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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평점 :
뉴스를 제대로 읽고 싶어 책을 읽었다. 생각해보니 요즘엔 뉴스를 보지 않는다. 뉴스를 보지도 않으면서 뉴스 읽는 방법이 왜 궁금했을까. 아무튼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뉴스 역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말해주는 대로 받아먹지 말고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겠다. 뉴스에 광고가 붙어있는 한 저자가 열거하는 뉴스의 단점이 단 하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뉴스가 세상을 좀 더 정확하고 다양하고 알기 쉽게 말해주길 기대해본다. 25살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걸작을 쓴 저자는 아직까지도 좋은 책을 써내고 있다. 어렸을 때 성공하는 건 삼재라고 들었는데.
세상은 완벽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완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사지고 세상에 나와 현실의 불완전성과 치유될 수 없는 모순에 치여 회의주의로 쓸려가게 된다.
뉴스는 분노와 두려움에 더해 시청자인 내가 그 문제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회의감을 마지막으로 얹어주어 신문에 남의 일에 세상에 눈을 돌리게 한다.
뉴스라는 것도 불완전한 인간들이 조사하고 작성하고 선택하여 내보내는 것이고 이 세상의 두 모습인 긍정적이고 행복한 장면과 어둡고 분노하게 되는 장면 중 한 장면만을 집중적으로 택해서 보여주는데다 거기에 시청자의 확보라는 문제까지 고려되야 하는 것이기에 주의 깊고 조심스레 접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힘에 겨운 사람들인데 목숨 걸고 반군들의 공격을 피해 전쟁의 실태를 고발하는 르포 기사를 읽으며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과장인지 허위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모든 기사의 사실 여부와 그 기사를 통해 기자가 말하려는 주장의 올고 그름을 판단하는 수고로움을 들여야 하겠지만, 그게 가능할까. 이러한 주장 역시 대부분의 정말 중요하나 사람들이 관심은 주지 않는 기사와 같은 처지에 빠지는 건 아닐까.
해외 뉴스에 있어서 언론사는 그들의 정치적 부패, 반군과의 전쟁, 전쟁 속에 죽어가는 무고한 시민들, 질병만을 보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다름없는 그들의 일상적인 삶도 보도함으로써 그곳 역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한 사회라는 것을 알게 해줘야 한다.
또한 사람들이 뉴스에 관심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뉴스 전달 방법을 더 연구해야 한다.
뉴스가 성인들의 윤리교사라면 교사자격증을 주는 권한을 사사로이 기업에 줄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제한해야 하며 윤리에 어긋나는 기사는 제재해야 하는 건가?
한 마디도 틀린 것 없이 구구절절이 옳은 뉴스가 어떠해야 하며 뉴스를 읽는 이는 어떠해야 한다는 이 의견들은 뉴스가 광고를 유치하고 광고주들은 독자나 시청자가 많은 뉴스에 광고를 준다는 이유로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
11쪽
철학자 헤겔이 주장했듯,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
13쪽
교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교육은 방송 화면과 전파를 통해 이뤄진다.
공적인 삶의 풍조를 조성
공동체에 대한 인상을 형성
만약 당신이 한 나라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미술관, 교육부, 또는 유명 소설가들의 지브로 향하지 마라. 정치체의 신경중추인 뉴스 본부로 곧장 탱크를 몰고 가라.
17쪽
뉴스가 어째서 중요하냐고 묻는 건 뉴스가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하려는 게 아니라, 보다 자의식을 갖고 뉴스를 수용하려 할 때 얻게 되는 보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18쪽
오늘날 고요한 순간을 누린다는 건 얼마나 커다란 성취인가.
: 단지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아 놓는다거나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마음적으로도 고요한 순간을 누린다는 건 정말 귀한 순간이다.
32쪽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33쪽
편향은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 분투하고 개념이나 사건을 판단할 수 있는 가치의 척도를 제시한다.
