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 그 치명적 유혹
피터 H. 글렉 지음, 환경운동연합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꽤 오래전 TV를 통해 생수의 진실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것은 생수와 용기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PET병에 담긴 1급수의 생수를 개봉한 후 상온에 놔두면 한나절쯤 지나 박테리아가 번식하면서 하급수로 변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주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변화는 냉장 보관을 한다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결국 500ml 생수 한 병을 살 경우 그 많은 양을 한꺼번에 즉시 마셔야 상책인듯 싶었다. 이 프로그램이 방영된 다음날부터 직장 동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생수 대신 캔 음료수를 사먹기 시작했다. 누군가 생수를 먹는다 해도 눈을 질끈 감고 다 마셔버리거나 먹을 만큼만 먹고 그대로 버리기도 했다. 특히 식당에서 주는 페트병에 담긴 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음식에 대한 파동이 모두 그러하듯이 그토록 생활습관을 바꾸고 법썩을 떨게 했던 생수 파동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잊혀져 갔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생수를 마시기 시작했고, 언제 생수에 문제가 있었냐는 듯 들고 다니며 마시고, 다이어트를 위해 더 마시고, 주말이면 마트에 가서 어김없이 2리터짜리 생수 한 박스를 장바구니에 챙겨 넣었다. 이후에도 취수원 문제, 미생물(균) 문제와 같은 몇몇 생수관련 기사들이 보도되었지만 그때 TV 프로그램만큼 크게 영향력을 미쳤던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어찌됐든 생수는 신뢰할 수 없는 식품임을 버젓이 드러내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리의 일상 가운데 출렁이고 있는 불한당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해결되었는가에 대해 아무도 따져 묻지 않는다.

반면 저자인 피터 글렉은 생수 문제에 대해 꾸준히 따져 묻고 있는 몇 안되는 환경운동가이다. 그는 1998년부터 지금까지 십여년이 넘도록 깨끗한 물을 누릴 시민의 권리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도 이미 겪었던 생수의 PET병 문제, 취수원과 오염 문제도 역시 빠지지 않고 그의 연구 내용에 등장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책을 먹거리의 관점에서 선택했었다. 과자나 패스트푸드처럼 몸에 좋지 않은 식품의 진실도 충격이지만 최근들어 몸에 좋다고 알려진 우유나 채소마저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문제점들을 숨기고 있었기에 생수는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말 믿고 마셔도 좋을지, 건강 차원에서 생수문제를 바라봤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생수는 단지 개인의 건강 차원이 아니라 사회와 환경 차원에서 다루어야 하는 문제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생수는 마치 석유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기업들이 맑고 좋은 물을 찾아 그것을 생수병에 담는다 해도 사람들이 계속 생수를 소비하는 한 결국 취수원이 마르고 주변의 동식물과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자꾸 퍼내면 고갈되며 환경이 파괴되는 것이다. 또한 생수를 담는 용기인 PET는 유해물질 함유 여부에 어떤 결과도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이 없다. 가정이나 사무실에 거치하는 냉온수기용 대형물통의 경우 비스페놀에이라는 잠재적 위해물질이 나오고, PVC에서는 프탈레이트, 폴리에틸렌에서는 스타이렌과 같은 유해물질이 나오는데 과연 유사한 플라스틱류인 PET가 인체에 무해하다고 간주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일종의 X파일처럼 산업과 경제를 위해 숨겨진 진실이 있을거라는 의혹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생수는 탄소발자국이 매우 큰 제품이다. PET는 석유를 원료로 하는 전형적인 제품이며, PET 1kg을 생산하는데 원유 3리터가 필요하다. 여기에 PET 공정과정에 소모되는 에너지와 취수원으로부터 공급지까지 생수를 운반하는데 소모되는 연료를 생각해 보면 생수 한 병 부피의 1/4 혹은 그 이상이 원유라는 끔찍한 결론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PET는 차치하고라도 그 안의 생수 자체는 적어도 깨끗하고 믿을만할까? 모두가 예상하는 바이지만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폴란드 스프링 생수는 실제 미국 메인 주의 폴란드 스프링에서 취수한 물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며 현재는 상표로서만 그 명성을 유지할 뿐이다. 그밖에 다수의 유명 회사 제품들도 다양한 취수원에서 물을 퍼 와서 맛을 동일하게 만들기 위해 후처리를 거친다. 상표로 사용되는 취수원의 이름만 믿고 그 물이 천연의 물이라 기대하지만 실상 심한 경우 수돗물이 원수(原水)일 가능성까지 있다. 이렇게 상품으로 쏟아져 나오는 생수에 거짓이 횡횡한 까닭은 관리당국의 허술한 규정과 안이한 관리 때문이다. 우리나라보다 생수 소비량이 훨씬 많은 미국의 경우에도 생수는 FDA(Food and Drug Administration, 미국식품의약국)에서 관리한다. 즉, 규정을 어길 경우 강제 조치할 권한이 없는 기관에서 생수를 관리하는 것이다. 만일 생수 회사가 규정을 어겨 경고를 받는다 할지라도 사후에 경고 받은 사항을 개선하거나 제품을 회수했는지의 여부에 대해 확인하는 경우도 드물다. 식품에 대해 상당히 깐깐할 것이라 생각했던 미국의 경우도 생수관련 법규나 조처에 대해서는 이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다(그렇다면 수입 생수는 더욱 신뢰하기 어렵다는 의미 아닌가!).

