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편에서 이리가 오늘의 젊은 작가 53
윤강은 지음 / 민음사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편에서 이리가 - 윤강은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진군하지 않고 도망친 자가 살아남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p.53)


-네가 나를 구원한 이유가 내가 나를 버린 이유이고, 네가 동경하고 시기하는 내 모습을 나는 온 힘을 다해 증오하고. (p.90)


-정말로 인간들은 얼어 죽기 직전까지도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막막함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p.120)


-유안은 누군가 이 생명도감을 집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대단한 사명감도 이타심도 아닌, 그저 잊고 싶지도, 잊히고 싶지도 않은……. (p.133)


-유안은 씨앗을 떠올려 보았다. 눈 속의 씨앗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들. 낯선 욕망에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그런 존재들을 더 알고 싶었다. 기억하고 싶었다. (p.141)


-저편에서 어느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한 번 더 울려왔다.

언제 다다르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저편에서. (p.157)


-

망한 세상에서도 생존과 사랑을 말하는 소설. 대멸종 시대가 된 한반도에는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가진 세 개의 구역이 있다. 가장 남쪽의 ‘온실 마을’, 무기를 생산하는 중부 지역인 ‘한강 구역’, 그리고 대륙과 국경을 맞댄 북부의 ‘압록강 기지’다. 설원을 배경으로 개 썰매를 타고 한반도를 질주하는 아포칼립스적 세계관이기도 하다. 유안은 온실 마을에서 생산한 식량과 물자를 다른 구역으로 나르는 짐꾼이다. 한강 구역에서 같은 짐꾼이자 차기 구역장으로 내정된 화린을 만난 유안은 서서히 친해지게 된다. 화린에게는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군인이 되어 압록강 기지로 간 친구 기주와 태하가 있다. 현재 태하는 대륙으로 건너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고, 기주는 대륙에서 넘어온 백건과 가까워진다.


이야기는 중반을 넘어서면서 완전한 멸망을 앞두게 된다. 대륙이 일으킨 전쟁으로 모두는 생존을 위협받는다. 기주와 백건은 전쟁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이 아닌 도망을 택한다. 화린과 유안도 각자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설원을 질주하기 시작한다. 먼 미래의 지구가 눈으로 뒤덮인 설정과 배경 설명이 탄탄해서 읽는 동안 몰입감이 컸다. 속도감이 빨라 좋았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대의를 위해 싸우다가 죽지 않고, 생존을 위한 질주를 선택한 것이 인상 깊었다. 소설 속에서뿐만이 아니라 지금이 생존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언제부턴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를 살게 되었다. 한 개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가끔 잊고 지내는 게 아닐까 싶은 시대에 이런 소설의 등장은 너무나 반갑다. 


저편에서 울부짖는 짐승의 소리는 살아남은 생물이 전해주는 희망 같다. 생존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이 좋았다. 서로를 이해하고 기억하려는 연대가 있기에 삶은 계속될 것이다. 척박한 설원에서도 언젠가는 싹을 틔울 씨앗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주 작은 희망 하나만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 그 곁에 나를 기억하고 너를 기억해 줄 사람들이 존재하니까.


-이 게시물은 서평단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저편에서이리가 #윤강은 #민음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록색 미술관 - 화가들이 사랑한 자연, 그 치유의 풍경
강민지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록색 미술관 - 강민지


-우리도 마음의 창문을 조금 더 열고, 두 팔 벌려 모든 것을 환영하는 열린 태도를 가진다면, 이 세상도 훈훈한 온기로 가득 찬 피사로의 그림 같은 명작이 되지 않을까요? (p.33)


-훌륭한 명사에는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칸딘스키의 여자’에서 이제는 당당히 이름만으로 우뚝 선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처럼 우리도 아무 수식어 없이 각자의 이름이 세상에 각인될 수 있도록 매일 자신의 자리에서 힘차게, 당차게 고군분투해봅시다. 그렇게 한다면 오늘은 분명 어제보다 더 근사하고 눈부신 하루가 될 거예요. (p.91)


-이질적인 것들이 아름답게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그림쇼의 작품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조화와 공감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참 좋을 테지요. (p.241)


-

초록이 조금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겨울이 지나가기 전에는 초록을 볼 수 없으니 그림으로라도 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강민지 저자의 「초록색 미술관」은 16~20세기 화가 열다섯 명이 그린 초록색 작품에 관한 예술 에세이다. 이 책을 통해 처음 보는 화가도 있었고 그림만 아는 화가도 있고, 아는 화가의 못 본 작품을 만나기도 했다. 직접 도슨트에게 듣는 것처럼 조곤조곤한 설명에 점차 이 책에 빠져들었다. 초록색 그림들을 보며 눈이 편안해지는 기분 !