우리의 임무는 편향된 시각이 생산한 더 믿을 만하고 유익한 뉴스에 올라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34쪽
언론이 칭찬받을 만한 지점은, 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타당성을 알아내는 (지적 편향을 통해 갈고닦은) 기술이다.
언론은 민주주의의 보증인이다.
35쪽
뉴스와 달리 종교는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한꺼번에, 게다가 한 번만 하고 끝내버린다면 우리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36쪽
권력을 공고히 하길 소망하는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빤히 보이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 또는 그녀는 언론으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37쪽
바로 조금 전 긴급해 보였던 사안들이 현실과 계속 관계를 맺은 채 진행 중이라는 인식을 대중이 갖지 않도록 조처하기만 하면 된다.
현상태는 뉴스를 통제하기보다 오히려 흘러넘치게 할 때 오래도록 충실하게 유지될 수 있다.
38쪽
사건들을 맥락화하고 대중화
48쪽
인간이라는 종에 절망하지 않을 이유가 얼마 없지 싶다.
7세의 수리 크루즈가 자신만의 패션 브랜드를 론칭하다
50쪽
참 이상한 일이긴 한데, 동전의 훨씬 유쾌한 쪽은 결코 뉴스가 되지 않는다. 사실이어도 매체에는 싣지 못할 기사들이 넘쳐난다.
6500만 명의 사람들이 매일 밤 누군가를 죽이거나 때리지 않고 잠자리에 든다.
51쪽
뉴스는 어떤 이야기를 조명하고 어떤 이야기를 빼 버릴지 선택하면서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이다.
52쪽
유리는 뉴스란 기본적으로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한 묶음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뉴스가 제공하는 국가에 대한 소식들이 국가 그 자체는 아니다.
53쪽
특정 시점에 국가가 (자신의 약점을 벌충하기 위해) 가장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게 무언지가 뉴스 기사 목록 막후의 선정 과정을 결정짓는 것이다.
57쪽
뉴스는 사회의 악행을 폭로하고 그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사회를 돕는 한편, 선함과 용서와 분별력을 충분히 갖춘, 구성원들이 기여하기를 원하는 가상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중요한 임무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59쪽
뉴스와 오랜 시간을 보낼수록 몹시 익숙하게 될 두 가지 감정은 두려움과 분노다.
63쪽
혹자는 다음과 같은 비장한 믿음을 갖게 되기도 한다. 세상 문제들은 원래 다 해결될 수 있는데, 우리가 사기꾼들과 얼간이들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매일매일 신선한 증거가 제공되는 이 단순한 이유로 인해 충분히 신속하고 단호하게 다뤄지지 않을 뿐이라고. 사안에 관련된 해결책은 존재하고 있다고, 다만 엉뚱한 사람들의 손안에 있는 것뿐이라고. 여기에 뉴스의 핵심적인 역설이 있다.
: 대선 때마다 나는 메시아를 영접하는 듯한 기분으로 투표하긴 한다. 예수님도 사실 무엇 하나 변화시키지 못했는데 하물며 메시아를 자청하는 사람이라야 어떠하겠나.
66쪽
뉴스는 분노에 찬 반응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 뉴스는 우리가 정당한 이유로, 정당한 수준에서, 정당한 시간 동안 화를 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건설적인 기획의 일부가 되도록 말이다.
67쪽
정치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정치의 핵심 영역에서 한 사람이나 한 정당이 단숨에 성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 한 사람이 한 정당이 단숨에 성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한 사람이나 한 정당이 한 나라를 단숨에 망치는 건 왜 이리 쉬운가. 수십조의 상상도 안되는 돈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린다.
74쪽
뉴스는 무엇보다 정신 건강, 건축, 여가, 가족 구조, 연애, 회사 경영 방식, 교육과정과 신분질서 등을 취재해야 한다. 이런 영역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의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보다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76쪽
꼬투리 잡기는 그저 어떻게 하면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고갈되는 바람에 막막해진 한 무리의 개인들에게 앙갚음을 행할 계기를 제공할 뿐이다.
