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린디합을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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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요]
이 책의 화자인 '나'에겐 친구인 한이 있고 한은 자주 한의 파출소 소장인 장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직장 상사 험담 같은 게 아닌 그 반대의 이야기로 신뢰와 애정으로 가득한 이야기들이었다.
무명 소설가였던 나는 [난 리즈도 떠날 거야]라는 책을 출간하고 돈과 명성을 얻었지만 한의 직장 상사인 장의 '아픈 이야기'를 자신의 소설에 고스란히 담았다는 이유로 친구 한은 나를 떠나버렸다.

한의 말에 따르면 장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좋은 쪽으로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상에 성적은 상위권으로 별 어려움 없이 경찰 대학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본청의 정보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장의 삶에 위기가 찾아왔다. 스캔들에 연루되어 도시 외곽에 있는 아주 조그만 파출소로 발령이 났고 이런 일이 있기 일 년 전, 즉 아픈 몸에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낳았던 아들이 일곱 살이었던 때에 아내가 결국 죽었다.

장은 아들이 열다섯 살이 되던 날, 아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한 록밴드의 야외 콘서트 현장에 아들과 함께 갔고 초겨울 야외 콘서트라 장은 적당히 두꺼우면서도 무겁지 않은 담요를 아들의 코트 위에 덮어 준다.
첫 곡의 전주 부분이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한 남자가 무대 위에 뛰어 올라와 그 록밴드와 사람들을 향해 총알을 여러 발 발사했고 이 일로 장의 아들이 사망한다.


장은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장례식을 치르면 아들이 정말로 이제는 더 이상 자신과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장은 '그날'에 아들이 무대 위로 달려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대신 장은 아들의 어깨 위에서 담요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들의 어깨 위에서 떨어진 담요는 장에게 몹시 중요한 물건이 되었다. 그 후, 장은 담요를 항상 몸에 지니고 있게 된다. 담요를 가지고 출근했고, 책상에 앉아 있을 때는 담요로 자신의 무릎을 덮었다. 여름이라도 상관없었고 밥을 먹을 때는 곁에 두었고, 퇴근 후에는 도로 집으로 가지고 갔다. 화장실에 갈 때도 가지고 갔고, 밤에는 덮고 잤다.

장은 담요를 죽은 아들처럼 생각을 했으리라.
'두꺼우면서 무겁지 않은 담요'.
'두껍다'라는 표현에는 부모에게서 자녀의 존재감이 어떠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자녀를 따뜻하고 안전하게 지켜주는 존재 같지만 결국 나를 살아 가게 하는 건 부모에게선 내 옆에 항상 든든함으로 자리 잡고 있는 자녀이지 싶다.
'무겁지 않은'이라는 표현에서 자녀라는 존재가 때로는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자녀가 주는 그 무게감 보다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마주하는 세상의 수많은, 그리고 훨씬 더 무거운 그 무게감을 감당하게 하는 힘을 주는 것도 자녀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장에게 그 담요는 더 이상 '그냥 담요'가 아닌 죽은 아들이었던 것이기에 계절이 여름이던, 장소가 어디던, 무엇을 하던... 전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아들이 죽은 후, 장에게는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 번째는 담요를 항상 몸에 지니고 있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그가 야간 순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왜 야간 순찰에 집착을 했었을까...?
사고가 있던 그날, 공연은 저녁 7시 45분에 시작이었다.
장은 경찰대학에서 훈련을 받았고, 진짜 총은 수도 없이 만져봤고, 사람을 쏘아본 적도 있었지만 사고가 있던 그 순간에는 그저 힘없는 가장일 뿐이었으며 자신의 아들이 무대 위로 달려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자신이 아들이 죽음과 가까운 그 무대 위로 달려가는 것을 막지 못 했다는.. 아들을 지켜내지 못 했다는 죄책감이 장에게는 있었으리라.
장은 차를 운전하는 동안에도 무릎에 덮여 있는 담요를 만지작거리는데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내가 지켜줄게.. 내가 지켜줄게..'라는 말들을 속으로 되뇌이며 자신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들을 찾아 다른 사람들이 꺼릴 수 있는 야간 순찰에 집착하게 된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장의 아들이 죽고 육 년이 지난 그 해 겨울. 그 해 들어 가장 추운 겨울날에 장은 야간 순찰을 하다가 놀이터에서 그네에 앉아 있는 두 남녀를 보았는데 미니스커트에 살색 스타킹을 신은 여자와, 두껍지 않은 코트를 입은 남자를 보고 걱정되는 마음에 얼른 집으로 들어가라고 좋게 타이른다.
술에 취한 여자는 "네, 그러니까, 우리는 성인이고 결혼도 했고(중략)"라는 말을 한다. 성인이란 말을 하는 걸 보니 성인이 된지 얼마 안 된 나이인 것 같다. 장의 아들이 살아 있었더라면 얼추 이들과 비슷한 나이였겠지..

