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암소들의 여름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정현규 옮김 / 쿠오레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웃는 암소들의 여름>은 제목부터 기가 막히다. 암소가 웃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암소가 히-쭉 웃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를 않는다. 소가 입을 U자로 만들고 웃을 리는 없고,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지도 않을 것이고.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제목이다. 소는 소인데 암소일 이유는 무엇이며, 소 주제에 웃기는 왜 웃는 것이며, 하필 봄도 가을도 겨울도 아닌 여름에 웃는지 알 수가 없다.

  <웃는 암소들의 여름>은 "하나하나 재고, 따지고, 몸 사리고, 너 인생 안 피곤하냐?"며 내 머리를 툭툭 건드린다. 

  사흘 전의 나와, 한 달 전의 나와, 일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생활하는 모습이 별반 다르지가 않다. 그냥 날짜를 26에서 27로 또 28로 바꾸면 그 날이 그 날이 된다. 붕어빵처럼 틀로 찍어낸 듯한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스스로가 굉장히 지루한, 나사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마치 도시를 빙빙 돌면서 사람들을 태워주고 내려주던 택시기사 세포 소르요넨처럼 말이다. [그의 삶은 매일 일어나는 우연들에 의해 결정된다(p.7.)]라고 책은 말하고 있지만, 그 위에 이어지는 말을 보자면 그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우연들은 같은 틀에서 익어 나온 붕어빵처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택시기사가 강남에 가서 손님을 태우고 종로에서 내려주든, 동대문에서 손님을 태워서 노량진에서 내려주든, 장소만 바뀔 뿐이지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소가 웃을 일이 일어난다. "기사 양반 가고 싶은 데로 가시오. 마음~대로!"라고 말하는 손님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타베티 뤼트퀘넨이. 

  세포 소르요넨은 '자유'에 신이 난다. 더구나 이 자유는 안전하기까지 하다. 자기가 마음껏 달리고 싶은 대로 내달리긴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손님이 요구한 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자유는 어딘지 광폭한 데가 있어서 고삐를 채울 수가 없다. 

  택시 기사 세포 소르요넨은 어느 도시에서 결국 사장으로부터 '넌 짤렸어.'라는 말을 듣는다. 이제 그는 도시를 뱅뱅 도는 삶에서 내쳐진,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불안해지지만, 불안해 할 틈도 없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그래서 붙잡아 놓을 것이 없는, 완전한 자유인(?) 타베티 뤼트퀘넨이 가는 곳마다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엉뚱한 일이 벌어진다. 기억이 온전한 젊은이 세포 소르요넨은 때때로 질색을 하고, 뤼트퀘넨을 말려야 하잖을까 생각하지만, 결국 그는 뤼트퀘넨의 말썽을 외려 도와주는 역할을 맡는다. 이런 엉뚱한 사건들은 나쁜 결과를 낼 것 같지만 모두 좋게, 아-주 좋게 마무리 된다. 비단 사건의 주인공인 뤼트퀘넨과 소르요넨 외의 다른 사람들, 조연이나 엑스트라들에게도 말이다. 마법같다.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들이 예상했던 결과와는 다른, 정말이지 '왜 걱정을 했지' 싶은 결과들이 주르륵 펼쳐진다. 

  그래서일까. 천지분간못하는 망아지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보통은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아무렇잖게 하는 이들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탁 트인다. "야- 이거 뭐야! 말도 안 돼! 우와~ 얘 횡재했는데! 좋겠다~ 어이, 당신 그건 좀 아니잖아? 그래도 돼?" 그렇게 피식피식 웃으면서 뤼트쾨넨과 소르요넨, 그 외 등장인물들을 따라가다보면 왠지 세상이 아주 유쾌해진다. 남들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가끔은 사고를 쳐도 괜찮잖을까~ 하는 느낌이 모락모락 드는 것이다. 더구나 <웃는 암소들의 여름>처럼 일탈의 결과도 모두 좋을 것 같다! 

  책을 여는 순간 들었던 생각- "암소가 웃어?"는 책을 덮을 때 즈음에는 "소가 웃으면 어떠냐. 소도 웃겠지. 안 웃는다면 지금부터 소를 웃겨볼까?"로 바뀐다. 암소도 봤으면 웃을, 타베티 뤼트퀘넨과 세포 소르요넨 그리고 그 외 다수의 유쾌한 여름은 무더운 여름날 한 잔의 얼음물처럼 속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웃는 암소들의 여름>은 234p로 끝이 났지만, 지금도 웃는 암소들의 여름-대한민국 편-이 내 집 근처 어디에선가 계속되고 있을 것 같다.
   