: 기자들은 정말로 반대파에 있는 사람의 발언을 앞뒤 잘라내어 의미를 왜곡해서 내보내곤 하지만 간혹 어떤 인물들은 자신의 본심을 무심결에 내뱉기도 한다.
하지만 수치심이 정말로 인류 개혁에 가장 쓸모 있는 도구로 이용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우리는 모멸을 당하면 더 나은 인간이 될까? 두려움은 가르침을 줄까?
80쪽
플로베르의 눈에 신문은 사람을 오염시키는 것이어서, 그는 오로지 완전한 문맹자와 무지렁이 프랑스인들만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81쪽
언론은 이제 중요한 문제에 대한 복잡하면서도 지적인 논평을 생산해내는 일을 자기네 직원들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고, 독자들의 정신은 각자의 특별한 여정, 탐구, 성찰을 멈추고 그 일들을 <르피가로>의 논설위원과 그 동류의 인간들이 솜씨 좋게 포장한 결론을 그저 따르면 된다고 은근히 제안했다.
83쪽
이제 언론은, 한 인간을 상상력도 없고 창조적이지도 않고 마음도 교활한데 그와 동시에 얻어들은 건 무척이나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헛똑똑이는 관거에는 오직 천재들만이 알 수 있었던 것들을 일상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얼간이다.
: 진짜 지식과 지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85쪽
주요 뉴스들은 현실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우리와 똑같이 편견, 실수, 미혹에 시달리는 필멸의 존재인 편집자들이 무엇이 정말 중요할까라는 질문에 맨 처음 떠올린 생각을 통해 정해진다.
94쪽
어떤 의미에서 계몽주의의 위대한 목표는 성취되었다. 이제 평균적인 시민들은 지구 상 모든 국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훨씬 놀라운 사실을 어쩔 수 없이 확인하게 된다. 아무도 그 사건들에 딱히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96쪽
대중은 사실 무지보다는 무관심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무언가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될 수 있느냐다.
99쪽
우리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누군가가 평범한 하루를 보낸 적이 있기나 한지 알지 못한다. 그런 것은 서구 언론이 취재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100쪽
아디스아바바의 거리 파티, 페루에서의 사랑, 몽골에서의 인척 관계에 대해 알게 된다면, 대중은 언젠가 닥칠 파괴적인 태풍이나 폭력적인 쿠데타를 맞닥뜨렸을 때 그에 대해 좀 더 관심을 보이려 할 것이다.
: 그 누가 문학 작품이 아닌 뉴스에서 아디스아바바의 거리 파티에 대해, 페루에 살고 있는 한 커플의 애절한 사랑에 대해, 몽골에서의 인척 관계에 대한 내용을 보고 싶어하고 관심을 가질까.
101쪽
해외 뉴스는 우리가 어디서 누구와 싸우거나 교역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동정심을 표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싶어 한다.
138쪽
나는 내가 세상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사진을 보고 수많은 출판물들을 읽었음에도 우리 행성 위에 존재하는 나라들 대부분에 대한 내 심상이 기껏해야 하나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50쪽
주기율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나무들, 여러분의 연인, 사무실)은 실은 이게 전부다.
152쪽
아무리 해설가의 설명을 들어도 한 시간만 지나면 개념들은 머리에서 새어나가버리기 십상이다.
: 경제 뉴스든, 정치 뉴스든 전문가의 해설을 들을 때는 `아 이게 그런 말이고 그래서 이런 결과를 불러올 수 있고 그래서 좋은 거구나, 나쁜 거구나 생각하는데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앞에 말한 부분은 다 사라지고 좋은지 나쁜지만 남아서 나중에는 `암튼 이게 좋은 거라고!!(내가 신뢰하는 전문가가 말했다고)`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내 의견이라는 게 있긴 한가.