 

 그리고 장은 차에서 내려 그 어린 부부에게 '그의 담요'를 주었다.

 

 

그 어린 부부의 머리를 쓰다듬는 장의 마음은 어땠을까? 속으로 어떤 말을 했을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마음으로 얼마큼의 눈물을 쏟아 냈을지 모르지만 담요를 그들에게 주었던 그때서야 장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고 마음으로 아들의 장례식을 치러 준 것이라 생각한다.

[애드벌룬]
장과 아들이 록밴드의 콘서트장을 찾는 장면이 다시 나온다.
하지만, [담요]에서는 아들의 나이가 열다섯살이고 이 록밴드는 그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어 맨 앞자리의 표를 구하기 위해서 발품을 팔아 원래 푯값의 세 배를 지불해야 했다면, [애드벌룬]에서는 아들이 고등학교 이학년이고 그 록밴드의 인기가 끝물일때라고 표현이 되어 있다.
나이와 학년의 비교로 시기를 명확히 판단하기는 힘들 수 있으나 이 록밴드의 인기 정도를 설명한 내용을 보면 [애드벌룬]에서의 공연장 방문이 더 나중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장은 이번에도 아들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공연 시작 후 예전과 동일한 그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들이 죽지 않았고 대신 아버지가 중경상을 입어 죽을 때까지 지팡이를 짚고 살아야만 했지만 아버지 바로 옆에 서 있던 아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퇴원 하는 날, 아들은 그제서야 공연장에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덮어 주었던 담요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들이 군대에서 여자친구에게 쓴 편지와 유학생활에 썼던 편지에는 "'그때, 죽었어야 하는 건 나였던 거 같아요.'"라는 구절이 어떤 식으로든 들어가 있었다. 여자친구에게 썼다고 생각했던 편지들과 지난 몇년간 써왔던 편지의 주인은 사실 아버지였다.

어느날 그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어느 건물 위에 붉고 둥근 물체가 떠 있었던 것을 보는데 세어보니 일곱개이고 처음에는 애드벌룬이라고 생각했으나 곧 그것은 애드벌룬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애드벌룬은 아니었다.
그 후로 어느날, 집에 찬바람이 자꾸 들어와 바람이 어디서 들어 오는지 집안 곳곳을 살피던 중, 누가 열어 두었는지 모르지만 열린 창문을 발견하였고 그때 그는 보았다. 저 멀리, 공중에 접시 모양의 물체가 떠 있었던 것을..
그는 그 물체를 향해 조용히 걸어 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게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줄 거야.'

 아들은 아팠던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하고,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출산을 한 후 산송장처럼 살다가 죽은 것과, 아버지가 자기 대신 사고를 당하여 평생 지팡이를 짚으며 살다가 죽은 것.. 여러 일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그 콘서트 장에서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아들은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이 죽었다고 자책하는 것이다.

 

 예전에 그 사고 현장에서 자신이 아들을 지켜내지 못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아버지.. 잠을 자면서도 그는 수도 없이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혹시라도 어찌 되지 않을까 싶어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살았으면 이런 잠꼬대를 수도 없이 했을까 싶어서 마음이 짠.. 하다. 

 삼십년 전 아버지가 하셨던 "운이 좋았다."라는 이 한마디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너가 죽지 않고 내가 다쳐서 다행이고, 너의 죽음을 내가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란 말로 다가온다.
그것이 부모에겐 운이 좋았던 일이고 다행인 일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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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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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화자인 '나'에겐 일곱 살 아래의 동생, 즉 두 살배기 동생이 있었다.
동생의 유모인  '류보피 오니시모브나'가 나와 동생을 데리고 삼위일체 공동묘지로 산책을 나가곤 했고 한 무덤가에 앉아 내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많았는데 '분장예술가도' 그중 한 내용이었다.

