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자가 남자일지 여자일지 생각해봤을 때 난 남자일 거라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트럭을 몰며 화물 일을 하던 남편이 빗길 사고로 사망을 한 후 아이와 자신만이 덜렁 남겨진 집이 싫어 이전의 남편처럼 트럭에 몸을 싣고, 큰 돈벌이도 되지 않는.. 남자들도 하기 힘들어하는 그 일을 하며 도로 위에서 어느새 거칠 대로 거칠어진 어느 여자의 모습이다.
스물한 살에 아이를 갖고 결혼을 하겠다는 나의 말에 미친년이라며 등짝을 후려치는 친정엄마와, 눈물을 비치며 그래도 제 새끼 책임지겠다고 하는 걸 보니 된 놈인 모양이라고 어디 데려와보라는 친정아버지.
그렇게 나는 결혼을 하여 딸아이를 낳았고 어느새 그 딸이 내가 결혼했던 나이 때와 비슷한 스물두 살이 된 어느 날 나에게 결혼할 남자가 있다고 얘기를 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남자의 나이는 딸보다 열 살이 많았고 자신과는 다르게 집안 형편이 좋아 보였다.
가장 예쁠 때 가장 행복하고 싶고, 사랑하니까 결혼하고 싶다는 딸.
참 철없는 얘기한다.. 싶을 수 있지만, 스물두 살의 어린 나이의 딸이 '결혼'이라는 단어와 함께 맞물려 있는 수많은 '가능성'등을 예상할 수 없고, 그려볼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내놓은 일 말고는 해준 게 없었고, 용돈 한번 넉넉하게 쥐여주지 못하며 겨우겨우 키운 딸아이가 내일 남자네 집에 인사를 간다며 거울 앞에서 옷을 열 번도 넘게 갈아 있었다.
딸아이가 남자네 식구를 만나러 가 있는 동안, 나는 딸아이가 없는 집 아이라고 무시당하지는 않을까. 말실수라도 해서 미운털 박히는 것은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시댁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가난이 죄라더니, 딸 가진 게 더 죄스러웠다.
며칠 사이 부쩍 살이 내린 아이의 눈가가 붉게 부어 있었고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눈만 끔벅인다. 이불을 걷어치우고 아이를 앉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바른대로 말 하라며 몇 번을 다그친 뒤에야 아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없다는 건 알았는데 어미가 화물 운송을 한다는 말에 다들 표정이 바뀌더란다.
이십여 년 전의 나처럼, 딸아이는 혼전임신을 하여 결혼을 하려고 하였고 죽어도 그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결국 유산을 하였다.
지금의 나는 한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망설임 없이 다음 날로 수술 날짜를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부분에서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라는 옛 어른들의 미신적인 말이 떠오르기도 했고 엄마와 딸의 팔자가 돌고 돌아 서로 같아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욕실에서 물소리만 들린다. 오래 걸리냐는 나의 물음에 아무 대답이 없어 문을 열어보니 바닥이 온통 피범벅이었고 시뻘건 핏물이 고인 세숫대야에 아이의 손목이 담겨 있었다.
폭염. 찌는듯한 더위..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더위.. 사람의 몸에서 물이란 물은 다 빼내어 버릴 것 같은 더위.. 끝날 것 같지 않은 더위..
하지만 이러한 폭염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디선가 불어오는 살랑 바람에 조금씩 꺾이고 시간이 지나 더 큰 바람들에 완전히 꺾이는 때가 온다.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은 때가 온다.
그 바람이 어린 딸에게는 보이지 않았고 희망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보다. 아니, 어쩌면 딸은 조금 있으면 이 죽을 것 같은 폭염에서 나를 살려 줄 바람이 불어와 줄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딸아이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폭염과도 같은 일들을 이겨 낼 힘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도 닮아 있는 이 모녀의 삶. 한없이 치열했고, 한없이 외로웠을 이 두 모녀의 삶의 모습이 마음을 너무 묵직하고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