154쪽
자본주의가 건설한 이 세상은 왜 (조금 감상적이지만) 더 좋아질 수 없을까? 어째서 여전히 도처에 이토록 많은 괴로움이 존재할까? 어째서 누구는 너무 많이 갖고 누구는 너무 적게 갖는 것일까? 어째서 대부분의 직업은 바보 같을까? 어째서 안전과 여가가 더 보장될 수 없을까? 어째서 불안과 공포가 거의 모든 곳에서 지속되고 있을까?
155쪽
어른이 된다는 건 수많은 희망을 단호하게 묻어버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 희망의 좌절이 반복되는 경험치가 일정 정도 쌓여 희망에 대한 무력감이 쌓이는 것을 어른이 되었다고 표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희망하지 않거나 이룰 수 있는 작은 희망만을 가지고 있을 때. 어른이 된 건가?
166쪽
기자들이 부여받은 이 특권적이고 흔치 않은 관찰 기회는 투자자들이 갖는 단 하나의 질문에 답하는 데만 집중적으로 쓰일 뿐이다. ˝어느 회사에 우리 돈을 투자해야 하는가?˝
167쪽
이 분야의 기자들은 자기들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해달라고, 자기들이 받아 적는 숫자에 이제는 인생을 덧붙이게 해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169쪽
우리가 숫자 뒤에 감춰진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자본주의를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현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오싹할 정도로 질서 정연한 사무실과 제조 시설의 살균된 아름다움을 탐구할 수 있도록 기자들은 우리를 안내해야 한다.
175쪽
우리 시대의 가장 막대한 부가 가장 의미 있는 상품과 서비스, 그러니까 시나 연애 상담 같은 것을 판매함으로써 축적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직업이 의미 있다고 느끼는 건 언제일까? 하루가 끝날 무렵, 내 일이 어떤 면에서는 미약하게나마 타인의 비참함을 줄이거나 만족감을 늘리는 데 도움을 준 것 같다고 느낄 때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 하고, 나아가 동료 인간들의 삶에 우리의 활동이 미친 영향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노동이 무척이나 자잘하게 세분화될 때, 혹은 타인의 안녕에 극히 짧은 순간만 영향을 주거나 아예 그럴 일도 없을 물건을 만드는 데 경력 전체를 바칠 때, 노동의 의미는 약화되버린다. 주식시장은 이런 의문에 관심을 둘 리 없어, 의미란 건 특별한 일에나 걸맞은 거라고 답할 것이다.
177쪽
결론적으로, 경제 뉴스에 나오는 숫자와 그래프는 단지 우리가 건설한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간략한 기호로 속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즈니스는 거기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궁극적으로 너무 흥미롭고 또 중요하다.
180쪽
노력과 헌신이 전부예요.
183쪽
영웅 숭배는 수동적이고 열등하며, 무능을 표출하는 행위이자, 자신의 꿈과 포부를 충실히 좇지 않기에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해서 아예 `도피하는` 길을 택했다는 증거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187쪽
첫 번째 교훈은 우리가 선망하는 대상에서 정확히 어떤 점이 흥미로운지 좀 더 분명하게 알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189쪽
우리 내면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덕성, 즉 용기 또는 활기, 지혜 혹은 창의성, 신뢰 혹은 용서 같은 미덕의 안내자로 적합한 셀러브리티를 찾아내고자 노력해야 한다.
190쪽
교훈은 전이 가능하고 미덕은 활동 영역을 가로질러 영향을 끼친다.
191쪽
경탄하기를 거부하는 것, 성공한 사람의 성취에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는 것은 타당한 근거 없이 오만하게 자신을 중요한 앎으로부터 떼어내버리는 짓이다.
196쪽
˝더이상 이 꼴로는 못 살겠어!