류오피 오니시모브나는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사람이었고, 그녀의 극장 동료인 '아르카지'는 배우들이 역할에 필요한 성격과 얼굴을 그에게 얘기하면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실력으로 배우들이 요구한 그 모습대로 만들어 놓는, 배우들의 '머리손질과 화장'만을 담당한 '분장예술가'였다.
백작은 어떠한 경우에도 아르카지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의 머리를 깎거나 면도를 해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백작은 무섭고 흉악스러워 짐승처럼 생긴 자신의 얼굴에 아르카지의 손길이 닿으면 다른 사람들보다 품위 있어 보이니 그런 아르카지의 기술을 백작 본인만이 향유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백작은 아르카지를 평생 집 안에만 머물게 했고, 돈 구경 한번 시켜주지 않았다.

류오피 오니시모브나와 아르카지는 으레 청춘 남녀가 그렇듯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어느 날 어떤 여배우가 사고로 다리를 다쳐 연기를 할 수 없게 되고 그 자리를 류보피 오니스모브나가 지원하게 되고 감독이 류바(류보피 오니스모브의 애칭)가 잘 해낼 것이라는 확인을 해줌으로 그 역할을 맡게 된다.

 

 아르카지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백작에게 보내져서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또한 자신이 곧 죽음보다 더 한 고문을 받게 될 상황에서 그녀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여 어떤 사제의 집에 찾아가 자신들을 하룻밤 묵게 해주고, 결혼식을 거행 해주길 요청 한다.
사제는 아르카지가 제시한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을 요구하고, 그들을 쫓는 사람들이 사제의 집에 찾아 오자 그들을 숨게 해주며 그들이 어딨는지 모른다고 입으로는 얘기하나 손으로 어디 있는지 알려 주는.. 세속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그렇게 아르카지와 류바는 끌려 간다. 류바는 자신이 감금되어 있는 방의 아래층에서 아르카지가 고문 받는 그 끔찍한 소리를 계속 들으며 자신 스스로 목숨을 끊을 도구를 찾으나 아무것도 있지 않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감아 자살을 시도하지만 결국 살아남게 되는데 그 이후로 류바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버렸다.

백작은 아르카지에게 자비를 베풀어 살려 주겠다고 하며 대신 그를 군대로 보내버린다. 고문이란 고문은 다 아르카지에게 행했으면서 자기 손에 아르카지가 죽었다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는지 가장 죽기 쉬운 전쟁터로 그를 보내 버리는 잔혹함을 보인다.
전쟁터에서 겨우 살아 남은 아르카지는 장교의 지위와 함께 귀족의 순분을 얻었으나 십자훈장을 받기로 한 날, 여인숙 주인에게 살해를 당한다.
류바는 이 사실을 알고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다가 보드카가 담긴 망각의 병, 즉 눈물병을 마시며 쓰디쓴 슬픔, 마음의 불을 끄며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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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링느링 해피엔딩 - 세상에서 가장 바쁜 아빠와 세상에서 가장 느린 딸이 보낸 백만 분의 시간
볼프 퀴퍼 지음, 배명자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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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은 때 : 20171101 ~ 20171102 (2일)

책을 두 장 정도 넘겼을 때 느낌이 딱 왔다! 내가 좋아할 내용들이구나 싶은.
예감대로 이 책에 밑줄 그은 곳이 엄청 많다.

[책에 소개된 작가와 책의 내용]
1973년 독일에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고 군대에서 전역한 뒤에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후 국제환경정책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수년간 라틴아메리카 열대우림에서 시간을 보내며 생명의 다양성을 연구했다. 유엔 한경프로그램의 지원으로 아프리카에 파견을 가기도 했고 유엔 감사관으로 전 세계 환경 정책과 관련된 감시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렇게 성공 가도를 달리며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대학교 교수로 임용을 앞둔 어느 날,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근육실조증을 앓는 딸이 건넨 "아빠, 아주 멋진 일만 생기는 백만 분이 있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갖고 있는 모든 물건을 팔아 '백만 분'을 만들고 아내, 딸 니나, 아들 시몬과 함께 태국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약 2년(백만 분) 간 여행을 한다.
그의 삶은 빛나는 경력 대신 해변에서 모닥불 피우기, 바다에서 보트 타기, 딸과 함께 늦잠 자기, 흙으로 집짓기와 같은 일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니나의 말처럼 '조바싱 내지 않고 느링느링 살기'위해 그는 가족과 함께 두 번째 여행을 준비 중이다.