  덧붙임. 

  개인적으로 목장을 파괴하는 부분이 참 시원했다. 이 소설은 사회를 비꼬는 풍자소설이지만, 전체적으로 그냥 황당한 돈키호테식 모험담으로 여기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 하다.

2008.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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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미로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흔들림없이 곧바로 진실을 향해 돌진!

  가끔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폭주하는 증기기관차'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칙칙폭폭 어찌나 그렇게 흔들림없이 달려가는지. 그 때는 수사관(탐정, 의사, 경찰 기타등등)이 좀 인간같지 않아 보인다. 수사관 류의 사람도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연애도 하고 시험도 보고 상사에게 치이고 부하에게 까이고 기타등등의 일상적인 일을 겪을 텐데, 당연히 수사할 때도 한눈도 팔고 수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이나 할까 고민도 하고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정의를 위해서! 라고 돌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니까 불만은 없다. 그냥 좀 궁금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죽은 자들의 의사' 베수비아 아델리아 라헬 오르테즈 아길라는 독특하다. 물론 그녀도 범인에게 가지는 분노와 진실을 추구하며 몸을 사리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에서 본 것처럼. 그러나 <죽음의 미로>에서 아델리아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뜨뜻미지근하달까?

  잉글랜드의 내전을 막기 위해 페어 로잘린드를 살해한 진범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기, 일행의 안전, 그리고 영 껄적지근한 사이가 되어버린 로울리 주교에게 신경이 더 쏠려 있는 것 같다. 범인을 찾기 위해서 눈을 빛내던 의사보다는 일상을 그리워하는 여성의 모습이 더 진하게 묻어 나온다.

  그래서일까. 아델리아가 목격한 두 살인사건의 관계가 밝혀졌을 때, 그리고 페어 로잘린드를 살해한 암살자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깜짝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미로>는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보다 인상이 약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델리아로서는 잉글랜드의 내전이 일어나는게 뭐 문제냐는 생각이 들 거다. 아델리아는 살레르노가 고향인 '외국인'이다. 전쟁 나면 뜨면 그만이다.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고문당하고 죽는다'는 사건에 비하면 별로 분노할 건덕지도, 열심일 건덕지도 없는 것이다. 잉글랜드에서 사는 지인들이 설득해서 머리로 납득한다고 해도 자신의 안위보다 수사를 우선시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나서기엔 뭐한 것이, 아델리아가 설치고(?) 다닐 경우 그녀는 마녀라는 의혹을 받아서 종교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는 것이다. 락샤사 때와는 달리 아델리아를 은근히 도와줄 로울리 주교도, 울프, 수사관 시몬도 없다.

  그 미적지근한 모습이 아델리아의 매력으로 느껴졌다면 좀 우스울까. 12세기 잉글랜드에 사는, 한 발 잘못 디디면 마녀로 몰릴 수 있는 '여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외국 출신의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생판 모르는 곳으로 가서 잉글랜드 내전을 막기 위한 수사를 해야 하는데 펄펄 날아다니면서 정의를 향해 직진-하는 모습이라면 외려 거부감이 들었을 것 같다. 이거 판타지? 하고. 닥터 아델리아 시리즈는 충분한 시대적 틀 안에서 있을 법한 캐릭터들을 움직인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니까, 아델리아의 고민 덕에 행동이 뜨뜻미지근해도 "12세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라고 이해가 간다.

  또, 아델리아의 미적지근함은 "여성"이라는 주제를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에서 강하게 인상에 와 닿은 것이 "법"이었다면, <죽음의 미로>에서는 "여성"이었다. 아키텐 공녀이자 잉글랜드의 왕비 엘레오노르, 헨리 2세의 정부인 페어 로저먼드, 로저먼드의 가정부, 엠마 아가씨, 아델리아와 아델리아의 아기, 원장수녀와 부원장수녀. 등장인물들은 각각 다른 "여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하나같이 좁고 약하고 위태롭다. 중세 유럽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엘레오노르 왕비가 그려진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유럽 최고의 상속녀이고 궁정식 연애라는 개념과 기사도의 도입 등 많은 활약을 한 여걸이지만, <죽음의 미로>에서 비치는 그녀의 그림자는 가냘프고 약하다. 엠마 아가씨는 12세기 잉글랜드에서 벌어지는 연애와 혼인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닥터 아델리아 시리즈의 특징인 '범인을 잡고 사건이 해결되었음에도 무진장 씁쓸한 뒷끝'을 남긴다.