이 책은 친절하다. 화가를 소개할 때는 우리에게 익숙한 명언이나 문장을 끌어와서 다음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그다음으로는 화가의 생애가 서술되어 있어 추후 남긴 작품들의 모티브를 알 수 있는 점도 좋았다. 거의 페이지마다 미술 작품이 실려 있고 그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는 구성이다. 각 장의 마무리에는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다정한 관점이 드러난다. 


특히 인상 깊었던 화가는 더는 ‘칸딘스키의 여자’가 아닌 가브리엘레 뮌터였다. 복수 대신 우아한 방식으로 성장한 화가가 된 모습도 멋지고, 특색 있는 그림체도 개성 있고 좋았다. 또 한 사람은 ‘그랜마 모지스’로 불린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다. 일흔여덟 살의 나이에 그림을 시작해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는 것이 놀라웠다. 모지스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할머니 집에 온 것 같은 포근함과 편안한 행복감이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는 나이가 상관없다는 것도 느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소개된 카미유 피사로의 따뜻한 감성도 기억에 남는다. 


아직은 계절이 겨울이라 그런가, 존 앳킨스 그림쇼의 어딘지 쓸쓸한 초록이 자꾸만 마음에 와닿았다. 잠시 초록의 계절이 그립다면 「초록색 미술관」으로 여행을 떠나보길 추천하고 싶다. 특히 아트북스의 책들은 예술에 입문하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추운 겨울에 초록빛 자연의 그림들을 보며 힐링할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 게시물은 아트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초록색미술관 #강민지 #아트북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든 나의 얼굴을 - 제2회 아르떼문학상 수상작
임수지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잠든 나의 얼굴을 - 임수지 


-일어나서는 여기저기에 산재한 마음을 노트 위에 싹싹 쓸어모았다. 별것도 아닌 문장들이었다. 그게 나의 전부였다. (p.134)


-고모의 눈에서 나는 무언가를 읽었을까? 고모가 내게서 무언가를 읽어버린 것은 아닐까? (p.191)


-다음에는 정말 노트와 펜을 챙겨올 것이다. 나의 오래된 샤프펜슬도 챙겨야지. 나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려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눈으로 밑줄이라도 긋듯이 노려보며 다짐했다. (p.218)


-문득 고모는 내게 말했다.

어디든 많이 가봐. 멀리도 가보고. 오래도 가보고.

너는 그럴 수 있으니까. (p.258)


-삶은 상도 벌도 아니야. 삶은 그저 삶. (p.280)


-

서울에 사는 나진은 고모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 광주로 내려간다. 오랜만에 간 그곳에서 나진은 과거의 기억과 마주한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모가 사는 집에 어쩔 수 없이 살게 되었을 때의 기억이다. 살면서 나진은 무뚝뚝한 고모와 몇 마디 나눠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나진을 버티게 해주었던 건 친구 경은이다. 현재의 나진과 과거의 나진이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이 교차하며 소설은 담담하게 서술된다.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그게 우리의 일상 같다. 나진의 추억 속 풍경들은 내가 겪어온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관계는 다를지언정 일인칭 서술자인 나진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나에게도 데면데면한 고모가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나진의 눈으로 보는 고모 희라는 무척 고단해 보였다. 현재의 고모는 며칠만 스노보드를 타러 다녀오겠다고 한 뒤 몇 주간 연락이 끊긴다. 아주 잠깐이지만 희라의 시선으로 삶을 돌아보았을 때 깨닫게 되었다. 희라에게는 오직 잠깐의 휴식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하고.