아빠 : 볼프
엄마 : 베라
딸 : 니나
아들 : 시몬 (니나는 시몬을 '미스터 시몬'이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가장 큰 균열은 중요한 일에 쓸 시간은 없고 다른 모든 일에 시간을 쓰는 것만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사고방식에 생겼다. (p15)

"여보, 당신 인생은 이미 여기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당신 인생에 기회를 줘야 해. 그게 진짜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p46)

니나는 8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생각할 것이 아주 많은 것처럼 심각한 얼굴로 고집스럽게 먼 곳만 보았다. 말을 걸어도 아무 반응이 없었고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유치한 장난을 쳐도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앞에서 얘기한 '교감의 기쁨'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p68)

그러나 조급한 어른들의 과도한 '빨링빨링' (니나는 이렇게 발음했다)에 대해서는 변함없이 '느링느링'으로 일관했다. 느림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해서 그저 기가 찬다고 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다. (p71)

책의 내용에 따르면 니나는 찍찍이 운동화 한 짝을 신는데 4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걸 참고 기다려줘야 하는 부모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니나는 모든 아이들에 비해 모든 일에 월등히 늦다.

니나가 영원 같은 시간 동안 혼자 양말을 신으려 애쓰는 동안 나는 옆에서 입술을 깨물며 숨을 참았고 니나는 틀림없이 내 행동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최근에 이런 일이 더 자주 생겼다. 숨을 내쉬는 걸 잊었다. 시간 압박 때문에, 그때 니나가 헛된 손동작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며 달래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바싱 내지 마!"
나는 정말 큰 행운을 가졌다. 이 조그만 꼬마 소녀가 나의 조급증을 그토록 잘 참아주니 말이다. (p73)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다.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다.'
삶을 그냥 '시간'으로 바꿔 부른 이 라틴어 명언에서처럼, 세월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고 아무것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리고 최악은 바로, 나의 한심한 to do list에는 정말로 중요한 일들이 적혀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의 to do list 맨 위에는 32포인트 볼드체로 '니나와 시간 보내기'라고 적혀 있어야 마땅했다. (p74)

"아빠가 자전거 타는 게 좋아."
긴 침묵 끝에 니나가 말했다.
(이때 아빠는 니나의 요구대로 니나의 자전거에 힘겹게 앉아서 겨우 페달을 돌리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워 보여서?"
"아니, 아주 멋지게 느링느링 가니까. 아빠 먼저 휙 가버릴 수가 없잖아."

느링느링 갈수록 시간이 많다. 정말로 맞는 말이다. 쏜살같던 속도가 녹아내린다. (p80)

그다음 유엔 감사관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돈은 넉넉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늙으면 아마 돈과 시간이 넉넉하겠지만 그때는 기력이 없을 것이다. 결국 꿈이 아니라 건강 유지를 위해 싸워야 한다.
절대 꿈을 이룰 수 없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이 갖춰질 '언젠가'를 기다리는 이런 기술을 써 왔던 것 같다. (p133)

하고 싶은 게 뭐야? 무엇이 되고 싶어? 니나가 백만 분의 시간을 소망한 직후부터 나는 마음의 눈으로 내 꿈들을 도화지에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점만 몇 개 찍었지만 어쨌든 내 도화지에도 큰 꿈의 흔적이 생겼다. 내게는 끊임없이 모험을 갈망하는 딸이 있었고, 기꺼이 지구 끝까지 함께 달려갈 아내가 있었고, 너무 일찍 깨우지만 않으면 얌전하고 착한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키포트가 필요 없는 소박한 자동차가 한 대 있었다. 우리는 이제 평범하게 살기는 이미 힘들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뭘 더 기다리겠는가. 마침내 점 하나를 찍는 것, 그것이 곧 꿈을 꾸는 것이다. 그리고 꿈을 꾸는 것이 곧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p136)

"딱 지금처럼 되고 싶어!" (중략)
"나한테 물었잖아. 뭐가 되고 싶으냐고."
"응."
니나는 여전히 개미에게 정신이 팔린 채 대답했다.
"딱 지금처럼 되고 싶어. 지금 우리는 여기 같이 있고 시간이 아주 많아. 우리는 우림을 맘껏 탐험하고, 얕은 물에서 잠수하고, 산에 오르고, 온갖 물건들을 발견하고, 시몬은 해변에서 걸음마를 배워....(생략)" (p138)