  <죽음의 미로>는 추리보다는 스릴러 같다. 잉글랜드의 상황 자체가 심상치 않다 보니 "어떻게 될까?" "저건 왜 저렇게 되나?" "이래서야 수사나 하겠나?"하는 상황으로 자꾸 밀려가는 것이다. 게다가 두 가지 살인사건이 얽히고 설키면서 헛갈리게 한다. 마지막에는 강한 한 방! 개인적으로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보다 <죽음의 미로> 쪽의 플롯과 반전이 더 강력하다. 끝까지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앞부분부터 차근차근 단서가 늘어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졌다!"라고 두 손을 들어올리게 된다.

  아델리아가 미적지근해? 라고 어쩐지 두 번째 시리즈는 땡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께서는 걱정 말고 읽어보시길. 플롯에서 풀어내는 실꾸러미를 잡고 두근두근 미로를 헤매는 그 재미만 가지고도 충분하다. (아델리아와 로울리의 연애전선이 궁금하신 분은 좀 씁쓸할 수도 있겠다.) 잘 짜인 그물망에 걸려, 막판에는 프라이팬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 것이다.

 

  닥터 아델리아의 세 번째 이야기를 기대하며, 이만 총총.

 
 

2008.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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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12세기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에서 4명의 아이가 연달아 실종된 뒤 고문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진짜 살인범을 잡아내기 위해서 살레르노의 닥터 베수비아 아델리아 라헬 오르테즈 아길라가 나폴리의 시몬과 함께 잉글랜드로 온다.

  이만하면 감을 잡았을 것이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은 추리소설이다. SF가 아닌데 우습게도 읽으면서 자꾸 '타임머신'이 생각났다.

  어느 책에선가, 어느 방송에선가? "중세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왕과 기사와 공주님이 등장하는 낭만적인 시대가 아니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내로 들어서는 순간 이층 창문에서 쏟아붓는 오물덩어리를 목격할 것이라고.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에서 나타나는 12세기의 모습도 환상을 깨기는 마찬가지다. 12세기 잉글랜드 케임브리지는 전체적으로 음울한 분위기다(4건의 어린이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니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정말로 '이상한' 광경들이 보인다. 유능한 의사인 아델리아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실력을 맘껏 쓰지 못하고 마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쓸까 걱정하는 장면은 별로 이상할 것도 못 된다. 살인자와의 공범을 고발한 아델리아가 도리어 피고인이 되어 재판장에 선다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그 외에 정신병자로 판명난 자가 '아무 조치 없이 세상에 풀려나거나' 혹은 '교수형 당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가 없다는 것, '고문을 하면 안 된다, 병이 들었으니 치료를 해야 한다'는 아델리아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 등.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의 주인공, '죽은 자들의 의사'인 아델리아는 무척이나 현대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직업적 사명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그녀는 다른 것이 아닌 '인간'을 본다. 그러나 12세기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에서 그녀는 이방인이다. 실제로도 시칠리아 섬에서 온 이방인이긴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살레르노 이외에는 발 붙일 곳 없는 이방인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 현대에 사는 우리가 보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참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받아들일만 한데도.

  아마도 '타임머신'이 생각난 이유는 12세기라는 배경에 서 있는 21세기적인 여성 아델리아 때문인 듯하다. 

  내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척이나 단순한데, 꼭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용의자를 고르고 용의자가 잡히고 재판에 가고 항소하고 어쩌구저쩌구 하는 미적지근한 일들이 이어지지만(일단 잡아놔도 용의자가 '범인'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추리소설 속에서는 깔끔하게 "얘가 범인이다!"하고 못을 박아버린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에서도 범인이 속 시원하게 밝혀진다. 그러나 그 뒤에는 '진흙탕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범죄는 범인과 피해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재판이 있고, 재판장이 있고, 권력싸움이 있고, '범죄' 이외의 여러 요소가 혼탁하게 얽힌다. 그래서 범인을 밝혀낸 아델리아는 별 웃기지도 않는 죄목으로 '피고'가 되어 재판정에 들어간다. 아델리아는 풀려나고 악인은 처벌을 받았고 유대인들은 누명을 벗었고 케임브리지는 시골마을로 돌아왔다. '그러나' 입 안이 텁텁하다. 이것이 정의인가? 

