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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평점 :
영화를 보다가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눈을 가리더라도 그 사이로 뭔가가 궁금해 눈을 반짝이는 인간의 묘한 심리. 이 책의 제목을 보고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말로 하면 낚시라고 해야 할까. 다소 선정적인 제목에 비해 노골적인 대사나 성교의 장면은 거의 없다. 제목만 번지르르한 어떤 작품들과는 달리 노벨 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책이니 그보단 풍겨나는 분위기와 뛰어난 문장력에 탄복했을 뿐.
언젠가부터 우리들에겐 노인은 노인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생겨났다. 탄력적인 몸과 밥 몇 그릇은 거뜬히 비우는 왕성한 식욕, 이성에게 끌리는 애욕등은 20대 한창의 청년을 상징하는 단독 묘사로 그 덕에 일생의 전환점을 찍고 황혼기에 접어들 무렵에도 불구하고 짱짱한 체력과 정정함은 어떤 이에게는 거부감까지 주게 된 묘한 현상.
소설 속 주인공인 이른 바 '서글픈 언덕'은 이제 막 90살이 된 노인이다. 그는 10대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철저히 돈으로 맺어진 모종의 거래관계 속에서 500명이 넘는 수많은 창녀들과 몸을 섞어왔고 아흔의 생일을 맞아 단골 포주 로사의 중개로 마침내 숫처녀와의 의미있는(?) 밤을 자신에게 선사하려 한다.
하지만 소개 받은 소녀 '델가디나'의 가냘픈 몸을 보며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만족과 행복감을 느낀다. 결국 소녀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밤을 지샌 그의 속내를, 로사와 델가디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다시 이뤄진 몇 번의 만남에서도 그는 여태까지 만나왔던 여인들과의 사랑없는 섹스행위로써가 아닌 진정한 교감과 대화, 지켜주고파 하는 자신의 내면을 발견한다. 단추달기 노동에 지친 가난한 소녀를 시와 자장가로 위로하고 자전거를 선물하는 순수한 애정의 표현. 이것은 마치 수줍은 10대 소년이 처음 사랑의 감정을 알기 시작한 때의 서투른 고백같아 보인다.
노인은 풋풋한 그녀를 보며 자신은 차마 모르고 싶었던 늙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거울 속에 비친 추하고 못생긴 힘없는 한 남자. 그것은 남들이 자신에게서 느꼈던 명명백백한 세월의 흔적을 비로소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다.
늙어가는 것 같아,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우리는 이미 늙어 있어요, 라고 말했다. 우리 마음으로는 느끼지 못하지만, 바깥에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보는걸요. - p.130
그는 신문에 칼럼을 쓰고 어학을 가르치는 등 뚜렷한 직장과 일을 가지고 누구보다 규칙적이며 노인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틀림없는 노인이었다. 언제 관 속에 갇혀도 이상하지 않을.
또한, 언젠가 그를 스쳐갔던, 그러나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 '퇴직'한 매춘부들에게서 느껴지는 서글픔과 고독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폐기물'로 치부되는 노인 전체에 대한 씁쓸한 단면을 그린 듯 애닮다. 그런 중에도 로사와 주인공이 나누는 허물없는 농담은 작가 특유의 유머로 녹아내려 소설을 읽기에 마냥 무겁지만은 않았다.
마르케스의 대표작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려다 유명한 고전이라면 겁부터 지레 집어먹게 되어 이 작품을 먼저 보게 됐는데 왠걸 너무 좋았다. 특히 소녀가 침대위에서 가만히 알몸으로 누워 있는 아래의 장면에선 집시인 에스메랄다를 향한 세 남자의 욕망을 다룬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가 문득 생각나기도 했다.
소녀는 화해의 새벽빛을 받으며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침대 위에 가로 누운 채, 처녀성의 절대적인 주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듯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나는 중얼거렸다. - p.44
'창녀'라고 하면 거북살스런 느낌이 일반에겐 강하지만 문학 등 예술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겐 종종 소재로 사용되고 예의 뮤지컬에서는 원죄의 숙명을 안고 인류의 십자가를 짊어진 고통스런 존재로 그려지기도 했다. 한편 이와 비슷한 구조로 다루어져 국내영화로도 상영됐던 박범신의 '은교'는 영화를 먼저 봐버려서 책을 읽지 않았는데 갑자기 내용이 궁금해졌다. 두 책을 비교해가며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