나진은 고모와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고모는 나의 잠든 얼굴을, 나는 고모의 잠든 얼굴을 보며 안도한다. 그게 지금껏 서로를 지탱해 왔던 방식 같았다. 내가 잠든 얼굴을 나는 볼 수 없더라도 내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은 볼 수 있다는 것이 내게도 큰 위안이 되었다. 나진이 혼자 힘으로 커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가족들이 힘이 되어 주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나진은 광주에서 지내는 3주 동안 또다시 성장해 나간다. 여기저기 산재한 마음을 쓸어 담으면서, 노트와 펜을 준비하고, 아주 크고 멋진 펜을 준비해서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리라고 다짐한다. 다시 떠난 나진과 돌아온 희라는 짧은 시간 자신들이 변화했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잠든 나의 얼굴을 바라봐주는 따스함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부드럽고 미지근한 온도의 따뜻한 소설이었다. 그만큼 너무 좋았다.


-이 게시물은 은행나무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잠든나의얼굴을 #임수지 #은행나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와 그녀들의 도시 - 독서 여행자 곽아람의 문학 기행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와 그녀들의 도시 - 곽아람


-책 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건 문학이 단지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 문학이 말하는 인간의 위대함과 선의, 그리고 낭만이 실재한다는 것과 동의어여서 그간 내가 책에서 받은 위안이 한 꺼풀짜리 당의정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p.9)


-6월의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는 세 가지 빛깔, 새잎의 초록, 민들레의 노랑, 흙의 빨강으로 기억될 것 같다. (p.29)


-마녀사냥의 희생양으로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하면서도 개의치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헤스터의 당당함이 살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오해받을 때 취해야 할 자세의 표본이 되어 주었다. (p.80)


-나는 스칼렛을 좋아했다. 내가 읽은 어떤 소설의 여주인공보다 당차고 적극적이라 좋았다. 그는 착하지 않았고 순종적이지 않았고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남자에 의존하지 않았다. (p.150)


-그날의 기억이 강렬했던 건 결국 문학의 힘이라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세계.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어트랙션은 작품 속 장소다. (p.354)


-

문학을 사랑하는 독서 여행자이자 조선일보 문화부 출판 팀장 곽아람 기자의 여행 에세이. 작가의 유년 시절을 함께한 소설들의 배경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상상만으로도 설레고 두근거리는 내용이 담겼을 것 같았다. 나 역시 어릴 적 외국 소설들을 읽을 때면, 알지 못하는 지명을 가진 장소들을 책에 나온 묘사대로 머릿속에 그리곤 했으니까.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실재하는 곳들을 실제로 가본 저자가 부러웠다.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인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부터, 「작은 아씨들」의 콩코드, 「마지막 잎새」의 뉴욕,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애틀랜타와 서배너, 「카리브해의 미스터리」의 세인트마틴 외에도 책과 작가의 도시 열세 곳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이나 헤밍웨이에게 영감을 준 장소처럼 내가 영상으로 접한 적이 있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본 적 없는 곳이라 책에 사진이 함께 있어서 더 좋았다. 책을 따라가며 읽는 동안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사실 처음 책을 읽기 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은 아씨들이나, 익숙한 빨강 머리 앤에 관한 내용이 궁금했었다. 어릴 적 책을 읽으며 나도 앤이 되었다가, 조나 에이미가 되기도 했다. 문학 여행 이야기는 다 재밌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책과 영화를 아직 본 적이 없는데 한 드라마를 통해 줄거리를 알게 됐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스칼렛이 더 궁금해졌다. 나도 영상보다는 책을 선호해서 꼭 책으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장소는 마녀 도시 세일럼이다. 선조의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 창작의 연료가 된 너새니얼 호손이 인상 깊었다. 「빙점」의 아사히카와를 방문하는 것으로 책은 끝이 나지만, 문학 여행은 끝나지 않은 것처럼 작가님의 다음 문학 여행 에세이가 또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사랑하는 문학 작품 속 주인공들이 살았던 도시를 찾아간다는 건 무척 낭만적인 일이다. 가끔 여행지에서 소설의 배경이 된 장소를 만나거나 어느 작가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면, 가슴이 뛰곤 했다. 그 행복한 경험을 나도 앞으로 더 많이 겪고 싶다. 언젠간 떠날 문학 투어를 마음에 그리며 아마도 이 책을 또다시 읽게 될 것 같다. 문학을 좋아한다면 누구에게나 설렐만한 내용으로 가득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사랑했던 그녀들의 도시를 이 책을 통해 함께 떠나보길 추천한다.


