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의 세계사
가와기타 미노루 지음, 장미화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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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의 역사 혹은 ~의 세계사와 같은 이름이 붙은 책은 항상 날 설레게 한다. 이런 책은 일상의 물건이나 관습, 문화가 과거로부터 어떻게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그 전반에 걸친 관련 역사까지 폭넓게 알 수 있어 흥미로운 독서 겸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달달 외우기 식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을 중점으로 역사나 세계사를 익힐 수 있다면 좀 더 재밌고 이해가 쏙쏙 될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렸을 때 단 것을 싫어했던 사람이 있을까? 달달한 초콜릿, 과자, 사탕, 빵에 이르기까지 설탕이 들어간 음식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받는 대표적 식품으로 자리잡아 왔지만 오늘의 책 <설탕의 세계사>에 등장하는 과거 역사 속의 설탕은 '세계상품'으로써 그 패권을 쥐고 흔들려는 서구 열강들의 탐욕적 수단으로 이용되어 처참한 살육과 노예무역을 활성화시켰던 주 원인이었다.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는 그 특성상 적절한 기후와 강수량, 토지 그리고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바 당시 카리브 해 일대와 남아메리카 부근 지역에 많은 식민지를 확보했던 영국과 포르투갈, 프랑스가 중심이 되어 설탕과 그 설탕으로 인한 교환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때문에 증기기관차나 공장 등의 최신기계 설비도 보다 많은 설탕 생산을 목적으로 도입, 사용되었고 모든 지대를 뒤덮은 사탕수수의 단일경작은 다른 일상 식품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는데 해안가에 위치한 지도 위의 무수한 플랜테이션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설탕이 대량 생산 모드로 전환되었을 때까지도 그 비싼 몸값에 상류층과 귀족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과시용과 약품등의 용도로 오랜기간 사용되었을 뿐 일반 대중들이 그 달콤한 맛을 보기까지는 그 후로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정치와 경제를 논하던 살롱이나 카페문화가 번지면서 차와 커피를 만난 설탕이 그 담소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특히 영국은 유독 많은 설탕 수입량을 자랑했는데 신분이나 계층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식생활과 '스테이터스 심벌'을 선망한 많은 이들의 상류층 따라하기의 일환으로 널리 대중에게 빠르게 퍼져 나간 것이 그 이유였다.


19세기 들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급격히 밀려들면서 사람들의 생활습관은 규칙적인 리듬으로 바뀌게 되고 하루 세끼의 식사와 티타임에서 노동자들이 즉효성 있는 칼로리 보급원으로써 설탕에 대한 의존력이 높아진 것은 과거 왕실과 상류계급이 누리던 사치식품으로 즐겨졌던 설탕이 지니게 된 또다른 모습이었다. 이 시기에는 설탕으로 부를 쌓은 대부호들이 왕가 못지 않은 사치를 누리고 당대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한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옛말처럼, 땀과 고통으로 얼룩진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유럽 식문화의 발전을 꽃피운 달콤한 설탕의 아픈 역사는 그 맛이 달기에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많은 음식들은 가깝게 보면 농부들의 땀과 유통과정으로 대변될 수 있겠지만 더 멀리 본다면 과거 먼 역사에서부터 이렇게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수도 있다는 것. 윤리적 소비가 강조되는 오늘날 더욱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일 것이다.


또한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지금도 반듯한 이미지의 신사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 영국이란 나라가 과거 제국주의로 똘똘 뭉쳐 식민지 쟁탈과 노예무역을 일삼은 오욕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번 씁쓸한 진실을 알아버린 듯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해당 서평은 반디펜벗 7월의 자유서평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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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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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영하 작가의 글을 접한 건 이번이 다섯번째다. <살인자의 기억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보다>에 이어 이번 산문집 <말하다>에 이른 것인데 처음 앞의 두 작품을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작가 대체 뭐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해 서평도 못 썼다. 살인이니 파괴니 하는 코드가 소재주의자로 느껴질 만큼 강한 이미지로 다가왔기에 '김영하'라는 사람 자체에 궁금증이 막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음울한 소설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이 사회에 대해선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을까 해서 펼쳐본게 두 산문집이었던 것이다.


팟캐스트에서도 얼핏 들었던 얘기지만 그는 작가가 될 만한 그 어떤 요소도 없던 인물이었다. 그저 무난한 중산층의 인생. 군인 아버지에, 굳이 작가가 되지 않았어도 밥벌이는 충분히 할 수 있었던 배경을 갖췄지만 계시처럼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며 뛰쳐나온 것이다. 요즘 세상같으면 전혀 상상도 못할 무모한 짓이지만 가능성이 넘쳤던 경제성장의 시기였기에 그 무모함이 먹혔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정석대로를 밟지 않고 작가가 되었기에 체감하는 좋은 면도 분명히 있다고 한다.


