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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 미상 여자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평점 :
파트릭 모디아노 작가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로 작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책을 읽는 독서가나 평론가들에게 뜨거운 화두로 거론되었다. 팟캐스트에서도 다루어진 그 작품을 읽은 많은 이들의 수많은 감상문과 서평들이 여기저기 넘쳤는데 하나같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지루하고 모호한 내용이라는 말도 종종 보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난해하지 않고 쉬운 작품은 고전이나 수상작 반열에 들기도 어려운 현실이 되버린 것 같다. 남들이 다 읽는 베스트셀러는 피해가야 한다는 왠지 모를 오기로 이 작품을 선택한 것도 있지만 아무튼 결론은 이 책 역시 쉽지 않았다.
소설은 3개의 단편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이야기는 단순 반복되는 일상, 똑같은 사람들에 지친 십대 중후반의 여주인공들이 각자의 일탈과 자유를 꿈꾸며 무작정 이끌리는 대로 리옹에서 파리행 기차를 타고 떠나거나, 기숙사 탈출을 감행하고, 런던에서 파리로 와 여기저기를 헤매이며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확인하려 하지만 돌아오는 건 허탈한 공허함과 이방인의 신세가 된 타국에서의 고독함뿐이다. 그녀들은 만나는 사람과 일행들에게 자연스레 섞여들어가려 시도해 보지만 마음 속 깊은 구석엔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괴리감만이 똬리를 틀고 있다. 가족과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될지도 모르는 도전의 실패는, 안정된 인생의 길을 보장하는 코스를 안내하는 누군가의 카운셀링을 절실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없이 떠도는 삶. 혹은 발길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는 것은 자유를 상징하는 동시에 한편으론 모두의 로망이기도 하다. 감옥과도 같았던 수녀원 기숙사의 금욕적인 생활과 도시의 어느 곳에 있어도 벗어날 수 없는 말발굽 소리는 그녀들을 옥죄는 권태로움과 억압된 자아의 다른 이름이다. 본명을 알수 없는 남자의 애인이 되고 베이비시터 일을 하는 중에 아버지가 남긴 자신의 가방 속에 든 물건을 보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 그것은 과연 우연의 결과일까 아니면 꾹꾹 눌러져 있던 자신의 욕망과 억제된 감정의 분출의 작용으로 예견된 일이었을까.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의 간결하고 무심한 듯 담담한 문체에 그저 홀리듯 빠져들게 된다. 그는 어떠한 주관적인 견해나 생각도 덧붙이지 않고 주인공의 대사과 전후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그 해석들을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모든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나 행동등을 1인칭화하여 서술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소설을 읽고 난 서평은 언제나 어렵다. 존재론적 사색과 흔적. 스쳐가는 기억, 결핍을 얘기하는 모디아노의 소설은 더욱 그러하다. 책을 덮고 긴 여운과 나만의 생각을 적는 시간이 깊고도 풍부하게 느껴졌던 작품. <신원 미상 여자>를 읽고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을 통해 그의 세계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