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미로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흔들림없이 곧바로 진실을 향해 돌진!

  가끔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폭주하는 증기기관차'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칙칙폭폭 어찌나 그렇게 흔들림없이 달려가는지. 그 때는 수사관(탐정, 의사, 경찰 기타등등)이 좀 인간같지 않아 보인다. 수사관 류의 사람도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연애도 하고 시험도 보고 상사에게 치이고 부하에게 까이고 기타등등의 일상적인 일을 겪을 텐데, 당연히 수사할 때도 한눈도 팔고 수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이나 할까 고민도 하고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정의를 위해서! 라고 돌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니까 불만은 없다. 그냥 좀 궁금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죽은 자들의 의사' 베수비아 아델리아 라헬 오르테즈 아길라는 독특하다. 물론 그녀도 범인에게 가지는 분노와 진실을 추구하며 몸을 사리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에서 본 것처럼. 그러나 <죽음의 미로>에서 아델리아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뜨뜻미지근하달까?

  잉글랜드의 내전을 막기 위해 페어 로잘린드를 살해한 진범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기, 일행의 안전, 그리고 영 껄적지근한 사이가 되어버린 로울리 주교에게 신경이 더 쏠려 있는 것 같다. 범인을 찾기 위해서 눈을 빛내던 의사보다는 일상을 그리워하는 여성의 모습이 더 진하게 묻어 나온다.

  그래서일까. 아델리아가 목격한 두 살인사건의 관계가 밝혀졌을 때, 그리고 페어 로잘린드를 살해한 암살자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깜짝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미로>는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보다 인상이 약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델리아로서는 잉글랜드의 내전이 일어나는게 뭐 문제냐는 생각이 들 거다. 아델리아는 살레르노가 고향인 '외국인'이다. 전쟁 나면 뜨면 그만이다.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고문당하고 죽는다'는 사건에 비하면 별로 분노할 건덕지도, 열심일 건덕지도 없는 것이다. 잉글랜드에서 사는 지인들이 설득해서 머리로 납득한다고 해도 자신의 안위보다 수사를 우선시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나서기엔 뭐한 것이, 아델리아가 설치고(?) 다닐 경우 그녀는 마녀라는 의혹을 받아서 종교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는 것이다. 락샤사 때와는 달리 아델리아를 은근히 도와줄 로울리 주교도, 울프, 수사관 시몬도 없다.

  그 미적지근한 모습이 아델리아의 매력으로 느껴졌다면 좀 우스울까. 12세기 잉글랜드에 사는, 한 발 잘못 디디면 마녀로 몰릴 수 있는 '여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외국 출신의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생판 모르는 곳으로 가서 잉글랜드 내전을 막기 위한 수사를 해야 하는데 펄펄 날아다니면서 정의를 향해 직진-하는 모습이라면 외려 거부감이 들었을 것 같다. 이거 판타지? 하고. 닥터 아델리아 시리즈는 충분한 시대적 틀 안에서 있을 법한 캐릭터들을 움직인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니까, 아델리아의 고민 덕에 행동이 뜨뜻미지근해도 "12세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라고 이해가 간다.

  또, 아델리아의 미적지근함은 "여성"이라는 주제를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에서 강하게 인상에 와 닿은 것이 "법"이었다면, <죽음의 미로>에서는 "여성"이었다. 아키텐 공녀이자 잉글랜드의 왕비 엘레오노르, 헨리 2세의 정부인 페어 로저먼드, 로저먼드의 가정부, 엠마 아가씨, 아델리아와 아델리아의 아기, 원장수녀와 부원장수녀. 등장인물들은 각각 다른 "여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하나같이 좁고 약하고 위태롭다. 중세 유럽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엘레오노르 왕비가 그려진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유럽 최고의 상속녀이고 궁정식 연애라는 개념과 기사도의 도입 등 많은 활약을 한 여걸이지만, <죽음의 미로>에서 비치는 그녀의 그림자는 가냘프고 약하다. 엠마 아가씨는 12세기 잉글랜드에서 벌어지는 연애와 혼인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닥터 아델리아 시리즈의 특징인 '범인을 잡고 사건이 해결되었음에도 무진장 씁쓸한 뒷끝'을 남긴다.

  <죽음의 미로>는 추리보다는 스릴러 같다. 잉글랜드의 상황 자체가 심상치 않다 보니 "어떻게 될까?" "저건 왜 저렇게 되나?" "이래서야 수사나 하겠나?"하는 상황으로 자꾸 밀려가는 것이다. 게다가 두 가지 살인사건이 얽히고 설키면서 헛갈리게 한다. 마지막에는 강한 한 방! 개인적으로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보다 <죽음의 미로> 쪽의 플롯과 반전이 더 강력하다. 끝까지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앞부분부터 차근차근 단서가 늘어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졌다!"라고 두 손을 들어올리게 된다.

  아델리아가 미적지근해? 라고 어쩐지 두 번째 시리즈는 땡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께서는 걱정 말고 읽어보시길. 플롯에서 풀어내는 실꾸러미를 잡고 두근두근 미로를 헤매는 그 재미만 가지고도 충분하다. (아델리아와 로울리의 연애전선이 궁금하신 분은 좀 씁쓸할 수도 있겠다.) 잘 짜인 그물망에 걸려, 막판에는 프라이팬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 것이다.

 

  닥터 아델리아의 세 번째 이야기를 기대하며, 이만 총총.

 
 

2008.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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