분명 그렇다. 작가를 준비하며 거치는 전공교육을 통해서는 글을 기술과 일, 방법으로 대할 뿐이지만 글 쓰는 작업이 주는 본연의 기능, 말하자면 글을 쓰면서 자신이 느끼는 변화나 힐링의 효과에 대해서는 무신경하기 쉽다. 소설이라는 것은 엄연히 출판시장에 속해있고 판매량과 독자들의 반응, 비평등에 영향을 받기 쉬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글쓰기 본연의 즐거움을 간직한 채 직업적인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좀체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작가 김영하의 작품 세계는 가히 지치지 않는 즐거움의 세계같아 보인다.


작가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상상력 안에 갇혀 있을 때 작가들은 더 멀리 나아가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감히 꿈꾸지 않는 것, 감히 경험하지 않는 것, 또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경험하고 그 경험을 사회로 가져오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해서 그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 p.112


한번은 재미로 유서를 한번 써 볼까 했던 적이 있는데 관두었다. 혹여라도 내 글이 누구 눈에라도 보이게 되면 심상찮은 일로 오해받기 딱 좋으니까. 소설가의 장점은 이 모든 발칙한 상상을 자신의 글에서만큼은 얼마든지 표출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자기해방감을 느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자기해방'이라는 표현이 아주 맘에 들었는데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고 있지만 글을 쓰는 행위의 자유로움은 이미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일기나 웹등에선 물론 자기만의 책을 출판하는 것이 꿈인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또 '늙지 않는 발레리나'라든지 극장의 문지기등으로 작가를 비유한 표현은 김영하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작가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쓴 글과 독자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 대목이었다. 소통이란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와 작품 사이에서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그의 논리는 지금보다 작가가 신비주의에 갇혀있었던,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았던 예전을 떠올리게도 만들었다.


소통과 공유라는 단어가 만연해지고 개인만의 내밀한 세계 구축이 갈급한 상황에서 책은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은 규칙적인 일상 이외에 우리가 온전히 혼자서만이 할 수 있는 생산적인 활동은 무엇이 있을까.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백이면 백 모든 이들의 감성을 포용하는 즐거운 고독의 장이라는 김영하의 작가적 세계관이 앞으로도 그의 작품을 반갑게 찾아볼 수 있게 되는 동기가 될 것 같다.


저는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기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 인간이 자기 서재, 아무도 침입해 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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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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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호기심을 유발하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이 책의 한국어 표제는 많은 독자들이 작품을 찾아보게 하고 입소문이 퍼진 원동력이 된 것 같다. 해석 여하에 따라 결국 예감은 틀렸다고도 할 수 있고 맞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든 이들의 찬사를 받고 만장일치로 영국 최고 권위의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던 이 책이 또한 나에게는 수상작 징크스(?)같은 울렁증으로 다가오고 말았다. 한마디로 재밌었지만 쉽지 않았다는 얘기.


첫번째 일독. 무작정 읽어나갔다. 보통 소설을 읽는다고 하면 초반부는 작가의 캐릭터 설정과 시대배경 설명으로 그리 집중하지 않고 훑듯이 읽는데 여기선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역사 시간에 교수와 학생들이 주고 받는 문답이나, 하다 못해 다들 천치라고 여기는 마셜 군의 엉뚱한 대답에서도 복선이 있다. 똑똑한 전학생 에이드리언이 가담한 사총사는 입만 열면 철학 운운하며 치기 어린 지적 허세가 하늘을 찌른다. 심지어 롭슨의 자살 소식 앞에서도. 소설 속 화자인 토니는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한 수위인 에이드리언을 동경하고 경외한다.


어느 날 그는 여친 베로니카의 집에 초대받게 되어 그녀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뭔가 찜찜한 굴욕적인 감정을 맛보지만 그 핵심의 실체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녀를 그의 패거리에게 소개시킨다. 그러나 베로니카와의 관계가 흐지부지하게 되고 헤어졌다고 말해도 좋을 그런 시점에서 에이드리언으로부터 베로니카와 교제 중이라는 편지를 받는다. 토니는 인상적인 엽서에 쿨하게 잘 지내보라고 답장했고 그걸로 두 사람은 그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세월은 흐르고, 환갑을 넘긴 토니 웹스터에게 어느 날 날아든 편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 베로니카도 아니고 그녀의 엄마가 무슨 일로? 이유 모를 약간의 돈과 그의 앞으로 남겨졌다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은 40년만에 베로니카와의 재회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참 나도 주인공처럼 무지한 독자인지 '아직도 감을 못 잡았느냐'는 알 수 없는 베로니카의 일침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건네받은 오래전 토니의 답장 내용을 본 순간 사람의 기억이란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 속에는 그의 기억과 달리 형언할 수 없는 둘에 대한 악담과 저주가 퍼부어져 있었고 이는 지난 날 묘연했던 에이드리언의 죽음, 토니의 말론 그리스적이라고 했었나? 논리적 사고의 결정판이라고 했었나?(나도 기억이 가물가물...) 암튼 그렇게 젊은 날 요절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가 어쩌면 자기가 무심코 내뱉은 말로 인해 자살이라는 절벽 아래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친다. 되돌릴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진실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토니는 그러나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망함에 회한과 죄책감으로 깊은 무력감에 빠지고 만다.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한 기억만을 편집해 고스란히 간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가령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푼 행동은 길게 또렷이 기억하는 반면, 도움을 받은 것은 그닥 소중한 기억으로 저장하지 않는다든가, 같은 상황에 노출되어 있던 사건의 목격자들의 진술이 서로 상이한 점등... 