-아트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나와그녀들의도시 #곽아람 #아트북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5
박지영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 박지영


-나 같은 것도, 아니 어쩌면 나 같은 거라서, 오히려 팬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p.38)


-그러니 인생 빨리 망하고 싶으면 누군가를 죽도록 좋아하면 된다. 그리고 어차피 망할 인생이라면 가장 좋은 건 누군가를 미치도록 좋아해서 망하는 것이다. (p.60)


-버리는 것, 잘 버리는 것이 때로는 잘 간직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특히 소중히 잘 간직했던 것일수록 제때 잘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한때의 진심에 대한 예의다. (p.78)


-평생 이모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김지은은 알고 있었다. 이모들의 삶이 어떻게 지워져 왔는지, 이모들의 미래가 어떻게 버려졌는지. 그것이 김지은이 결코 누구의 이모도 되지 않을 거라고 결심한 이유였다. (p.143)


-절망은 쉽고 낙관은 어렵다. 그러나 세상의 시간은 절망의 속도가 아니라 낙관의 속도로 움직인다. 아마도 용맹한 박자로, 경솔한 리듬으로. (p.243)


-

실패한 덕후 복미영이 버리기 아티스트로 다시 태어나 자신의 팬클럽을 만든다는 소설의 줄거리를 듣자마자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평생 덕질만 해온 복미영이 자기 자신을 덕질한다는 게 마음에 들어왔다.


56세의 복미영은 최애(배우 w)가 대형 사고를 쳐서 탈덕한다. 굿즈를 중고 판매하려던 복미영에게 w의 팬인 ‘멍든 하늘’이 그런다. 네까짓 것도 팬이냐고. 복미영은 네까짓 것에서 ‘네’를 버리기로 한다. 까짓것 나도 팬클럽 한 번 만들어보자, 라는 마음으로 복미영이 만든 팬클럽의 1호 팬은 김지은이다. 복미영 팬클럽은 팬이 복미영의 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복미영이 직접 자신의 팬을 선택하는 구조다.


김지은은 어머니와 이모를 돌봐야 하는 처지에 처해 있다. 누군가는 돌봐야 하는 이모들, 누군가를 돌보기만 했던 이모들, 그럼에도 이름이나 명함 하나 남기지 못했던 이모들. 이 사회에서 아이나 노인을 돌보는 일은 대부분의 ‘이모’들이 하고 있다. 가전제품에 이모를 붙이는 기괴한 언어 표현도 이 소설에서 다뤄진다. 왜 돌봄 노동을 하는 주체는 기계조차도 이모여야 했을까. 실제 수많은 이모들이 당연하게 희생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복미영 역시 조카의 아이를 돌보는 직업을 택했지만 조카사위는 복미영 이모에게 용돈이나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복미영은 제 인생에서 자신을 구속하던 불필요한 짐을 전부 버리기로 결심한다. 


읽기 전에는 단순히 덕후 복미영의 웃지 못할 탈덕기와 그로 인한 자기 돌봄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는데, 돌봄 노동 같은 현실적 문제들이 촘촘하게 자리 잡힌 소설이었다. 사랑해서 누군가를 돌보지만 그것이 노동이 될 때 어떤 감정의 고난을 겪게 되는지 생각해 볼만 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팬이 되었던 복미영을 통해서, 버리는 것도 잘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멍든 하늘에게 역조공을 하러 가는 복미영과 김지은의 로드 무비 같은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벌써 책이 끝나 있다. 이 책이 더 좋았던 건 무겁지 않은 분위기와 유머 덕분이다. 복미영의 망한 사랑, 즉 덕질 이야기도 재밌었고 열린 엔딩 닫기 북클럽도 유쾌했다. 돌봄의 문제는 당장 해결되지 않지만 우선은 나 자신부터 돌보기로 한다.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어졌다. 일단은 계속 가보고 싶다. 복미영처럼, 용맹하고 경솔하게.


-이 게시물은 현대문학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복미영팬클럽흥망사 #박지영 #현대문학 #핀시리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