니나가 나를 멈추고 쓰러진 다른 나무 위에 올라섰다.
"자, 연설부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니나가 양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스터 시몬이 소리 내서 웃었다.
"에.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땅을 발견했습니다. 여행을 떠난 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연설 중에 갑자기 뭉클하면서 울컥했다. 우스꽝스러운 연설인데 전혀 웃기지 않았다.
"우리는 거센 물살을 거슬러 헤엄쳤고 위험한 숲을 지났고 비를 뚫고 안개 낀 정상을 정복했습니다."
나는 연설을 정말로 웃기게 하려고 필요 이상으로 과장했다. 그러나 뭉클한 감정은 떨쳐지지 않았다. 예고도 없이 울컥 복받쳤다. 나는 목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미지의 땅으로 오는 먼 여행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해냈습니다."
이제 정말로 목이 메었다.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까지 왔습니다."
미소를 지으면서도 목이 메어 숨이 막혔다.
"이렇게 많이!"
나는 냉정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문장이 점점 더 짧아졌다. 이렇게 감정이 복받칠 줄은 몰랐다. 하필이면 이런 장난스러운 연설 중에. 아내가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신뢰하고 친애하는......"
나는 열심히 단어를 찾았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친애하는...."
"모험가?"
니나가 말했다.
"그래. 그거야." (p140~141)

개인적으로 위의 내용이 가장 감동이었다...

며칠 뒤 니나와 나는 포마일비치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진짜 카드는 34장뿐이었지만 열대아몬드 잎사귀로 만든 조커가 19장 들어 있어서 게임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p158)

"여행은 꿈이고 꿈은 모험이고 모험은 삶이고 삶은 여행이야."

한때 내가 꿈꿔 보기도 했던 삶의 모습이지만 나에겐 점 하나 찍을 자신감이 없어 그냥 막연한 '꿈'이기만 했고, 앞으로도 '꿈'이기만 할 그 무언가를 용기 있게 이루어 낸 이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대리만족도 느끼고 마음 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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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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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때 : 20171023 (1일)

북클럽에서 누군가 이 책을 정말 좋아한다는 글을 올렸었고, 그 글에 달린 댓글들도 좋았어서 나의 '북 리스트'에 올려 두었던 책이었다.
책 두께가 두껍지 않고, 막 어려운 외국 이름이나 지명도 없고, 어려운 내용도 아니어서 정말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그냥 술술 읽히는 책이었다.

마리오 히메네스라는 17세의 남성이 직업이 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아버지의 잔소리에 밖에 나와 돌아다니다가 우체국에서 우체부로 근무하는 채용공고를 보게 되어 그날 바로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한다.
이 친구가 우편배달을 갈 동네의 우편물 수취인은 단 한 명.
몇 년째 노벨문학상 후보자였던 '파블로 네루다'이다.
이 동네에서는 네루다 외에는 모두 까막눈이라 편지를 받아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수취인은 네루다 한 명뿐인 것이다.

마리오의 성격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많이 순수해서 때론 답답하고 융통성 없이 느껴지는 성격이다. 책에서 마리오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마리오가 네루다의 집에 우편물을 가져다주면서 둘의 우정이 조금씩 쌓여 나가는 이야기이다.
내가 네루다였으면 그만큼 마리오에게 친절할 수 있었을까 싶다.
네루다는 왜 그런 마리오에게 마음을 열고 친구로 대해 줬을까??
우편물 수취인이 한 명이라 마리오의 일이 편할 것 같지만 네루다가 날마다 받는 우편물의 양은 어마어마해서 전에 근무하던 우체부가 몸이 너무 힘들어 그만두었을 정도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이 시인은 어쩌면 마음이 많이 외롭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그에게 마리오의 순수하고 엉뚱한 행동들과 말들이 그의 마음을 열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리오의 순수함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졌었는데 오늘 아침 문득문득 어제 책에서 만났던 마리오의 모습이 생각나면서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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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7
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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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마테오 콜롬보의 '아메리카'는 무엇이었을까? 확실히 발견과 발명의 경계는 단순한 겉보기보다는 훨씬 더 모호하다. 마테오 콜롬보-이제 그에 대한 얘기를 할 때가 되었다-는 모든 남자가 한 번쯤 꿈꾸던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여자의 마음을 여는 마술의 열쇠, 여자의 사랑이 지닌 신비한 의지를 지배하는 비밀이다. (p14, 서문)

마테오 콜롬보에게 씌워진 죄목들은 엄중한 처벌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이단죄, 위증죄, 모독죄, 미신 숭배죄, 악마 숭배죄였다. (p31)

고향 사람들은 '외과의사'라고 부르고, 파도바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는 '크레모나 사람'이라 불린 마태오 레알도 콜롬보는 현재 감금되어 있는 대학에서 약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p32)
마테오 콜롬보는 명백히 르네상스적인 사람이었다. 르네상스의 조형술, 화려함, 장식성의 영향을 받고 태어난 남자였다. (p33)