  12세기라는 역사적 배경과 '여성 검시관'이라는 소재, 그리고 락샤사의 범죄가 잘 버무러진 글이다. 추리소설로도 즐길 수 있고, 역사소설로도 즐길 수 있고, 그리고 아델리아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즐길 수 있다(그 외에도 많은 독특한 캐릭터가 있다). 하지만 나는 범인이 밝혀진 이후의 497p~ 552p까지의 내용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나에게 던지는 어떠한 질문을 받은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이 부분을 돌려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묘하게 가슴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은 죽은자들의 의사 아델리아의 이야기이고, 교회의 권위에 눌린 세속의 왕 헨리 2세의 이야기이고, 그들과 락사샤와 기타등등이 살아가는 12세기 잉글랜드의 이야기이지만, 나의 이야기도 됐다.

  작가가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을 끝낸 말로 나도 이 책의 리뷰를 마치겠다.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 있기를.'

  세상 이치란 오묘하고 정의란 참 어려운 것이다.

  



 2008.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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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토너의 흡연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유능한 마라토너가 있다. 그의 이름은 '채'다. 그는 흡연을 한다. 마라톤에 최적의 음식이라는 땅콩버터도 먹지 않고 치즈도 먹지 않는다. 대신 커피를 하루에 세잔 네잔씩 마신다. 담배, 커피, 그것들을 끊고 땅콩버터와 치즈를 먹으면 두 시간 대에 진입할 수 있다. 두 시간 대 진입은 마라토너의 꿈이다.

  이쯤 되면, 우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이 있다.

  "채, 저 사람, 미친 거 아냐?"

  하지만 채는 이상하다는 듯 대답한다.

  "담배 끊을 바에야 마라톤을 왜 합니까? 저는 평생 담배 피우려고 마라톤으로 몸 다지는 겁니다."(p.65.)


  [그러나 사장은 어째서 회사가 건강해져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누구나 회사가 건강해져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째서 회사가 건강해져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p.60.]

  ["적자를 타파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회사 문을 닫는 거야. 회사가 폐업하면 만성 적자는 하루아침에 사라져." "뭔 헛소리야? 회사 문 닫으면 적자 걱정 없다고? 그걸 누가 몰라? 사람이 죽으면 건강 걱정은 뭐 하러 해?" p.60.]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명제는 사실 주객전도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을 즐기기 위해 건강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건강하게 살기 위해 되려 삶을 즐기지 못하고 족쇄가 채워진다. 채가 담배를 오래 피우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마라톤을 위해 담배를 당장 끊으라고 하는 것처럼.

  마라토너의 흡연을 비롯해 총 일곱개의 단편이 들어 있는 <마라토너의 흡연>은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세상이 과연 합리적인가 질문하는 책이다. 주객이 전도된 세상은 아닌가 하고.

  말하자면 다음의 질문과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 농부와 변호사가 있다. 이 중에서 세상에서 '없으면 안 되는' 직업은 무엇인가? 농부다.

  '중요한 직업은 더 나은 보수를 받는다.' 그런데 왜 농부보다 변호사의 보수가 나은가? 변호사는 희소하며 대체용이성이 낮기 때문이다.

  없으면 안 되는 직업은 농부지만 중요한 직업은 변호사이다. 이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합리적'인 일인가?

  표제작인 마라토너의 흡연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섯 개의 단편들도 하나같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는 세상은 과연 합리적인가? 라디오에서 들리는 만큼 아름다운가? 학교에서 배워온 만큼 멋진가? TV에서 보이는 것처럼 찬탄할 만한가?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의로운가? 유행가 가사 한 줄이 말하는 것처럼, '살 만 한가'?

  그렇다면 사람들이 "에에이, 이 제기랄 놈의 세상."하면서 술 한 잔 들이키고 집에 들어가는 일은 진즉 없어졌을 것이다. 아무도 안 보는 골목길에서 "거지같은 인생이야."라고 홀로 낮게 욕지꺼리를 하지도 않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믿고 있다. 세상은 합리적이고, 아름답고, 멋지고, 찬탄할 만하고, 정의롭고, 살 만 하다고.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살 맛이 안 나니까.

