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사랑하는 일살아가다 보면,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일을 해내는것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하는. 무릇 사랑보다는 미움이 손쉬운 법이고, 그것은 비단 그림을그리는 일에도 해당되곤 합니다. 이른 아침 작업실 문을 열고 어제 그려 놓은 그림을 마주할때, 전시회를 앞둔 그림들을 펼쳐 놓았을 때면, 저는 종종 그림이, 그 그림을 그려낸 나 자신이 미워서 도무지 견디기 힘들다는생각을 합니다. - P64
그렇기에 제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인간을 사랑하는 연습을하는 일입니다. 그 무수한 연습의 나날들 속에서, 언젠가 어느 날엔가 예고도없이 캔버스 위로 떠오른 사랑의 형상을 발견했던 기쁨은 오늘의 연습을 위한 용기가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더없이 연습이 필요한 일입니다. 매 순간. 매 숨처럼. 언제나. - P65
떠나는 일
"참 용감한 것 같아. 그렇게 낯선 곳으로 막 떠나는 거, 하나도안 무섭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어느 섬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던 제게 오래 알고 지내온 막역한 후배가 물었습니다. 20대 때 이런질문을 받았다면, 분명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래, 그런 거, 난전혀 두려워하지 않아"라며 의기양양해 했을 겁니다. 미지의 세계와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안으로 빼곡히 가득 차 있다는 걸 이미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요. 그러나 이제 30대 중반을 지나온 저는 "무서워 벌써 외로운기분인데..."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제는 어렴풋이, 그러나 때로 - P68
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애초에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요. 오히려 부서지기 쉬운 스스로를 알기에, 나 자신을 낯선 세계로 내던져, 그곳이 선사하는 온통 날것의 기분, 감정, 경험을 온전히 혼자 마주하는 용기를, 그 용기를 얻는과정을 체득하기를 몹시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그리고 그러한 갈망의 무게가 모든 두려움보다 더 무겁기에 결국 떠나기를결심한다는 것을요. ‘나이를 먹는 일‘이란 어쩌면, 그런 걸 조금씩, 아주 조금씩 깨닫고, 나 자신을 알음알음 알아가는 데서 위안을 얻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가 떠나온 삶이라는 길고 고단한 여행길 위에서 또 한걸음 앞으로, 다시 다른 길로 떠날 수 있는 결심과 용기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일. 그리고 마침내 여정이 끝난 뒤 찾아온 짧고 달콤한 안온함 속에서 또다른 여행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일. - P69
군가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의 순간들을 돌아보면, 그 상황을 완벽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조언을 바랐다기보다는 도무지 확신할 수 없는 마음의 번민으로 인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공감해주기를 바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혹은 무의식중에 이미 결정을 내려버린 선택과마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건 수많은 선택들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조금씩 의연해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게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의연해지되 무뎌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 괜찮을 거야‘라는 막연하고 성의 없는 위로나 툭툭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선택의 번민 속에서 선뜻 제게귀를 열어주고, 손을 잡아준 이들과 함께 삶을 발견해 나가는 기쁨을 느끼고 싶습니다. 확신이라는 말이 좀처럼 어려운 이 세상 속에서 저는 그런 방식으로 믿어보고 싶습니다. 나 스스로를, 그리고 당신을 - P81
는 이야기입니다. 매번 전시회를 준비할 때면, 열정과 욕심과 열기, 호기심에 들떠 달려들다가도, 막상 전시회의 시작을 앞두고준비를 마친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자면 당장 예정된 전시를 취소하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결코 대하기 쉽지 않은 감정입니다만, 저는 거기에서 위안을 찾습니다. 그 부끄러운감정은 결국 성장의 허물이자 소산이며, 저 스스로가 자신에 대하여 훌륭하진 않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멘토이자 스승이 되려노력했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그리하여 오늘도 저는 부끄러운 일기를 쓰려 합니다. 흐르는 시간에 침식되기보다는 계절처럼 깊어지는 나를 만나고 싶습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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