취수원도 불분명하고 레이블도 엉성한 생수를 그토록 광적으로 신뢰하게 만든 원인은 바로 광고의 힘이다. 늘씬하고 탄탄한 몸매의 남녀가 힘차게 달린 후 생수를 마시는 모습이나 초록빛 나무가 울창한 숲속에서 맑은 물이 반짝이는 풍경, 좀 더 역동적으로는 광천수가 분출하며 시원스레 터지는 장면, 이 모든 것이 무의식적으로 생수의 이미지를 구축해온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이에 더해 건강에 대한 관심, 하루에 물을 8잔 정도 마셔야 좋다는 연구 결과, 광천수나 샘물에 함유된 미네랄에 관한 정보는 실제 그러한 제품이 극히 적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수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이제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 필요가 있다. 생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맑고 신선한 물이 아니며 오히려 생수 산업으로 인해 파괴되는 환경을 고려해 볼 때 과연 마실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생수에 대한 근거 없는 신뢰를 버리고 식수에 대한 다른 대책을 찾는다면 남은 것은 오직 수돗물 뿐이다. 소독약품이 가득하고 관리가 이뤄지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수도관을 통해 공급되는 바로 그 수돗물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대로 받아 마시기가 꺼려지는 수돗물은 실제 그렇게 마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깨끗한 물이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국가에서 관리한다고 하면 오히려 못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불신이 국가의 물 관리를 철저히 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실제 뉴욕의 경우 수돗물이 그대로 받아 마셔도 좋은 상태로 개선된지가 꽤 오래 되었다. 서울의 수돗물 역시 그대로 받아 마셔도 좋다는 기사가 몇 년전 보도된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생활의 편리함과 기존 수돗물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생수에 속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생수 공급을 중단하고 모두 수돗물로 돌아가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가 제안하는 것은 윤리적인 생수 공급과 미래의 더 나은 수돗물에 대한 진심어린 조언과 대안책이다. 그리고 생수와 수돗물의 미래에는 단지 살만한 좋은 환경을 가진 국가뿐만 아니라 아직도 미비한 수자원 환경을 가진 후진국에 대한 배려도 포함된다.

<생수, 그 치명적 유혹>은 생수의 진실을 고발하는 실태 보고서 차원을 너머 방대한 관련 자료와 저서에 근거해 사실을 밝히고 적합한 방법을 모색하는 적극적인 제안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록으로 곁들여진 우리나라 생수 현황에 대한 자료들은 생수의 문제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임을 알려주며, 이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제 생수에 대한 관심은 건강의 차원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 생수의 치명적인 유혹에서 벗어나 깨끗한 물을 마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려야 하고, 이제 현명한 생수와 수돗물의 사용을 통해 생태계를 지켜가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가 시민으로서, 소비자로서 아는 분량과 보는 관점이 달라질 때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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