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무렵 내가 가장 좋아하는 봄의 쪽지는 버드나무에 걸려 있다. 다른 나무들이 아직 겨울눈 속에 이파리조금 더 보관하고 있을 때, 버드나무만이 이르게 새순 같은 연둣빛 꽃을 틔운다. 다들 뭐 해, 봄이라고! 외치듯이. 멀리서 보기엔 아직 스산한 3월의 풍경 속에서 혼자서만 형광을띠며 도드라져 보이는 나무. 흐린 날에는 흐려서, 맑은 날에는맑아서 누가 저 나무에만 불을 켜둔 것 같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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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은 하나의 절기를 다시 세 마디(초후, 중후, 말후)로 나누어 섬세하게 계절 변화를 살폈는데 우수의 삼후는 이렇다. 초후엔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 늘어놓고 제사를 지내며,
중후엔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가고, 말후엔 초목이 싹튼다.
음, 그렇군......이 아니라, 수달이 제사를 지낸다니? - P37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인다.
가을이 되면 서쪽 연못에 연꽃을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겨울이 되어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인다.
세모에 화분에 심은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마시며 시를 읊는데 이바지한다.
죽란시사첩서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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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이편안함이 끝나기를축축한 침대에서 잠을 깨거나 무슨실수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깨뜨리기를계속 기다리지만 하루하루가 그 전날과 거의 비슷하게 흘러간다.  - P45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P70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림, 입 다물기 딱 좋은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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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 P17

아빠는 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없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떠났을까? 마당을 가로지르는 묘하게 무르익은 바람이 이제 더 시원하게느껴지고, 크고 하얀 구름이 헛간을 넘어 다가온다. - P21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표 - P50

 나는 아까 이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P30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따라 밭을 다시 지나올때 내가 아주머니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없으면 아주머니는 분명 넘어질 것이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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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상하지, 스포츠 선수는 나이를 안 먹는 것 같아.
멈춰 있어, 거기서."
"거기가 어딘데?"
"내가 환호했던 데서." - P250

황병기 사람들은 기쁨으로 사는 거야. 그런데 진짜 기쁨은 슬픔을 삼키고 나오는 거라야 해.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사람치고 안 우는 사람 봤어? 아름다움도 그래. 굉장히 아름다운 거 보면 눈물이 나와 예술에 있어서의 근원은 슬픔이라고 나는 생각해. 예술적 창작이니 뭐니 하지만 시인이든 음악가든 눈물이 나올 정도의 작품을 내놔야 해.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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