동년배나 같은 성별인 사람이 유력자들과 어울려 다니고 수백만 명의 관심을 끌면서 사업체를 사고파는 기사를 읽고 나서 이를 관대하게 받아들이고 잔잔한 기쁨을 느낄 사람은 심각하게 상상력이 빈곤한 이들뿐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뉴스는 아무 의심 없이 무방비 상태로 있는 소비자들에게 주기적으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197쪽
시기심을 주의 깊게 응시하는 건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발걸음을 떼는 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시기심을 억제하려 애쓰는 대신 이 감정을 연구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삶을 차분히 살펴볼 시간을 갖는다면, 그들이 이룬 것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이 우리가 더 나은 사람으로 진화하는 데 진정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198쪽
언론은 성공담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실제로 모방할 수 있는 사례연구로서 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201쪽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다.
202쪽
대도시에서, 존중이란 희소하고 야박하게 배급되는 일용품이며, 무관심은 이곳의 규범이다.
명성은 시간을 절약하게 해준다.
203쪽
전형적인 유명인사는 유년기에는 (거의 틀림없이) 거절의 경험이 도사리고 있다.
204쪽
한때 스스로를 얼마나 투명인간처럼 느껴야 했는지가 훗날 얼마나 간절히 특별하고 널리 알려진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를 결정한다.
205쪽
10여 년 정도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사는 50여 년에 대처할 힘을 얻을 수 있다.
셀러브리티 문화의 진짜 원인은 자기도취적인 얄팍함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친절함의 부족이다.
206쪽
존경은 친절한 행동 같은 명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잡지의 표지 인물이 되어야 얻을 수 있게 된다.
208쪽
대중의 환심을 얻으려 하는 자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관심을 고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 어떤 관심이든 감사히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210쪽
우리는 주목받지 못해 화가 나 있고, 그래서 우리 몫을 빼앗아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단죄함으로써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211쪽
험담을 늘어놓고 싶은 충동과 명성에 대한 욕망은 똑같은 아픔에서 비롯한다. 양쪽 다 관심의 결핍에 기인한 것이다.
212쪽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품격 있는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 해결책이 좀 더 널리 받아들여진다면 극소수 사람들에게 모욕을 안기거나 혹은 다수 속에서 눈에 띄고자 애쓸 필요가 줄어들면서 모두의 번영으로 나아갈 것이다.
: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은 한계가 있다.
216쪽
극악한 사건에 매혹되는 우리를 그저 도덕적으로 꾸짖기보다는, 그 사건들이 전달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과제여야 한다.
218쪽
공포가 이 철학자가 일컬은 비극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플롯이 잘 짜여지고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위 동기가 설득력을 갖춰 설명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비극의 임무는 본질적으로 품위 있고 호감 가는 인물도 결국엔 쉽사리 주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20쪽
뉴스의 진지한 임무가 여기에 있다. 끔찍한 사건에 대한 보도는, 인간의 혼란스러운 일면으로 인해 (극단적인 상황에서라면) 저질러버릴 수 있는 일들을 우리가 저지르지 않도록 최대한 격려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22쪽
우리가 그를 어떤 인간으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이 사건의 실상이 제시되는 방식에 따라 좌우된다.
사악한 사람만이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미 히틀러가 한 일만큼 잔인하고도 파괴적인 죄악을 머릿속에서 수십 년간 시뮬레이션 해오지 않았나.
225쪽
우리가 끔찍한 행동으로부터 머리카락 한 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 악의 평범성?
심각한 범죄 기록이 없는 건 대체로 운이 좋거나 환경이 좋아서일 뿐, 본성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 환경결정론으로 문제를 대하다 보면 개개인의 주체성이 무시될 수 있지만 어떻게 환경의 영향을 작은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내 온전한 의지와 능력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231쪽
재난은 그 안에 광범하고 유익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즉, 인간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232쪽
타인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어마어마한 규모가 자신의 문제를 균형 있게 바라보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관용적인 태도의 성숙과 희망의 척도는 역설적이게도 극도의 슬픔을 다룬 뉴스를 통해 만들어진다.
233쪽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우리의 우선순위가 재조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바로 내일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주 늦게 올 것이라고 가정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 바로 내일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가 더 살아버리면 어떻게 하나.