알레산드로 데 레냐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에게는 엄청난 즐거움이었다. (p43)

마테오 콜롬보는 학장의 마지막 강박관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좋은 마음을 가벼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알레산드로 데 레냐노는 마테오 콜롬보를 속으로 상당히 높이 평가하는 만큼이나 미워하고 있었다. 학장은 늘 해부학자를 경멸하는 태도로 대하고, 기회만 생기면 학생들 앞에서 '이발사'라고 부르며 깎아내렸다. 이는 외과의사들을 왕립 의과대학에서 배제해 이발사 조합에 가입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에 따른 것으로, 그들을 제빵업자, 양조업자, 공증인과 동등하게 취급했다. 물론 마테오 콜롬보가 유명 인사가 됐을 때에는 학장은 온갖 칭송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며, 자기 학교의 교수가 혈액의 순환법칙을 발견했을 때, 마치 그 공적이 학장이라는 자신의 직위가 발산하는 영감에서 비롯된 것인 양 각지에서 보낸온 축하 인사를 자신이 받았다.
해부학자와 학장은 서로 호감을 가져본 적이 결코 없었다. 그 반대였다. 두 사람은 정도가 다르긴 했지만 서로를 시기했다. 마테오 콜롬보는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해부학자였다. 명성은 자자했으나 권력이 없었다. 반면에 학장은 만인이 인정하고, 심지어 가톨릭교회의 의사들까지도 부인하지 않았다시피 지적 능력이 노새와 비슷했으나, 바티칸의 영향력을 향유했교 교황 파울루스 3세의 총애에 의존하고 있었다. (p45)

마테오 콜롬보이 새로운 발견은 관용의 모든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비너스의 사랑'-마테오 콜롬보의 아메리카-은 과학이 허용하는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누군가 '비너스의 쾌락'이라는 말을 살작 언급하기만 해도 - 한 가지 이상의 이유로 인해-학장은 피가 곤두설 지경이었다. (p46)

시체 해부는 불법이었지만 그만큼 횡행하고 있었다. 보니파키우스8세의 칙서도 아무 효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장은 유독 마테오 콜롬보에게만 칙서에 따라 해부 금지령을 발효시켜놓고 있었다. 해부학자는 알레산드로 데 레냐노 학장이 마테오 콜로보 자신만 빼놓고 모든 사람을, 심지어 학생들까지도 눈감아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메테오 콜롬보는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p48)

마테오 콜롬보는 영원히 모르고 있어야 할 것을 밝혀냈기 때문에 그 '죄'가 엄청나게 무겁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도바 대학의 졸업생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랬던 거서럼 희망 같은 것은 애당초 갖고 있지 않았고, 자신의 발견을 번복할 마음도 전혀 없었다.  (p54)
그의 발견의 원천은 실패한 사랑일 뿐이었다. 그가 갈망한 것은 여성의 어두운 면모가 아니라, 단지 여성의 마음에 있는 한 지점을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마테오 콜롬보를 '발견된 달콤한 땅'으로 이끈 목표는 확실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나 소피아였다. (p55)

훌륭한 창녀는 당연히 기독교여야 했기 때문이다. (p58)

이 세상에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가 딸을 낳고 행복해할 수 있겠는가? (p60)

그 당시 베네치아에는 세 가지가 넘치고 있었다. 귀족, 신부, 유아 지향성 성욕자였다. (p62)

"네가 죽는다 해도 난 꿈쩍도 하지 않아. 그래,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요구한 대로 서명은 해주겠다. 하지만 법이 허용한 권한에 따라 내가 널 다시 찹아들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p81)

갑자기 해부학자는 순진한 초식 동물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는 약제사였다. 갖가지 약초가 든 자루를 들고 다니면서 섬세하고 진지하게 약초를 분류하고, 한데 모으고, 나중에는 여러 가지를 섞어 달였다. (p93)

이네스의 마음이 점점 음울하고 비관적으로 바뀌어갔고, 그러면서 몸도 아프게 되었다. 이네스는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이처럼 이네스의 건강이 악화되자 수도원장은 죽어가던 사람을 기적적으로 살려낸 외과의사가 파도바에 있으며 그 일로 인해 그 의사의 명성이 자자함을 기억해냄. 이 의사가 마테오 콜롬보였다.
마테오 콜롬보가 이네스를 진찰하는데 베르티노에게 옷을 벗겨 달라고 해서 벗기니 성기가 있어서 깜짝 놀람. (p125)