  조두진 씨가 보여주는 것은 현실이다. 현실이지만 어딘지 내가 살고 있는 곳 같지 않은 묘한 낯섬이 감돈다. 거울 속의 순희가 되어 밖의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뀌어 있지만 거울 속 모릅과 밖의 모습은 주의하고 있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마라토너의 흡연>은 소설이다. 읽는 동안 현실을 상기시키며 줄곧 내가 서 있는 발 끝을 들여다보게 하는 글이 아니라, 소설처럼 읽히는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을 덮고 나면, 내가 발 디딘 현실을 방금 봤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 부조리함, 그 아이러니, 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찜찜함. 그걸 느끼면 피식 하는 비웃음이 나온다. 우리가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가치가 실은 그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두 눈으로 목격 할 수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생생하게 알게 되어서. 그래서인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한결 어깨가 가볍다.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있다면 우리 머리 속에나 폼잡고 들어앉아 있다.

  조두진 씨는 믿음과 체험 사이의 간격을 바늘로 콕콕 집어준다. 그 바늘 끝은 자못 유쾌하고 가볍지만,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듯이 깊은 자국이 남는다. 그리고 그 자국을 뒤늦게 가만히 쓸어보자면, 아프다.

  변호사는 농부보다 훌륭하다. 조두진 씨는 농부보다 훌륭하다는 변호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씩 웃으면서 묻는다. "정말 그럴까?"




2008.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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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
김도언 지음 / 민음사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는 그야말로 '밋밋하고 우울한 일'의 결정판이다.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하나같이 제대로 된 인물이 없다. 실패한 인생이고 얼룩진 인생이다.

  어디 한 군데 매력을 느낄 부분이 없다. 책임감이 있느냐, 도덕심이 있느냐, 그렇다고 원리원칙이 있느냐, 야망이 있느냐 열정이 있느냐. 제목 그대로 정말이지 멜랑꼴리한 인생들인데, 그 멜랑꼴리라는 것도 드라마틱한 커다란 멜랑꼴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가끔씩 머릿속을 습격하는 사소한 멜랑꼴리에 속해 있다.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에는 딱히 커다란 사건도 없다. 물론 각 인물들에게 작은 변화가 있긴 하다. 그러나 #89에서 시작되어 #1로 넘어가고 #88에서 끝나는 구성처럼 앞으로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비슷한 일이 하염없이 반복될 것 같다. 마치 일상의 한 자락을 쑹덩 잘라내어 보여주는 것 같은 소설이다. 왜, 인생에는 클라이막스 따위 없지 않은가. 나중에 되짚어보면 그 때가 참 내 인생의 황금기였지, 하는 부분이 있을런가는 몰라도.

  작가는 시종일관 덤덤한 시선으로 멜랑꼴리한 인물들과 그들의 일상을 서술한다. 가만히 그것을 따라가다보면 왠지 모르게 저런 사람도 있지, 저렇게 살 수도 있지, 하고 그 삶을 긍정하게 된다. "삶은 늘 순간순간을 견디는 것 뿐이다."(본문 p.203.)라는 말처럼 삶을 견뎌내고 있는 그들에 대한 작은 감탄과 함께. 작가는 그들을 옹호하는 말 한 자락 내비치지 않는데도 말이다.

   각자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 모두는 모두의 인생이 있다. 존경받을 만한 삶이 아니라 경멸받을 삶이라도, 삶을 살아낸다는 것 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 하다. 그래서일까,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의 마지막장을 덮고 나자 왠지 힘이 솟았다.

 
p.s.

  지극히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사실 이 책이 성선설을 지지하며 사람들을 격려하는 밝고 따듯한 내용은 아닙니다. 멜랑꼴리한 인생들이 나와서 멜랑꼴리한 일상을 보여주다가 끝납니다. 순환적 구성이나 건너건너 아는 사이인 등장인물들, 좁은 테두리 안에서 빙빙 도는 느낌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냥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인생 뭐 별거 있어,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남들이 어떻게 보든 삶의 무게를 견디는 그 자체가 대단한 거다. 라고.

 

2008.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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