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공현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6월
평점 :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 공현진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깊은 어둠이 겹겹이 쌓인 너머로 검은 나무가 자라났다. 녹과 함께 솟구쳤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어. (p.34) <녹>
-같이 떠내려가는 것. 같이 잠기고 같이 사라지는 것.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p.55)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그런데 모르는 채로, 모르면서,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아닌 사람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믿는 것. 그것이 진짜 믿음일까. (p.91) <돌아가는 마음>
-그런데 가만히 듣다 보면 진아는 선자 씨가 평생 해온 것이 공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p.157) <선자 씨의 기적의 공부법>
-우리도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한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는 모든 것들에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전한다. (p.243) <우리는 숲>
-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의 주호와 희주는 수영 강습에서 앞줄과 뒷줄, 눈치 없음과 눈치 있음, 균형 감각까지 정반대인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의도치 않게 백수가 되었다는 점과 수영 실력이 형편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해수면은 점점 높아지고 있고, 꿀벌은 사라졌다. 식량난이 발생하면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빠르면 30년 후에 지구가 완전히 물에 잠긴다고 한다. 희주는 그게 무섭지 않고 위안이 됐다. 같이 떠내려가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기후 위기를 자주 느끼면서 이대로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속 멸망은 성큼 더 다가와 있는 느낌이다. 주호와 희주를 둘러싼 세상의 부조리한 일들은 개인이 발버둥을 쳐도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는 두 사람의 수영 실력처럼 말이다. 수영을 배우는 건 생존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멸망할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연대와 공존이 필요하다.
공존의 문제는 이번 소설집에서 제일 인상 깊게 읽은 <선자 씨의 기적의 공부법>에서도 느꼈다. 요양 보호사 준비를 하는 청년 진아는 일흔이 넘은 선자 씨와 친해진다. 선자 씨는 단어도 잘 모르고 요즘 애들이 하는 것처럼 필기도 못 하지만, 무조건 외우고 또 외운다. (이것이 선자 씨의 기적의 공부법이었다!) 진아는 선자를 도와주기도 하고 수도 동파 문제로 도움받기도 한다. 청년과 노년의 두 사람이 서로 잘 모르는 것을 알려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존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가족 이야기를 다룬 <돌아가는 마음>과 <권능>은 꽤 숨 막히는 세상이었다. 각자의 입장이 있겠지만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생각이 많아지게 한다. <우리는 숲> 역시 무거운 주제였지만, 단지 사랑이라고 말한다고 다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마지막에 실린 <모두가 사라진 이후에-3인칭의 세계>는 인류가 소멸되는 세상을 그렸다. 인류 수를 줄여가는 프로젝트는 섬뜩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종말의 방식 같다. 멸망 이후의 세상에 혼자 살아남은 하나는 그래도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한다. 그것이 홀로 생존한 하나가 꿈꾸는 공존의 방식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더라도 살고 싶다는 충동이 인간을 멈추지 않게 한다. 갈 수 있는 만큼만 가기로 한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의 주호와 희주처럼, 그리고 ‘우리 함께 멸망하자는 말은 함께 살아가자는 말과도 같다’는 ‘작가의 말’에서처럼 끝을 알아도 사랑이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 같이 멸망하는 것도 결국은 공존하는 것이니까.
-이 게시물은 문학과지성사에서 서평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어차피세상은멸망할텐데 #공현진 #공현진소설집 #어차피세상은멸망할텐데_서평단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