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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혼모노 - 성해나
-어쩐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흥분되었다.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p.65)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
-알 수 없지만, 아주 좋은 하루였어요. (p.112) <스무드>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p.153) <혼모노>
-아니야. 여긴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야. 난...... 그런 걸 가르친 적 없어. (p.193)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이상적인 관계가 어디 있겠어요. 다 환상이죠. (p.236) <우호적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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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 작가님의 소설을 처음 읽은 건 작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서였다.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를 읽은 후 너무 좋아서 성해나 작가의 소설은 다 읽겠다고 결심했고, 연이어 <혼모노>를 읽고 압도당했던 기억이 있다. 이 단편들이 실린 소설집이 나오기를 고대했는데 마침 창비에서 가제본 서평단을 진행하여 신청했다.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논란 있는 감독 김곤을 덕질하는 이야기다. 김곤의 골수팬이 모여 만든 길티 클럽 정모에 나간 ‘나’가 겪는 일과 길티를 느끼면서도 그를 덕질하는 감정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흐린 눈 하며 덕질하던 ‘나’는 그의 공개 사과에 제 안에서 어떤 것이 펑 터지는 것을 느낀다. 그건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내가 선택한 것이 옳다고 믿던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을 거다. 전에도 짧게 이런 감상을 남겼었는데, 유명인의 범죄와 그걸 알면서도 무조건 지지하는 팬들을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었다. 한편으로는 형태는 다를지라도 누구에게나 이런 길티가 조금씩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스무드>는 한국계 미국인 듀이가 한국에 처음 와서 ‘타이극기’부대를 만나는 소설이다. 듀이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도 교포의 그것이라 읽으면서 속으로 불편함을 느끼던 찰나, 듀이가 만난 사람들... 정말 그게 맞아?라고 생각하며 약간은 경악한 채 읽었다. ‘스무드’는 듀이가 매니저를 맡고 있는 제프의 작품인데, 제프의 작품에는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다. 의도도 동기도 비밀도 없다고 한다. 그게 마치 듀이가 보는 태극기 부대의 단면 같아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소설.
<혼모노>는 오십 넘은 무당이 신기를 잃고, 앞집에 이사 온 신애기 무당을 질투하고 바라보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정말로 미쳤다... 신을 잃은 무당이 거물 정치인의 굿판마저 신애기에게 빼앗기게 되고, 그렇다면 무엇이 혼모노인지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대단히 충격적이다. 사실 무당과 점이라는,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불분명한 소재를 가지고 진짜와 가짜의 경계마저 섞어 버리는 전개가 놀라웠다.
앞선 세 편이 너무나 강렬했지만 이어지는 네 편의 소설도 전부 인상 깊었다. 고문 취조실을 만들면서 미쳐가는 건축가의 모습을 묘사한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예술가의 광기와 인간이 어떻게 악해질 수 있는지, 악의 평범성이 생각나기도 하는 무서운 소설이었다. 그리고 소도시 재건 회사에서 팀원들과 겪는 감정을 드러낸 <우호적 감정>도 현실적이라 씁쓸했다. <잉태기>는 서진을 둘러싼 엄마와 할아버지의 묘한 알력과 경쟁을 그린 소설인데, ‘나’(엄마)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부가 너무 끔찍해 견딜 수 없었다. 결말까지 숨 막히던 소설이다. 마지막 단편인 <메탈>은 어릴 때 메탈 음악을 하며 함께하던 친구들이 흩어져 현실을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비슷하게 겹치는 소재가 없다. 덕질 묘사도, 교포의 시선도, 무당의 심리도, 심지어 중년 여성의 속마음마저 생생한 날것처럼 전해졌다. 그럴 때면 책을 읽는 나도 그 상황에 몰입해서 그 자리에 놓여 있게 됐다. 박정민 배우가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는 추천사를 남길 만하다. 모든 소설이 그만큼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대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서 자꾸 다음 장을 넘기게 된다. 기대한 것보다 그 이상으로 너무 재밌고 좋았다. 앞으로 책 추천해 달라는 말을 들으면 어김없이 성해나의 「혼모노」를 추천하게 될 것 같다.
-출판사 이벤트를 통해 받은 가제본 도서입니다.
#혼모노 #성해나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