마테오 콜롬보는 환자를 돌보면서 열흘 동안 피렌체에 머물렀다. (p129)
이네스는 마테오 콜롬보가 알고 있는 그런 음탕한 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상한 면모를 지닌 여자였다. 옷차림이 지극히 정갈하고, 말과 행동도 조신했다. 그런데 해부학자의 치료를 받을 시각이 되면 그녀의 몸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악마의 영혼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리는 것 같았다. (p130)

마테네 콜롬보는 이네스에게 돈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 해서 돈을 받아 갔다. (p134)
치료가 끝난 뒤 해부학자의 태도도 밑도 끝도 없이 넘쳐흘렀다. 그녀 앞에서 자신의 불행을 한탄할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네스는 하느님께 바쳤던 모든 열정을 해부학자에게 고스란히 쏟아부었다. (p134)
밤이면 그녀는 해부학자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누웠다. 해부학자의 꿈을 꾸었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때면 그녀의 입술은 해부학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의 순간이 도래했다. 의사의 판단에 따르면 이네스 데 토레몰리노스의 건강은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의사는 피렌체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수도원장은 외과의사와 제자의 노고에 뜨거운 감사를 표혔다.
이제 이네스가 앓았던 병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이름은 발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였다. (p135)
파도바로 돌아온 그는(해부학자) 살아 있거나 죽은 여자 107명을 검사했다. 놀랍게도 모든 여자의 몸에 이네스 데 토레몰리노스에게서 발견한 '음경', 즉 '음순의 살 뒤에 숨어 있는 그 작은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p137)

그가 발견한 아메리카의 중심부에는 이미 확실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모나 소피아'였다. 그는 이전에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곳을 걷고 있었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마법사, 마녀, 지배자, 극작가들이,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이면 누구나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곳을 그가, 해부학자가, 그가,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가 결국 찾아낸 것이다. (p139)

1558년 3월 20일, 알레산드로 데 레냐노 학장이 대학의 영성지도신부와 경호원 둘을 대동하고 마테오 콜롬보의 방으로 쳐들어왔다.
학장은 최고재판소의 판결문을 마테오 콜롬보에게 읽어주었다. 해부학자의 활동에 관해 조사하고 해부학자를 깃하는 문제를 결성하기 위애 의사위원회를 소집하겠다는 학장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판결문이었는데, 혐의 내용은 이단, 신성 모독, 마법 행위, 악마 숭배에 관한 것이었다. 해부학자가 쓴 원고아 벽에 쌓아둔 수많은 그림은 모조리 압수되었다.
마테오 콜롬보가 산안토니오 감옥에 갇히지 않은 이유는 당국의 관용 때문이 아니라 위원회의 결정이 나기 전에 그 기소 건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하려는 당국의 희망 때문이었다. (p141)

제6장
영혼의 열망과 육체의 행동에 관해
이 부분은 정말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언젠가 저는 '윤리학이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것이라면, 해부학은 여자의 행동을 연구하기 위해 예정되어 있는 학문이다'라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p177)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은, 우리가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밝힌 논리의 결론에 도달해보면, 여자에게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해부학자가 이렇게 논하자 법정 안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수긍하는 모습이 보였고, 심지어 의사위원들 사이에서도 무심결에 수긍하는 모습이 보였다.
학장은 자신이 여자를 옹호하는 시도를 하게 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p178)

그래서 우리가 도덕적인 기준을 통해 여자의 애매모호한 행동 방식을 이해하려 들면, 그 어떤 경과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자에게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p180) 

위원회가 유죄 판결문을 작성하려던 바로 그날, 로마에서 파견한 사신이 파도바에 도착했다... 서신에는 교황 파울루스 3세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나이 일흔 줄에 접어든 교황은 건강이 별안간 악화되면서 마테오 콜롬보의 치료를 요청하고 있었다. (p195)

주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내린 판결은 해부학자에게 호의적이었다.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마테오 콜롬보는 무죄 판겨을 받았고, 의사들은 사건을 종교재판에 회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의사위원들의 마음은-거의 모든 경우에 그렇듯, 그리고 그들의 원래 성향에 따라-학장이 제시한 길, 즉 화형장으로 가는 길로 뚜렷이 기울어 있었다. 학장이 행사하는 막강한 권위에 휘둘린 위원회는 해부학자가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해부학자를 단죄하여, 부자비한 판결문을 준비하고 있었다.(p196)

