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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12세기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에서 4명의 아이가 연달아 실종된 뒤 고문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진짜 살인범을 잡아내기 위해서 살레르노의 닥터 베수비아 아델리아 라헬 오르테즈 아길라가 나폴리의 시몬과 함께 잉글랜드로 온다.
이만하면 감을 잡았을 것이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은 추리소설이다. SF가 아닌데 우습게도 읽으면서 자꾸 '타임머신'이 생각났다.
어느 책에선가, 어느 방송에선가? "중세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왕과 기사와 공주님이 등장하는 낭만적인 시대가 아니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내로 들어서는 순간 이층 창문에서 쏟아붓는 오물덩어리를 목격할 것이라고.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에서 나타나는 12세기의 모습도 환상을 깨기는 마찬가지다. 12세기 잉글랜드 케임브리지는 전체적으로 음울한 분위기다(4건의 어린이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니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정말로 '이상한' 광경들이 보인다. 유능한 의사인 아델리아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실력을 맘껏 쓰지 못하고 마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쓸까 걱정하는 장면은 별로 이상할 것도 못 된다. 살인자와의 공범을 고발한 아델리아가 도리어 피고인이 되어 재판장에 선다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그 외에 정신병자로 판명난 자가 '아무 조치 없이 세상에 풀려나거나' 혹은 '교수형 당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가 없다는 것, '고문을 하면 안 된다, 병이 들었으니 치료를 해야 한다'는 아델리아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 등.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의 주인공, '죽은 자들의 의사'인 아델리아는 무척이나 현대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직업적 사명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그녀는 다른 것이 아닌 '인간'을 본다. 그러나 12세기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에서 그녀는 이방인이다. 실제로도 시칠리아 섬에서 온 이방인이긴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살레르노 이외에는 발 붙일 곳 없는 이방인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 현대에 사는 우리가 보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참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받아들일만 한데도.
아마도 '타임머신'이 생각난 이유는 12세기라는 배경에 서 있는 21세기적인 여성 아델리아 때문인 듯하다.
내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척이나 단순한데, 꼭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용의자를 고르고 용의자가 잡히고 재판에 가고 항소하고 어쩌구저쩌구 하는 미적지근한 일들이 이어지지만(일단 잡아놔도 용의자가 '범인'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추리소설 속에서는 깔끔하게 "얘가 범인이다!"하고 못을 박아버린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에서도 범인이 속 시원하게 밝혀진다. 그러나 그 뒤에는 '진흙탕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범죄는 범인과 피해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재판이 있고, 재판장이 있고, 권력싸움이 있고, '범죄' 이외의 여러 요소가 혼탁하게 얽힌다. 그래서 범인을 밝혀낸 아델리아는 별 웃기지도 않는 죄목으로 '피고'가 되어 재판정에 들어간다. 아델리아는 풀려나고 악인은 처벌을 받았고 유대인들은 누명을 벗었고 케임브리지는 시골마을로 돌아왔다. '그러나' 입 안이 텁텁하다. 이것이 정의인가?
12세기라는 역사적 배경과 '여성 검시관'이라는 소재, 그리고 락샤사의 범죄가 잘 버무러진 글이다. 추리소설로도 즐길 수 있고, 역사소설로도 즐길 수 있고, 그리고 아델리아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즐길 수 있다(그 외에도 많은 독특한 캐릭터가 있다). 하지만 나는 범인이 밝혀진 이후의 497p~ 552p까지의 내용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나에게 던지는 어떠한 질문을 받은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이 부분을 돌려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묘하게 가슴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은 죽은자들의 의사 아델리아의 이야기이고, 교회의 권위에 눌린 세속의 왕 헨리 2세의 이야기이고, 그들과 락사샤와 기타등등이 살아가는 12세기 잉글랜드의 이야기이지만, 나의 이야기도 됐다.
작가가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을 끝낸 말로 나도 이 책의 리뷰를 마치겠다.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 있기를.'
세상 이치란 오묘하고 정의란 참 어려운 것이다.
2008. 11. 6.