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꽃과 잎이 무성해지기 전, 느릿느릿 걸으며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맘때의 산책이 왜 그리 좋은 걸까 생각해보면, 그건 꼭 모르는 이의 블로그 일기를 볼 때와 비슷해서인것 같다. 누군가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쌓아올리고 있는지, 어떤 고단함에 무릎이 꺾이고 어떤 즐거움에 혼자 웃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힘을 얻을 때처럼. 자연의 작디작은 것들이 각자 써 내려가는 오늘 치의 일기를 보는 기분이다. - P73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을 땐 큰 질문은 쪼개서 작은•질문으로, 큰 시간은 쪼개서 작은 시간으로 1년이 막막하다면 다만 봄의 하루를 성실하게. - P74

긴 겨울을 지나는 동안 문득문득 설렜다. 제철 행복을 미리심어두는 건, 시간이 나면 행복해지려 했던 과거의 나와 작별하고 생긴 습관이다. 그때 나는 ‘나중‘을 믿었지만 그런 식으로는 바쁜 오늘과 바쁠 내일밖에 살 수 없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어." 지친 목소리로 자주 그렇게 말하는 동안 알게 됐다. 무얼 하든 무엇을 ‘하는 데에는 결국 시간이 필요하다는걸. 밥을 먹는 데에도, 산책을 하는 데에도, 대화를 나누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원하는 시간의 자리를 마련해줄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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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무렵 내가 가장 좋아하는 봄의 쪽지는 버드나무에 걸려 있다. 다른 나무들이 아직 겨울눈 속에 이파리조금 더 보관하고 있을 때, 버드나무만이 이르게 새순 같은 연둣빛 꽃을 틔운다. 다들 뭐 해, 봄이라고! 외치듯이. 멀리서 보기엔 아직 스산한 3월의 풍경 속에서 혼자서만 형광을띠며 도드라져 보이는 나무. 흐린 날에는 흐려서, 맑은 날에는맑아서 누가 저 나무에만 불을 켜둔 것 같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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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은 하나의 절기를 다시 세 마디(초후, 중후, 말후)로 나누어 섬세하게 계절 변화를 살폈는데 우수의 삼후는 이렇다. 초후엔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 늘어놓고 제사를 지내며,
중후엔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가고, 말후엔 초목이 싹튼다.
음, 그렇군......이 아니라, 수달이 제사를 지낸다니? - P37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인다.
가을이 되면 서쪽 연못에 연꽃을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겨울이 되어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인다.
세모에 화분에 심은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마시며 시를 읊는데 이바지한다.
죽란시사첩서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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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이편안함이 끝나기를축축한 침대에서 잠을 깨거나 무슨실수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깨뜨리기를계속 기다리지만 하루하루가 그 전날과 거의 비슷하게 흘러간다.  - P45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P70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림, 입 다물기 딱 좋은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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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 P17

아빠는 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없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떠났을까? 마당을 가로지르는 묘하게 무르익은 바람이 이제 더 시원하게느껴지고, 크고 하얀 구름이 헛간을 넘어 다가온다. - P21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표 - P50

 나는 아까 이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P30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따라 밭을 다시 지나올때 내가 아주머니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없으면 아주머니는 분명 넘어질 것이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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