파도바 대학 학장에게 보내는 의사위원회의 평결
"귀하가 관장하는 대학의 해부학 주임교수이자 [해부학에 관해]의 저자인 치롤로기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에 관한 문제로 귀하가 소집을 요청한 본 위원회는 제출된 보고서, 증언 그리고 피고인의 진술서를 모두 검토했습니다. (중략) 혹시 귀하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된 무분별의 이유는 바로 적의와 분노가 아닐까 사료됩니다." (p199)

그리고 제가 발견한 사실을 부인에게만 털어놓기로 결심했다면, 그 이유는 제가 저의 달콤한 '아메리카'를 발견한 곳이 바로 당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 당신이 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제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아마 오늘도 부인은 저를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당신이 아닙니다. 제가 부인의 심각한 병을 치료했을 때, 저는 본의 아니게 당신을 치료해준 대가로 당신이 제게 고백한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부인의 병이 머물던 곳은 '비너스의 사랑'이었고, 저를 사랑한 것은 바로 부인의 '비너스의 사랑'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부인,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p228)

"비너스의 사랑, 혹은 그것의 감미로움." 그녀는 숫돌에 칼날을 갈면서 되니었다. 매일 아침 수도원의 종을 칠 때처럼 차분한 마음으로 칼을 갈았다. 이제 마침내 그녀는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자 성기처럼 보이는 그것을 칼로 잘라 내면 자기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그것 때문이 아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이다.) p229

항상 모호하기 때문에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여자의 자유의지를 지배할 수 있는 도구, 여자의 신비한 사랑이 지닌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 여자의 사랑을 지배하는 기관이다. 그 이름은 바로 '비너스의 사랑'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 '클리토리스'다.
마테오 콜롬보의 발견과 운명은 두 여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첫번째 여자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녀 모나 소피아다. 그녀는 마테오 콜롬보의 마음을 사로잡음으로써 그가 평생 그녀를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이끈다. 그녀의 사랑을 사려고 시도하던 마테오 콜롬보는 여자의 신비로운 몸에 대한 탐사를 시작해, 그 대상을 창녀뿐만 아니라 당시에 금기되어 있던 시체까지 확대한다. (p251)
두번째 여자는 스페인 귀족 가문 출신인 이네스 데 토레몰리노스다.
그녀는 성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정결하고 신심이 깊은 여자로, 그 지역의 어떤 의사도 치료할 수 없는 특이한 병에 걸림으로써 결국 마테오 콜롬보를 불러들이게 된다. 그리고 마테오 콜롬보는 그녀의 몸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한마디로 말해 이 두여자와 마테오 콜롬보는 '치명적인' 삼각관계 속에서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클리토리스의 발견은 종교재판에 회부될 만한 대사건으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악마의 군대가 죄의 대상인 여자를 장악해버린다면 기독교가 엄청난 불행을 다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브의 딸들이 자기 가랑이 사이에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초래될 혼란이 걷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p252)

실제로 마테오 콜롬보는 아주 중요한 해부학자였다. 자기보다 덜 유능한 다른 해부학자들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했다. 호기심 반 연민 반, 마테오 콜롬보에 매료된 안다아시는 가장 단순한 것부터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나 마테오 콜롬보의 '발견'에 관한 정보가 없다는 데 놀란 안다아시(작가)는 그 발견이 아마도 혹독한 검열을 받음으로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이를 픽션화하기로 작정한다. 그렇게 해서 소설의 대략적인 플롯이 탄생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속이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가슴에 새긴 채 감춰진 역사적 사실을 문학적으로 확대 재해석하고 재생산해나간 것이다. (p253)

[역사와 문학 사이]
문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있을 법한 것'을 필연성의 법칙에 맞게 확대하거나 심화해 꾸며놓는다. 작가는 실제로 존재했던 특정 인물을 작품에 등장시키는 경우에도 과거 사실의 실체를 모두 알 수는 없으므로 그 인물을 역사적 사실과 동일하게 형상화하지 않고, 그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자유롭게 그려낸다.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되어 이루어진 구조물인 역사소설이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기록이 허구와 서로 조화롭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가가 기술한 역사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입증되어야 하지만, 작가 특유의 주관적인 관점과 해석이 들어 있는 '이야기'는 역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해부학자]의 경우 의도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다르게 취했다. 따라서 소설의 얼개는 허구적이다. 문학은 허구에 바탕을 둔 것, '상당히 잘 이야기된 거짓말'일 뿐이기 때문이다. 보들레가 말했다시피 "문학은 다시 쓰이는 원고다."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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