234쪽
바니타스 정물화라는 양식이 유행했는데, 이 그림들은 해골, 촛불, 모래시계 등을 사용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236쪽
낯선 이에게 닥친 재앙을 우리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거리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238쪽
뉴스가 어떤 주장을 펴든 간에, 그리고 뉴스 속 이야기가 얼마나 급작스럽고 놀랍고 감동적이든 간에, 뉴스가 제기하는 문제가 언제나 우리 자신의 문제는 아니라는 ㄴ사실을 십분 인정하는 것이 곧 우리가 사이코패스 같은 본성을 지녔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246쪽
자연은 우리의 분수를 깨닫게 해준다. 다른 사람 때문에 우리가 왜소해지는 느낌을 받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지만, 우리보다 엄청나게 거대한 무언가에 의해 우리의 본질적인 무상함을 알게 되는 건 전혀 모욕적인 일이 아니다.
253쪽
죽음을 절정의 구경거리로 바꿔놓는 뉴스의 성향은 우리가 죽음을 일상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걸 단념시킨다.
257쪽
뉴스는 우리가 돈을 제대로 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진지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258쪽
우리는 그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변화하길 바라는 것이다.
260쪽
우리는 (좀 모호한 느낌이지만) 그 레스토랑처럼 되고 싶어 한다.
263쪽
그게 잘 되든 그렇지 않든 소비문화를 전적으로 돈 낭비라고 비난하는 것이 답은 아니다.
264쪽
하지만 또한 우리는 자기가 희망했던 변신이 그저 상품 구입 행위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68쪽
인류는 매년 3만 편의 영화와 200만 권의 책, 10만 장의 음반을 생산해내며, 9500만 명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다.
269쪽
예술(여기서는 문학, 음악, 영화, 연극과 시각예술을 포함한다)은 치유의 힘을 가진 매체로, 관객들을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며 더 나은 자기로 진화하도록 거든다는 것이다.
270쪽
문화 저널리즘은 외롭고 혼란스럽고 겁먹고 고통받는 우리 영혼을 이끌어, 우리가 난관을 잘 극복하고 나아가 한층 성장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문화작품으로 안내해야 하는 것이다.
273쪽
어떤 작품에 정당한 가치가 있는데도 공감하기 힘들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우리에게 딱 맞는 시기에 만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작품의 객관적 가치를 인지하면서 `위대한` 책, 영화, 전시를 마주함에도, 그 작품에 대해 냉담하고 지루해하며 죄책감마저 느끼기도 한다. 그건 비평가들이 훌륭한 약사처럼 처신하지 못해, 그 작품이 어떤 사오항에서 적합한 교정물이 될 수 있는지 충분히 혹은 섬세하게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우리 내면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소중한 순간에만 진정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는데,
277쪽
우리 의사와 무관하게 상류사회의 결혼식이나 카리브 해의 허리케인에 대한 최신 정보를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면 마치 주문한 적이 없는 요리를 강제로 먹고 있는 기분이 든다.
278쪽
`맞춤 뉴스`는 풍부하고 복합적인 개성을 도야하는 걸 돕기는커녕 우리의 병적인 측면만 강화하거나 우리를 평범함이라는 형별에 처하도록 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279쪽
맞춤 뉴스 만들기는 이용자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뉴스에 대해 고도로 성숙하고 복합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을 때, 실은 오로지 그럴 경우에만 현재의 뉴스 편집 시스템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
281쪽
정치 뉴스는 우리 사회의 복잡한 역학에 대한 흥미를 끌어내고, 그럼으로써 사회의 개혁을 지적으로 환기시키는 동시에, 그 개혁에는 어떤 완고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분노하지 않고 수용하도록 도와야 한다.
286쪽
뉴스가 지배하는 시대에 온전한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움과 중요함은 그 범주가 겹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289쪽
하지만 우리가 먼저 자신만의 생각을 잉태시킬 만한 인내심 많은 산파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단단한 무엇을 하나도 갖지 못할 것이다.
291쪽
뉴스가 더 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 차릴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