 찾기’와 ‘삼각 로맨스’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던 건 욕구를 배출하지 못해 폭발 직전에 이른 당시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교계에 진출해 멋진 남자를 만나려던 명문가의 딸들은 모든 걸 금지시킨 전쟁을 원망했고, 자유연애와 방종한 성(性)에 눈이 벌개졌던 남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를 전쟁터로 끌려 나가야만 했습니다. 억압된 욕구는 때론 독일군의 공습이 이뤄지는 한밤중에 옥상에서 위험천만한 샴페인 파티를 벌이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왜 하필 이런 세상에 태어났을까, 라는 한숨과 자조가 생생하게 귀에 들리는 듯한 당시 청춘들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스릴 넘치는 전쟁첩보물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밋밋하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여러 장르가 재치 있게 믹스된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리스 보엔은 다수의 미스터리 시리즈를 집필한 작가라고 하는데, 검색해보니 한국에는 193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탐정 레이디 조지애나’(2012, 문학동네) 단 한 편만 출간된 상태입니다.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조지애나가 왕족 신분을 벗어던지고 탐정으로 거듭나는 코지 미스터리”라는데, 딱히 제 취향은 아니지만 시대 배경도 호기심을 끌고 왠지 ‘팔리 들판에서’처럼 매력적인 캐릭터와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다른 독자의 서평에서도 언급된 내용인데, 꽤 자주 등장하는 “이크!”라는 감탄사가 눈에 거슬린 게 사실입니다. 때론 분위기를 확 깨뜨리기도 했는데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었을지 궁금합니다. 또 ‘MI5’와 ‘MI파이브’가 혼재된 건 교정의 오류로 보였고, ‘제5열’로 표기됐더라면 좀더 이해하기 쉬웠을 ‘제오열’은 “내부의 적을 상징한다.”는 간단한 각주나 설명조차 없어서 처음 이 단어를 접하는 독자는 다소 어리둥절했을 거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