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심미안으로 세상을 보면 도처에 위로가 있다. 깊은 슬픔을 경험하니 언제부턴가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 메마른 나뭇가지에서도 소박하게 피어오르는 조팝꽃, 라일락, 돌 틈에서 피어오르는 들꽃들. 아주 작은 홀씨 하나가 그 속에서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 생명에대한 경이로움을 느낀다.이런 위로는 비단 자연에만 그치지 않는다. 사람에게서도 마찬가지다. - P113
지금 내 삶에서, 내 아픔을, 내 결핍을 위로하고 있는 콘텐츠를 모아보자. 심미안은 멀리 있지 않다.지금 바깥을 나가 내 공허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풍경을 찾아보자. 자연물을 만져보자. 심미안은 멀리 있지 않다.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지금, 이곳이 위로의 선물이다. - P113
이렇듯 어떤 특정 공간은 우리에게 평상시 맛볼 수 없는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사람들이 바다를 보면 좋아하는 이유가 탁 트인 무한의 공간에서자유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심미안을 갖고, 공간을 탐색하는 일은 무척 의미있는 일이다. 교사는 예술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창의적인 수업을 만들고,학생들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용기와 꿈을 주려면, 내 안에 채워지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수시로 나만의 장소를 홀로 찾아가, 그곳에서 내 마음과 생각을 알아차리면서 고독을 즐기는 삶이 있어야 한다. 그안에서 공간이 주는 위로를 들어야 하는데, 실상은 너무 힘이 든다. - P117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교사들은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는다. 그래서 교사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위로를 갈망한다. 누군가가 내가애쓰고 있는 것을 알아봐 줬으면, 누군가가 내가 애쓰고 있는 것을 이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그 위로를 타인으로부터 경험할수록설적으로 나는 나로 살지 못한다. 타인의 위로에 너무 기댄 나머지 스스로살아갈 힘이 있는데도 나약해져서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결국 내가 나로로 살지 못하고살기 위해서는 타인의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내가 나로 설 수 있어야 한다.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 나를 위로하면서 나의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 - P82
사실, 삶이란 누군가를 구하거나 구해지는 일들로 이어지며, 그렇게 여러 시절들이 서로의 둥지 같은 것이 되어 주는 누군가들을 건너가며 이어지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다. 돌이켜보면, 삶의 매 시절에 어떤 손길들이 있었다. 그 손길들은 때론 연인이거나 친구, 동료이거나 그저 낯선 사람이기도했는데 일방적으로 나를 구해 냈다기보다는, 맞잡음으로써 서로를이해하고 견디며 의지하는 일들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짧은나날의 인연들은 인생 전체에서 ‘사소한 인연‘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사실 그 시절에는 전부였던 것이고, 그렇게 매시간마다 전부였던 돌다리들을 건너 이곳까지 왔던 게 아닐까 싶다. 그중 어느 하나의 돌덩이가 없었다면, 결국 이곳까지 이르는 돌다리를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 고양이 ‘들은 내가 발 딛고 설 수 있었던 한 시절의 돌덩이였다. - P43
은유의 초창기 책인가보다. 이미 40이 된지 한참이어서인지 은유의 다른 책보다는 덜 공감된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된 시들이 참 좋다.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도 책을읽으며 배고픔을 잊고, 추위를 잊고 병을 잊었다고 하더라만, 난 배고픔은 안 잊어진다. 책 읽다 보면 커피가 그립고 커피 마시면 빵이 그립고 빵을 먹으면서 다시 책을 뒤적거린다. 이렇게 살다간 배고픈 거지가 되겠지만 그래도 한 일주일 정도쯤그렇게 살면 좋겠다. 알람처럼 하루 세 번 어김없이 배고프다며 밥 달라는 아이들로부터 해방된 일상. 책과 커피머신과 오디오만 있는 고요한 나만의 공간에 갇히고프다. 아침이 밝으면머리 맑을 때 니체를 읽고, 오후에는 책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을 예쁜 공책에다 베끼고, 어스름 저녁이 되면 글을 쓰고, 적막한 새벽에는 아름다운 시를 골라 그에게 전화를 넣어 낭랑하게읽어 주고 싶다. - P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