책을 읽다 보면 철학적 유머나 작가의 풍부한 지식도 엿볼 수 있고 무엇보다 소설의 장르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반전과 교훈이 맛깔나게 버무려져 짧은 시간에도 유익한 독서를 했다는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예견대로 나 또한 이 책을 최근에 읽은 책 중엔 유일하게 2번 읽었다. 그래도 아직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줄리언 반스의 매력을 가늠하기엔 충분한 작품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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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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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정보가 이리 저리 헤프게 나뒹구는 요즘엔 일주일에 한 두번쯤 보험회사에서 자신의 핸드폰으로 가입권유 전화가 오는 건 특별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계약성사에 목이 마른 이들을 역이용하는 자해공갈단들처럼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을 소재로 만들어진 공포물은 더욱 더 호기심과 섬뜩함을 가져다주기 마련이다. 이미 황정민과 유선 주연의 영화로 개봉되어 2007년 여름을 한바탕 휘젓고 간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 표지부터가 심상찮다.

주인공 와카쓰키 신지는 생명보험회사의 말단직원이다. 어느 날 낯선 여인의 자살 관련 보험금 문의 전화를 받고 그로부터 얼마 후 검은 집에서 목을 매단 시신의 첫번째 목격자가 된다. 죽은 아이의 아버지는 그가 보기에 아무래도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듯 하고 고약한 악취와 짙은 향수 냄새를 달고 다니는 그의 아내 역시 의심스럽긴 마찬가지다. 추리 소설이 늘 그렇듯이 신지는 특유의 오지랖을 발휘하여 자살로 마무리되려는 사건을 독단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한다. 보험회사의 업무량이 적진 않을 텐데 다른 고객 유치나 보전 업무는 윗 상사나 동료에게 미뤄두고 검은 집에 집착하는 캐릭터 설정. 어찌 보면 뻔하고 억지스럽긴 하지만 이 또한 주인공과 악당의 맞대결을 위해 꼭 필요한 컨셉으로 이해하고 애써 넘어간 부분이다.

추리소설을 많이 본 독자라면 범인이 누구인가는 대략 중간 이전부터 짐작을 했을 것이다. 범인이 다녔던 학교를 찾아가거나 과거이력을 살펴보는 장면, 심리학을 전공한 여친 메구미와의 열띤 토론, 신지 자신의 유년시절 형에 대한 트마우마 등은 범인을 분석하고 처단하기 위해 모두 짜여진 장치같아 아쉽기도 했다. 내가 집중적으로 읽은 부분은 선천적 사이코패스 존재 유무에 관한 대학조교와의 흥미로운 대화였는데 사실 그건 내가 평소에도 관심있게 생각하는 분야이기도 해서 추리소설답지 않게 전문지식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읽혔다.

"배덕증후군이군."
노리코가 나즈막하게 중얼거렸다. 귀에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기때문에 신지는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인격장애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정성결여와 함께 억제결여, 폭발성의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를 특별히 배덕증후군이라고 하지요. 연속적으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 p.195

그는 마침내 집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이한 악취의 정체를 깨달았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처참한 살육의 현장이었다. (...) 오래된 핏자국을 새로운 피가 뒤덮으면서 만들어낸 악취가, 마침내 집 전체에 스며든 것이 틀림없다. - p.393

소설 중간중간에 언급되는 과거 역사 속에 존재했던 광기 어린 사이코패스들의 범죄행위는 사실여부가 궁금할 정도로 끔찍하고 사실적이다. 현재 범죄를 연구하는 프로파일러나 법의학 쪽에서는 이미 사이코패스를 하나의 인격장애로 분류하여 그 위험성을 경고해 온지 오래다. 치정이나 돈 문제같은 인간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일들로 일어나는 범죄도 무섭지만 가끔 tv를 보면 범행 동기 자체가 묘연한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고 상처 입히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사이코패스적 인간들이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 채 참혹한 일들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역시 귀신도 뭣도 못 이기는 게 '인간' 혹은 인간의 사악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경찰이 피해자의 신고에 즉각대응하지 못하거나 꼼꼼하지 못한 수사가 범죄를 키우거나 막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하는 우리의 고정관념, 감정 노동에 시달리는 보험관련직에 종사하는 직원들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었다. 


[해당 서평은 반디펜벗 6월의 테마서평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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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서 우리 시대의 대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육의 향방은 어느쪽이 되야할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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